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1. F의 정체
138화.
“드레스 챙겨 오길 잘했네.”
나는 리안 영애가 주었던 물망초 벨 드레스를 입고 거울에 비춰 봤다.
외관은 대충 구색 맞췄고. 이제 진짜 중요한 걸 챙겨야지.
첫 번째, 이동 스크롤 3장.
나는 생명줄 같은 스크롤을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여차하면 바로 찢고 도망치는 거야.
두 번째, 메시지 창 연동.
타국 황족도 오는 파티니까 미리 AI 연동 메시지를 디아나와 라리사의 채팅방에 연결해 두자.
가을국 황실이 막장으로 나오면 나도 황족 뒤에 숨어야지.
세 번째, 금화 10개.
혹시라도 납치를 당하면, 이번엔 매수를 시도해 보자. 10골드면 괜찮겠지?
안전을 위해 물건을 챙기던 나는 밀려온 자괴감에 화장대 대리석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나 연회 꼭 가야 해?”
화장대에 놓인 황실 초대장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 가면 독대할 핑계를 주는 거겠지.
아프다거나 사정이 있다고 불참하면 그때는 비공식 일정으로 개인적인 만남을 청해 올지도 모른다.
만약 황실이 내게 나쁜 마음을 먹고 있다면, 그쪽이 덫을 치기 더 쉬울 거다.
그나마 먼치킨 황족 유저들이 있을 때 같이 들어가는 게 안전할 것 같다.
아, 벌써 피곤하네. 오늘은 체력을 지켜야 하는데.
나는 힘 빼지 않기 위해 불안함을 털어 냈다.
오늘은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황성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오라 호텔에서 예약해 준 마차를 비에른에게 양보했다.
가을국 황성 연회에 초대받지 못한 귀족들은 저들끼리 시가 모임을 따로 잡았다고 한다.
비에른은 아카데미에서 교우 관계가 좋았는지, 동창생인 가을국 친구에게 그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비에른이 가을국 황실의 홈그라운드에서 항의를 할까 봐 황실 연회에 초대받은 걸 말 못 했는데, 오늘 아침에 그가 마차를 써도 되는지 양해를 구하는 걸 보고 아예 입을 다물었다.
분명 비에른 성격에 연회에 초대받았다는 말을 하면, 나보고 타고 가라며 본인은 걸어간다고 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무슨 연회에 가는 거냐고 꼬치꼬치 캐묻겠지.
황성은 호텔에서 멀지 않았다.
호텔에서 ‘현재’ 섬까지 걸어서 15분이면 도착했고, 황성은 섬 코앞에 있으니 도보로 총 20분 남짓한 거리였다.
마차를 하나 더 구할 생각을 아예 안 해 본 건 아니다.
오라에게 물어봤지만, 이미 호텔에서 예약해 둔 마차는 모두 다른 손님들이 선점한 뒤였다.
드레스가 더러워질까 봐 걱정되긴 했지만, 어차피 황성에 가도 더러워지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로판에서 도보로 황성 무도회 가는 영애는 나밖에 없겠지.
상관없다. 어차피 가을국 황족이나 귀족은 유저도 아니고 한 번 보고 말 사이인데.
동창회에 가는 우리 비에른의 기를 살려 주는 게 중요하지. 어쨌든 이건 효도 여행이잖아.
방을 나온 나는 맞은편 요한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러나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자나?
연회에 다녀온다고 말해 주려 했는데.
낮잠이 급하다던 그 말은 진심이었는지 잠든 모양이었다.
나는 몇 번 더 문을 두드려 보다 내 방으로 돌아가 쪽지를 썼다. 황실 초대를 받아 연회에 갔다가 밤에 돌아올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요한도 같이 데려갈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알렉스와 우연히 마주치는 상상을 하고는 바로 그 생각을 접었다.
나는 요한의 방문 아래로 쪽지를 밀어 넣은 뒤 호텔을 나왔다.
***
작은 사각 돌을 끼워 만든 도로는 우툴두툴했다. 그래서 발바닥이 통통 튀는 기분이었다.
선선한 바람도 좋았고, 레몬색 노을 위로 아스라이 걸친 남색 밤하늘도 운치 있었다.
축제 특유의 따스한 소음도.
살랑이는 바람을 따라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봄국도 날씨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가을국도 좋았다.
사계국은 제 계절의 장점을 담은 날씨를 간직했다.
언제 나갈지 모르니 이 예쁜 세계를 실컷 즐겨 두고 싶었다.
