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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41화 (142/208)

141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잔을 살짝 내려 뒀는데 테이블이 부러지고 기울었다.

억울했지만, 일단 나탈리아의 옷이 완전히 더러워진 상황이라 나는 그녀를 먼저 살폈다.

“괜찮으세요?”

“하, 지금 괜찮다는 말이 나와요?”

나탈리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그녀의 추종자가 눈을 부릅떴다.

억울하네, 진짜.

“아니 이건 제가 그런 게 아니라, 테이블이 혼자…….”

내 말을 자르며 다른 영애가 끼어들었다.

“말이 돼요, 그게? 변명에 성의가 없으시네요.”

“전 괜찮으니까…….”

“나탈리아 영애, 여기요! 닦을 것 좀 가져왔어요.”

“아, 고마워요.”

나탈리아가 나름 중재를 하려고 했으나, 영애 하나가 어디서 구해 온 천으로 나탈리아의 치마를 박박 닦으며 주의를 끌었다.

“이쪽도 묻었어요.”

“천 좀 더 가져와요.”

귀족 영애라는 분들이 스스로 천을 가져와 나탈리아의 치마를 닦아 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나를 매섭게 째려보는 눈빛을 마주한 채 외롭게 진실을 말했다.

“정말 제가 그런 게 아니고요. 테이블이 망가진 거 같아요.”

그러자 그녀들이 인상을 쓰며 나를 노려봤다.

“최악이네요. 아무리 사과하기 싫어도 그렇지 그런 성의 없는 변명을 하다니.”

“잠깐만, 저 여자 그 봄국에서 왔다는 영애 아니에요?”

“설마 폐하께서 초대하셨다던…… 나탈리아 영애, 아니죠?”

가을국 영애들 사이에서 내 얘기가 나왔던 걸까.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탈리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그들이 말하던 영애가 맞나 보다.

“어쩐지 알렉스 전하가 찾아온 게 이상하다 싶더니만.”

“일부러 그랬네. 우리 나탈리아 영애를 질투한 거야.”

“세상에, 뭐 저런 뻔뻔한…….”

순식간에 분위기가 권선징악 내연녀 응징 타임으로 흘러갔다.

와, 나 진짜 억울하네.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테이블을 확인해 보면…….”

억울함을 호소하며 테이블을 가리키는데 순간 테이블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한쪽 다리가 짧았다.

황실 연회에서 쓰는 테이블인데 하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특히나 무서운 건 이 테이블이 원목 테이블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황족이 앉아 있는 단상을 쳐다봤다.

그러자 반쯤 몸을 일으킨 디아나와 라리사가 보였고, 그 옆에 평온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가을국 황제도 보였다.

설마, 황제 짓인가?

가을국 황제도 생명의 이능이 있잖아.

그러나 그가 왜 이런 유치한 짓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벌렸던 입을 닫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구의 짓인지 알게 되니 누구의 짓이라 말할 수가 없었다.

황제를 이 난장으로 끌어들이면 어떤 역풍이 올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 짜증나네.

일단은 누명을 써야 하나.

황제가 의도한 짓이라면 그냥 당해 주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사과할 생각으로 나탈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는데 분위기가 한층 더 험악해져 있었다.

그녀에게 부나방처럼 달려든 가을국 귀족들이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노려보거나 부채로 입을 가리고 속닥거렸다.

어느덧 멀리 있던 귀족들도 이쪽으로 몰려들어 소란을 구경했다.

나는 빨리 상황을 끝내려 대충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나탈리아 영애, 드레스는 배상해 드릴게요.”

이번에도 나탈리아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영애가 말했다.

“하, 이게 얼마인 줄 알아요? 무려 본 셰밍에서 맞춘 드레스라고요!”

나탈리아는 입 없니? 너네 너무 시녀 역할에 충실하는 거 아니냐고.

나는 가늘어진 눈으로 시녀 놀이를 하는 귀족 영애들을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쟤들이라고 좋아서 저럴까. 설정값이겠지 뭐.

“얼마가 되든 말해 주시면 배상할게요.”

