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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37화 (138/208)

137화.

‘……더워.’

아직 세밀하게 온도 조절이 되지 않는 근대의 보일러는 불가마 같았다.

심지어 통유리 창으로 가을볕까지 들어오니 온몸이 뜨거워졌다.

보일러 끄려면 일어나야 하는데.

‘으으. 쓸데없이 디테일한 게임 같으니.’

나는 욕설을 삼키며 이불에 무거운 머리를 파묻었다.

일어나서 보일러를 끄고 커튼도 쳐야 하는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보드카와 샴페인을 섞어 마신 대가였다.

나는 오븐 속에서 구워지는 오징어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신음했다.

“으…….”

일단 햇볕에 바짝 마른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겨 태양을 피했다.

‘1분만 있다가 일어나자.’

그런데 그때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가위에 눌린 건가?

그러나 몸이 아프긴 해도 고개는 자유롭게 움직였다.

이불을 치우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직사광선이 눈을 찔렀다.

“으윽.”

건조한 각막을 찢으며 들어온 일광에 나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갑자기 레몬색으로 빛나던 시야가 한 톤 어두워졌다. 그리고 서늘한 바람이 뺨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다시 천천히 눈을 뜨자 커다란 손이 보였다. 누군가 내 미간에 손날을 붙이고 있었다.

그 작은 그림자 덕분에 눈이 편하게 움직였다.

‘……아직 잠이 덜 깼나.’

들어올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 내 침대 앞에 앉아 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손이 움직였다. 이마에 붙어 있던 손은 위로 올라가더니 내 머리카락에 제 손가락을 파묻었다. 그리고 빗질을 하듯 천천히 내려갔다.

그 손끝에서 흘러온 미약한 한기가 머리카락에 달라붙었다.

내려간 손이 다시 올라왔다. 땀에 젖은 머리칼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을 느끼며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더럽지 않나?’

몽롱한 정신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정작 손의 주인은 아무 생각이 없는지 끊임없이 내 머리와 이마 그리고 목덜미를 쓸며 체온을 낮춰 주었다.

기분이 좋았다.

더 이상 생각을 하기 싫을 정도로.

한참 그 시원한 손길을 누리던 나는 차츰 정신을 찾아갔다. 갑작스레 쏟아진 빛에 흐려졌던 시야가 선명해진 탓이다.

손의 주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요한이었다.

그는 제 손길을 따라 눈동자만 살짝 움직일 뿐, 말없이 다시 내 머리칼을 쓸었다.

뭔가 이상했다.

왜 이상한지는 모르겠는데, 기분이 묘했다.

사방에서 들이차는 햇빛과 투박한 보일러가 방에 온기를 채우고 있는데 나는 한기를 느꼈다.

요한의 이능 때문인지, 시야에 담기는 서늘한 표정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때, 요한의 눈동자가 내 눈으로 내려왔다.

역광이라 그런가. 푸른 눈동자가 평소보다 어둡게 느껴진다.

세상이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과 얇은 머리카락의 마찰음만이 귓가를 이따금 간질였다.

나는 계속 요한을 쳐다봤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주 큰 비밀인지 아니면 민망한 얘기인지 요한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감에 온 감각이 예민해졌다.

특히 시야가.

이런 순간이 몇 번 있었다.

요한은 종종 의뭉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럴 때는 늘 눈이 오거나, 세상이 눈에 뒤덮여 있었는데.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실내에서 저런 시선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한기를 느꼈나 보다.

익숙한 눈동자와 표정이 지난 기억을 불러온다.

구름이 지나가며 잠시 사라졌던 햇볕이 다시 들이찼다.

눈이 쌓이듯 그의 윤곽 위로 햇살이 포근히 쌓였다.

월식을 맞이한 검은 달처럼 요한의 주변으로 흘러온 햇빛이 선명한 테두리를 만든다.

언제든 이 배경에서 오려 낼 수 있는 점선처럼.