그런데 사실은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왜 로판 여주들이 마차를 타고 가는지 알 것 같았다.
화려한 벨 드레스를 입고 걸으니 사람들이 전부 나를 쳐다봤다.
‘그냥 내가 마차를 탈걸.’
다행히 거리가 가까워서 금방 황성에 도착했다.
나는 성벽 앞에 길게 늘어선 마차를 보고 놀랐다. 마차를 구하기 어려울 만했다. 세상 모든 마차가 여기에 다 모인 건지, 줄은 다리를 지나 섬 건너편까지 이어졌다.
정문 근처까지 온 나는 쭈뼛쭈뼛 그 마차 행렬 옆으로 걸어갔다.
근위병이 마부가 내미는 초대장을 확인하고 입장을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석자가 직접 자신의 초대장을 내미는 경우는 없었다.
‘아, 진짜 창피하다.’
사람들이 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로판에서 왜 도보로 파티에 입장하는 여주가 없었겠어.
민망함을 조금이라도 감춰 보려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걸어가는데 옆에서 느릿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마치 내 걸음 속도를 맞추어 걷는 것처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차로 시선을 틀었다.
부내를 풍기는 화려한 마차 창문이 천천히 내려갔다. 레이스 커튼이 젖혀지자 아는 얼굴이 드러났다.
보랏빛 독버섯, 나탈리아였다.
그녀는 머리칼을 바짝 올려 묶은 탓인지 평소보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풀뱅 아래에서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경악에 물들어 있다.
“……설마 걸어가는 건 아니죠?”
역시 도보 입궁은 예법에 맞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척 어색하게 웃었다.
“축제 기간이라 마차를 예약하기가 쉽지 않네요.”
“하.”
그녀가 거센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타요.”
무서운 원작 여주가 도와주니 좀 꺼려졌다.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때, 탈옥한 원작 여주에게 죽을 뻔한 유저의 후기도 읽었던지라 선뜻 이 호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나탈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한쪽 눈을 찡그렸다.
“지금 거절하는 거예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거절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죠.
그녀가 손을 까닥였다.
“타요.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니까.”
“싫으신데 왜 굳이…….”
나도 모르게 진심이 입 밖으로 새나왔다.
그러자 나탈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내 발을 쳐다봤다.
“구두 신었잖아요.”
그게 왜?
이해할 수 없어 쳐다보자 그녀가 여전히 내 구두에 시선을 둔 채 인상을 썼다.
“그대로 사파이어 궁까지 걸어가면 발바닥이며 뒤꿈치며 물집 잡히고 난리 날걸요? 연회장은 언덕 위에 있고 계단은 100개도 넘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인사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계단 100개는 심하잖아.
나탈리아는 까닥 작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 인사를 받았다.
마차는 바로 움직였다.
나는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마차 안에서 손가락을 매만지다 나탈리아에게 물었다.
“사실 절 싫어하시는 줄 알았어요.”
“제대로 봤어요.”
“그래도 도와주셨잖아요.”
나탈리아는 해괴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당연히 도와줘야죠. 그 신발을 신고 연회 홀까지 가면 영애 발에 물집 잡혀서 며칠 내내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이거 누가 들어도 걱정이다. 그런데도 앙칼진 목소리 탓에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속은 따뜻한데 겉이 무섭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좋은 말이니 감사 인사를 또 했다.
곧 침묵이 시작됐다.
다행히 마차는 금세 연회가 열리는 사파이어 궁에 도착했다.
하지만, 손님이 많이 몰려서 입장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마차에서 내린 후에야 나는 왜 입구에 사람이 몰려 있는지 알게 되었다.
입구에 거대한 사진기가 세워져 있고 기자로 보이는 남자가 참석자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다음은 도미니가의 레이디 나탈리아와 봄국 에스텔라가의 레이디 데이지입니다.”
한 여자가 우리를 힐긋 보고는 이름을 읊어 줬다. 그러자 기자가 눈을 크게 뜨며 허둥지둥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나탈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웃어요.”
반사적으로 미소를 짓자, 찰칵 소리가 들렸다. 사진을 찍고 나니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가을국 연회 관리자 이사벨라 레티시아입니다. 도미니가의 영애와 봄국의 에스텔라 영애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쪽은 황실 신문사인 ‘엘 메디오’에서 나온 수석 기자 안토니오입니다.”
남자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가볍게 묵례했다.
