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내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나탈리아는 계속 제 추억을 늘어놓았다.
“나중에는 질투도 좀 났죠. 전하가 저렇게 열렬히 눈에 담아 주는 게 부러웠거든요. 그게 필체라도.”
그러고 보니 알렉스 필체랑 내 필체랑 뭔가 비슷한 거 같기도 했다.
날 따라 한 건가?
“이제 데이지 양의 말을 믿어요. 전하는 완벽한 분이지만, 그래서 모시기에는 까다로운 분이죠. 체이스 경이라니. 하하, 바로 이해했어요.”
나탈리아는 경계를 푼 눈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체이스 경을 떠올리고 바로 나와 알렉스의 관계를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니, 그래서 알렉스가 나한테 유명한 명필 어쩌고저쩌고했던 건가?
알렉스의 집요한 성정을 떠올려 보니 그동안 마나 데이 카이헬드 이름으로 필사하고 거래한 책을 모두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와, 카이엘드 은행에 있는 내 계좌도 아는 거 아니야?
그럼 겨울국 협회랑 계약한 것도 알지도…….
입안이 바짝 마른다.
왜 그걸 알면서 아무 말도 안 한 거지?
그때, 웅성거리는 소음이 고막에 들이찼다.
고개를 들자 넓은 연회 홀이 보였다.
벌써 5층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들어가죠.”
나탈리아는 내게 완전히 적의를 거둔 모양인지 함께 들어가길 청했다. 거절하기 어려워서 나는 그녀와 함께 입장했다.
그리고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녀의 이름이 호명되자 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몰려왔다.
역시, 나탈리아는 실세였다.
묘한 동경의 눈빛으로 나탈리아를 보던 눈동자들이 내 쪽으로 살짝 각도를 틀자마자 어둡게 가라앉았다.
적대감을 가진 캐릭터 하나의 마음을 돌렸더니, 수십 쌍의 적대감 어린 눈빛이 다시 따라붙었다.
역시 나는 황성에 안 맞는 체질이다.
구석에서 숨죽이다가 조용히 돌아가야지.
그러나 나탈리아 옆에서는 그게 불가능할 것 같았다. 네임드 원작 여주는 웬만한 유저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지녔기 때문이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영애와 귀부인들이 눈치를 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탈리아, 오랜만이에요.”
“어머 영애,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다정한 목소리가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밀려왔다.
나를 힐긋거리는 시선이 있기는 했지만, 옆에 워낙 거물이 있다 보니 적대감을 대놓고 드러낼 시간이 부족한 듯했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옆으로 한 발씩 물러나며 가을국 귀족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무리에서 분리되었을 때, 걸음을 틀어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아웃사이더를 위한 자리인지 그곳에는 홀로 선 사람들이 샴페인을 마시거나, 창밖을 보며 말 걸지 말라고 분위기로 벽을 쳤다.
나는 커튼이 쳐진 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그제야 가을국 연회장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카펫이 깔려 있고 돔형으로 둥글게 솟은 천장은 층고가 아주 높았다.
그 이유는 연회장 한쪽 벽에 놓인 단상 때문이었다. 적어도 쉰 개 정도 되는 계단 위에 단상이 있었다. 황족을 위한 자리인 듯하다.
타국 황족의 자리도 마련한 모양인지 여섯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연회를 즐기는 가을국 귀족이라면 목 디스크에 걸릴 일은 없을 것 같다. 황족 자리만 몇 번 쳐다보면 자연스럽게 스트레칭이 된다.
나는 꺾인 고개를 다시 내리고 샴페인을 나르는 사람을 눈으로 찾았다.
뭐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마침 핑크빛 음료를 서빙 하는 남자가 지나갔다. 기쁘게 손을 뻗는데 우람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남자는 재빠르게 뒤돌아 사라졌고, 사람들은 나누던 담소를 그만두고 홀 중앙으로 모였다.
몇몇 무리가 앞으로 나오니 금세 홀이 가득 찼다.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나도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쯤에서 의문이 들었다.
황제와 황후가 나를 보고 싶어 해서 초대했다던데, 실은 그냥 나를 관람하고 싶었던 건가?