“어이가 없네요. 드레스가 한두 푼이에요? 허세 부릴 때가 아니에요. 용서해 달라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아니, 드레스 좀 망가졌다고 뭘 빌기까지 해요.”

흐린 눈으로 표독스러운 말을 한 영애를 쳐다봤다.

그리고 허세도 아니란 말이야.

나 통장에 돈 많아.

본 셰밍 드레스는 보통 50~ 100골드 정도였고, 내 통장에는 5천만 골드가 있었다.

나는 빨리 황제의 장난질에서 벗어나고 싶어 넉넉하게 보상금을 제안했다.

“500골드 정도면 될까요?”

순간 사위가 고요해졌다.

안면근육을 떨던 영애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500골드?”

“허세겠죠.”

“허세 아니에요. 내일 바로 수표 써서 도미니가 타운 하우스로 보내 드릴게요.”

그들의 대화에 퉁명스럽게 끼어들자 영애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 조용히 있던 영애가 한 발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돈이면 다 되는 게 아니죠.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지. 돈은 우리 나탈리아 영애도 많아요!”

아니, 아까는 허세 부리지 말라며.

보상을 한다니까 이제는 진심을 요구한다.

진심을 담은 사과야 돈도 안 들고 어려운 게 아니니 나는 고개를 숙이려 했다. 그러나 비단 천에 머리를 박은 탓에 고개가 그대로 튕겨 나왔다.

눈앞에 검은 곤복이 있었다.

곧게 뻗은 어깨 위로 수놓아진 금빛 용도 보인다.

언제 내려온 건지 디아나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큰 키 탓에 앞에 선 가을국 귀족 영애들을 가파른 각도로 내려다보았다.

뒤에서 지켜보는 나조차도 움츠러들 만한 고압적인 자세였다.

무표정한 얼굴에 자리한 검은 눈동자가 지긋이 영애들의 시선을 눌렀다.

시선을 떨군 가을국 영애들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때, 디아나의 긴 머리칼이 까슬한 자수 위에서 마찰했다. 그녀가 고개를 기울인 탓이다.

테이블로 시선을 미끄러뜨린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레이디.”

“네? 네! 폐하.”

불특정다수를 지칭하는 호칭에 영애들이 모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디아나는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테이블을 밀어 보게.”

“아, 예!”

내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라던 영애가 화들짝 놀라며 먼저 테이블을 밀었다.

하지만 100인분의 잔을 거뜬히 감당하던 거대한 테이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끙끙, 소리를 내며 밀어도 움직이지 않자 옆에 서 있던 영애 몇 명이 그녀를 도와 테이블을 밀었다.

어린 소녀들이라 그런지 제 친구가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0명이나 힘을 모았음에도 테이블은 밀려나지 않았다.

디아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럿이 미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테이블을 어떻게 레이디 데이지 혼자 쓰러뜨릴 수 있을까?”

그러자 내가 지금까지 아니라고 해도 펄쩍 뛰던 귀족 영애들이 입을 싹 다물었다.

아, 진작에 얘네보고 밀어 보라고 할걸.

우리 디아나 영애의 처세에 감탄하고 있는데 뒤에서 차분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름국이었다면 이런 테이블을 고른 연회 관리자에게 죄를 물었을 텐데, 가을국은 친히 방문해 준 손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군요.”

국서였다.

그는 여전히 배꽃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청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가을국 귀족들을 응시하다 테이블로 시선을 틀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나긋하게 덧붙였다.

“물론 가을국에 큰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참 수준이 기대 이하입니다.”

그는 여전히 가을국을 혐오하는 모양인지 담담하게 모든 영애를 한 번에 모욕했다.

영애들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조국 후려치기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때, 누군가 내 다리에 달라붙었다.

“우리 봄국 제국민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모욕하고, 음해하다니! 그것도 여럿이서!”

어눌한 아이의 말투로 화를 내며 라리사가 내 다리를 꽉 끌어안았다.

“황녀님…….”

나는 라리사가 내 사정거리에 들어온 김에 사심을 채우려 그녀를 안아 들었다.

품에서 고소한 아기 냄새가 밀려왔다.

‘아아, 소소한 힐링…….’