도미니가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방금까지 사진을 찍던 귀족들에게는 이런 인사가 없었다.
“신년제에는 일간 발행으로 7일간 제국민에게 축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문에 사진을 게재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사벨라라는 관리자는 준비한 종이에 사인을 받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을국은 인쇄와 사진 기술이 발달해 초상권 개념이 있는 모양이었다.
빽빽이 적힌 사인을 보니 여기서 나만 안 한다고 하면 유난 같아서 동의한다고 서명했다.
그리고 솔직히 이 시대 종잇값이 얼마인데 내 사진까지 신문에 넣겠어?
간단한 인터뷰를 마치고 난 뒤 드디어 입장했다. 성안으로 들어서자 나탈리아가 입을 열었다.
“알렉스 황태자님과는 무슨 사이예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같은 탐사대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에요. 굳이 비교해 드리자면 알렉스 황태자님과 체이스 경 같은 관계죠.”
나탈리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한쪽 눈을 찌푸렸다.
“설마요.”
“정말이에요. 저는 겨울국 탐사를 하는 동안, 마물보다도 황태자님이 부탁하시는 업무량이 더 무서웠답니다.”
나탈리아와 싸우기 싫어 과장한 말이었는데 내가 듣기에도 제법 진심으로 느껴졌다.
“업무요?”
“네, 저는 탐사대에서 주로 회의록 정리와 탐사 보고서를 작성했거든요. 손목이 부러지는 줄 알았죠.”
“아…….”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나탈리아의 눈이 흐려졌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라버니가 황성에서 일해서 들었는데, 중간에 관리들이 종이가 모자라다고 황성으로 돌아오곤 했다더군요. 일주일마다 박스째로 새 종이를 들고 갔다던데 설마…….”
“아, 맞아요. 제대로 세 보지는 않았는데 아마 그 정도는 썼을 거예요. 한 번 통과 받으려면 반려를 세 번 정도 받았으니까요. 나무에 제가 많은 죄를 지었죠.”
사실 반려한 알렉스의 죄지만, 눈치 없이 여기서 황족을 모욕해 꼬투리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내 말을 들은 나탈리아가 피식 웃었다.
“전하가 완벽주의 성향이 있긴 하시죠. 아카데미 시절에도 그랬어요.”
나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완벽주의면 본인 혼자 완벽하지 왜 나 같은 대충주의까지 고생을 시키냐고.
그래도 분위기가 풀어져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탈리아가 옆으로 바짝 붙으며 이상한 말을 했다.
“전하는 완벽하세요.”
“아, 예…… 그러시군요.”
“완벽한데도 더 완벽해지고 싶어 하시죠.”
“아, 그래요? 그렇군요.”
노골적으로 관심 없음을 드러내는데도 나탈리아는 도도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최고여도 만족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는 모습이.”
나탈리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가끔은 미칠 것 같아요.”
나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슬쩍 눈을 굴리며 계단을 셌다.
빨리 5층에 가고 싶다.
가을국 실세라고 했으니 연회장에 들어가면 나탈리아한테 사람들이 몰려들겠지. 그때 거리를 둬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나탈리아는 홀로 추억에 빠진 듯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번은 문학 수업 중에 계속 필기를 하시는 거예요. 필기할 게 없는 수업인데 말이죠.”
그녀는 손에 든 부채를 살랑이며 말을 이었다.
“알고 보니 필사를 하고 계신 거였어요. 책의 필체가 마음에 드신 모양인지, 한동안 필사를 하면서 그 필체를 배우려 하셨죠.”
이미 완벽하신데, 라고 덧붙이며 나탈리아가 또 입을 다물고 제 추억을 음미했다.
생각해 보니 알렉스의 필체는 완벽했다.
곡선은 컴퍼스로 굴린 것처럼 완벽하게 휘어졌고, 직선은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반듯했다.
너무 완벽해서 가끔은 편지가 아니라 원서를 읽는 기분을 느꼈다.
“그 시기가 좋았죠. 도서관에 가면 집중하고 있는 전하를 마음껏 볼 수 있었거든요. 오죽하면 마나 데이 카이헬드에게 후원금을 보내고 싶을 정도였죠.”
“쿨럭.”
“괜찮아요?”
“아, 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먼지가, 콜록콜록.”
나는 아무 일도 아닌 척 헛기침을 했지만, 속으로는 비명을 질렀다.
마나 데이 카이헬드가 왜 여기서 나와!
데이지의 가명, 필사해서 책을 팔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