황족이 방문객 사이에 섞여 소탈하게 대화하는 분위기는 아닌 거 같은데.
나는 빼꼼히 고개를 들어 다시 높은 단상을 쳐다봤다.
저 자리에서 내 얼굴이 보이기는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여름국 황제 폐하와 국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디아나와 국서였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펼 뻔했다.
‘국서 이제 확실히 복권됐구나!’
그리고 또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봄국 황제 폐하와 황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라리사도 왔다.
나는 얼른 연동해 두었던 메시지 창을 눈앞에 띄웠다.
[디아나 영애,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라리사 영애도 여기서 만나네요. 반가워요.]
그녀들은 내가 여기 올 줄 몰랐는지 놀란 듯 바로 답장했다.
[디아나: 영애, 잘 지냈어요? 반갑긴 한데 왜 영애가 여기 있나요?]
[라리사: 엥? 데이지 영애가 왜 여기 있어요?]
[초대를 받았거든요.]
그러자 더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 왜요?]
[라리사: 왜에에에에요?]
사실 나도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가을국 황제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데,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어요.]
비슷한 내용을 라리사에게도 보냈다.
[디아나: 이상하네요.]
[라리사: 웬일이래요. 황제가 딱히 살가운 캐릭터가 아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때, 고개를 들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져 모두가 허리를 폈다.
나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디아나와 라리사의 시선에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중앙 자리에 있는 가을국 황제와 황후를 보고 움찔했다.
와, 황제는 알렉스랑 똑같이 생겼네.
황제는 직모고 알렉스는 살짝 구불거리는 머리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아, 얼굴선도 좀 차이가 있다.
알렉스는 예쁘장한 얼굴이라 선이 얇은 편인데, 황제는 턱도 각지고 눈썹도 짙고 전반적으로 테스토스테론의 흔적이 강했다.
그리고 황후는 금발에 붉은 눈을 가졌는데, 고아하게 올려 묶은 머리 탓에 눈꼬리가 가파르게 기울어 좀 무서웠다.
나는 기시감을 느끼고 나탈리아를 쳐다봤다.
나탈리아의 헤어스타일과 똑같다.
‘황후가 롤 모델인 건가.’
가을국의 여성상인가 싶어서 유심히 두 여자 캐릭터를 번갈아 보다 관두었다.
가을국 문화 알아서 뭐 하냐.
나는 마침 내 앞을 지나가는 샴페인 잔을 보고 얼른 손을 뻗어 음료를 들었다.
그런데 그때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디아나: 영애, 조심해요. 가을국은 황족이나 귀족 중에 유저가 없어서 연회 플레이가 힘든 거로 유명하거든요.]
[라리사: 원작 여주 중에 좀 이상한 캐릭터 있는 거 알죠? 플레이 불안하다 싶으면 말해요. 도와줄게요.]
그녀들의 눈에는 아직도 내가 뉴비로 보이는지 여전히 내 걱정을 했다.
그에 대한 내 반응은 ‘감사합니다!’였다.
이미 나탈리아가 이상하다는 걸 경험했고, 여기 황족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 감지했다.
그런데 도와준다니 구명조끼를 입고 어린이 풀장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황성이 안전하게 느껴진다.
황제가 짧은 축사를 마치자 단상 아래에 있던 악단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연회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이리저리 섞이며 대화를 이어 갔다.
나는 조용히 벽에 기댄 채 침묵을 지켰다.
힐긋 단상 위를 보니 밀랍인형처럼 황족들이 허공을 보고 있었다.
진짜 연회 내내 저러고 있는 건가?
심심하겠다.
나는 적응 안 되는 가을국 연회를 지켜보며 슬쩍 창틀 난간에 엉덩이를 걸쳤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벌써 다리가 아팠다.
어제 너무 돌아다녔나 봐.
게다가 숙취도 아직 남아 있다.
불멍을 하듯 홀을 보며 멍을 때리는데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누군가는 나를 보며 심심하지 않을까 걱정했을지 모르지만,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라리사: 가을국 황성은 진짜 노잼 월드 인정. 연회가 이 모양이면 말 다 했죠.]