고구마 속에서 마주한 힐링 요소에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욕심을 내 보드라운 라리사의 하얀 머리칼을 쓰다듬는데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리사 황녀. 멋대로 나가면 안 된다.”

엄한 아버님의 목소리에 나는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아빠, 가을국 사람들이 우리 봄국 제국민을 겁박했어요!”

“거, 거, 겁박이라뇨!”

“오해십니다, 황녀님!”

사색이 된 가을국 영애들이 비명을 질렀다.

봄국 황제는 그나마 이성적이었다.

“라리사, 황녀인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이리 오거라.”

그는 어쨌든 3국이 연합한 행사인 만큼 중립을 지키려는 듯했다.

아랫것들의 싸움은 아랫것들이 알아서 하게 두라는 뜻이었다.

나는 라리사를 돌려줘야 하나 망설였다.

흑, 봄국 황제 자식. 너는 맨날 이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생명체를 끼고 산다는 거지?

다음 생엔 너로 빙의한다.

눈물을 삼키며 라리사를 떼어 내려는데, 라리사가 와락 내 목을 끌어안았다.

아아, 욕 좀 먹으면 어때.

황녀님이 내 편을 들어 준다면 나 가을국 영애 100명한테 억울하게 욕먹어도 돼.

다행히 라리사에게 가려져 황제는 내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라리사는 화가 난 모양인지 허리를 세운 채 말을 쏟아 냈다.

“그치만 아빠, 봄국 황제와 황녀가 보는 앞에서 봄국 제국민을 괴롭히고 명예를 더럽혔어요! 이건 우리를 무시한 거예요. 가을국 황제와 황후 폐하가 계시니까 ‘봄국 황제가 보든 알 게 뭐야?’ 한 거라고요!”

“허어억.”

“오, 오해십니다!”

“저희가 언제 그런 생각을!”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가을국 영애들은 황실 플레이 고수의 진짜 음해와 곡해를 받자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라리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훌쩍이며 입을 달싹였다.

“황후도 없는 반쪽 황실이라고 우리를 무시한 거예요. 엄마가 계셨으면 아빠도 저도 이렇게 무시받지 않았을 텐데…… 흐아앙.”

마침내 가정사까지 끌고 들어왔다.

가을국 영애 하나가 혼절했다.

그러나 라리사는 개의치 않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라리사 속상해요. 우리 제국민이 무시받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으아아앙. 감히 아빠를 모욕하는데도 죽일 수도 없고. 흑흑.”

아이 특유의 순수한 얼굴로 울며 라리사가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주, 죽이신다니요.”

놀란 가을국 영애가 바들바들 떨었다.

설마 죽이겠니. 그냥 하는 말이지.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울먹거리는 가을국 영애들의 얼굴을 고소한 마음으로 감상했다.

그러게 왜 죄 없는 사람을 괴롭혀. 너희만 영애들 있는 줄 알아? 나도 든든한 영애들이 있다고.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분을 참는 소리였다.

“모욕이라…… 감히, 나를. 황녀를.”

짓씹듯 단어를 끊어 말하며 봄국 황제가 으르렁댔다. 모욕에 민감한 폭군이 각성하는 소리였다.

나는 익숙한 분노의 패턴에 주춤했다.

마왕이랑 전쟁하기 전에 지금 이 자리에서 3국 전쟁이 벌어지게 생겼다.

일이 커지는 건 반갑지 않았다.

가을국 황제랑 엮이기 싫어서 누명을 쓰려고 한 건데, 컨트롤 불가능한 봄국 황제가 끼어드는 건 사절이었다.

어떤 막장 전개가 펼쳐질지 모르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나는 봄국 황제의 시야를 가렸다.

“폐, 폐하. 폐하와 황녀 전하를 이곳까지 내려오시게 만들어 송구합니다. 오해로 인해 벌어진 작은 소란입니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때 국서가 끼어들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레이디가 해결을 하지?”

그는 인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내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걸 강조했다.

“그대에게 필요한 건 무례한 이들의 사과뿐이지.”

국서는 자연스럽게 고삐 풀린 봄국 황제가 가을국 영애들을 물어뜯도록 길을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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