[디아나: 공감해요. 저는 웬만하면 타임워프를 잘 안 하는데, 가을국 연회는 몇 번 타임워프 했어요.]
[영애들 대단하세요. 저 같으면 허리 아파서 아예 입궁을 거부했을 거 같아요.]
나는 디아나와 라리사와 단체방을 파서 떠들고 있었다.
[라리사: 저는 아빠 무릎에 엎드려 있는데 뭐가 힘들겠어요.]
[디아나: 부럽네요. 그러고 보니 영애는 먼저 들어가 봐야 하지 않아요? 영애 취침 시간 밤 8시로 알고 있는데.]
[라리사: 제 취침 시간 어떻게 아셨어요?]
[디아나: 아까 봄국 황제가 8시에는 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말해 줬어요. 굉장히 살벌하게 말하던데요?]
[라리사: 맞아요. 아빠가 제 식사 시간이랑 취침 시간에 엄격하거든요.]
[디아나: 육아물 여주의 숙명이죠. 취침과 식사에 위협되는 일에 주변 사람들이 민감하잖아요.]
[라리사: 맞아요. 정말 쓸데없는 걱정인데.]
라리사가 입꼬리를 꼬물거리며 웃었다.
[라리사: 어차피~ 밤에~ 몰래~ 나갈건데에에~~~.]
[영애 약속 있으세요?]
[라리사: 네! 오늘 6년 차 유저 동기 모임 있어서, 신전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디아나: 아, 아이시스한테 들었어요. 신전 기도실 비워 놨다던데, 걔 그러다 천벌 받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라리사: 맞아요. 아이시스는 천벌 받을 거예요. 가을국에 왔는데 저한테 포도주를 안 주고 우유를 준다는 거 있죠? 성녀가 무슨 인성이 그 모양인지 모르겠어요.]
[아니, 영애…… 아이 몸으로 포도주를 드시려고 하면 어떡해요.]
나는 분개하는 라리사를 흐린 눈으로 보며 메시지를 보냈다.
[라리사: 영애가 6년 동안 강제 금주를 해 봐야 내 마음을 알 거예요.]
[디아나: 영애는 타임워프도 자주 해서 6년 꽉 채운 것도 아니잖아요.]
[라리사: 쓰읍. 영애끼리 타임라인을 뭘 그렇게 빽빽하게 따져요. 공백기도 경력으로 인정해 주세요.]
나는 디아나와 라리사의 투덕거림을 들으며 웃음을 참았다.
[그나저나 메시지 아이템 진작 살 걸 그랬어요. 너무 편하네요.]
[라리사: 맞아. 데이지 영애 처음 만났을 때, 메시지 차단돼서 답답했는데. 영애가 아이템의 맛을 깨달아서 너무 좋아요.]
[그때 라리사 영애 덕분에 캐시의 존재를 알게 됐죠. 감사했어요.]
[디아나: 영애 또 가족 소개하고 캐시 챙기셨군요. 아빠 소개했어요, 오빠 소개했어요?]
[라리사: 후후, 아빠요.]
[디아나: 영애는 효녀인지 불효녀인지 모르겠어요.]
이런 대화를 하고 있으니 시간이 훅훅 흘렀다.
그런데 어젯밤 숙취 때문인지 자꾸 목이 탔다. 나는 한쪽에 차려진 핑거 푸드와 음료를 보고 그쪽 테이블로 갔다.
물 한 잔을 마시자 갈증이 조금 해소됐다.
‘살 것 같네.’
나는 단상 위를 올려다봤다.
그냥 진짜 얼굴이 보고 싶었던 건가?
황제가 날 보고 싶어 한다고 들었는데, 대체 왜 초대한 건지 모르겠다.
표정 없이 딱딱하게 앉아 있는 황족들을 보다 새 물 잔을 들었다.
‘진짜 관상 보려고 부른 건가.’
그때,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이 난 곳으로 시선을 튼 나는 그대로 굳었다.
[라리사: 황제가 알렉스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알렉스 왜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