손끝에 조금만 힘주어 누르면 허무하게 분리될 존재 같았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불안함에 내 이마를 쓰는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젖은 줄도 몰랐던 손바닥이 시원한 바람에 말라 갔다. 그 건조한 감각이 싫어 먼저 입을 열고 불편한 침묵을 깼다.

“왜 여기 있어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나왔다.

요한은 협탁에 있던 물잔을 내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대답이 없길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습니다.]”

“문은 어떻게 열고 왔어요?”

나는 잔을 받지 않고 물었다.

요한은 그대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문가를 쳐다봤다.

“[허술한 문이라 열쇠를 만드는 게 어렵지 않던데요.]”

그는 이능으로 열쇠를 만들어 문을 연 모양이었다.

만능 이능이네.

부러움에 눈이 흐려진다.

그런데 요한은 내가 화를 낸다고 생각했는지 제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눈치를 봤다.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허락 없이 들어오면 안 되는 건데, 미안합니다.]”

“대답이 없으면 자고 있는 거겠죠.”

사실 몰래 들어온 건 그렇게 화가 나지 않았는데, 다음에 또 자고 있을 때 들어올까 봐 냉정하게 말했다.

침 흘리면서 자고 있었어 봐.

아, 상상만 해도 싫다.

미간을 찌푸리자 요한이 다시 내 이마를 쓸며 물었다.

“[땀을 많이 흘리던데 어디 아픕니까?]”

“아뇨. 더워서 그래요.”

나는 그제야 요한이 걱정됐다.

요한은 나보다 훨씬 더위에 약할 텐데.

“그쪽 방은 안 더웠어요?”

“[죽는 줄 알았습니다.]”

요한은 전혀 죽을 것 같지 않은 얼굴로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나는 아직 놓지 않은 손을 흔들며 물었다.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요. 보일러 끄면 되는데.”

“[보일러요?]”

“네, 방을 따뜻하게 데워 주는 물건이에요. 벽난로 같은 건데 실내 온도를 조절할 수 있어요.”

요한은 이해가 가지 않는지 잠시 한쪽 눈을 찌푸렸지만 곧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할 수 없어도 쉽게 넘어가는 타입 같다.

“그러지 마요.”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해 못 했으면서 넘어가는 거요.”

“[안 넘어가는데요.]”

요한은 살짝 불만을 드러냈다.

나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대놓고 웃으면 실례 같아서.

가려도 실례인지 요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입니다. 지금도 이 방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대답이 없으니 제멋대로 들어왔잖아요. 확인하려고.]”

맞는 말이네.

웬일로 멋대로 굴었지?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그러네요.”

그리고 물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했어요. 이런 데 오면 원래 늦잠 자는 게 법이에요.”

“[법입니까?]”

요한이 움찔했다.

“아, 아뇨. 그만큼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어요.”

그는 뭐라 말하려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왜요. 말해요.”

재촉하자 그가 제 붉은 입술을 달싹이다 마지못해 말했다.

“[……일찍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응?”

“[오후 3시입니다.]”

“……네?”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무슨 벌써 3시예요.”

내가 아무리 게을러도 그렇게 늦게 일어난 적은…….

나는 힐긋 벽을 쳐다보다 굳어 버렸다.

정말 시계의 짧은 바늘이 3을 가리키고 있었다. 느릿하게 움직인 눈동자가 다시 요한을 향했다.

“…….”

“[아침에도 왔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반응이 없으니 걱정됐습니다.]”

그는 차분하게 제 무단 침입 사유를 밝혔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면 검투 대회도 못 갔겠네요?”

잘됐다!

그러나 요한은 내 찰나의 꿈을 바로 부쉈다.

“[왜 못 갑니까?]”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요한을 쳐다봤다.

그는 불안하게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게 한 손이 붙잡혀 있는 터라 요한은 반대 손을 어색하게 바지 주머니에 넣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증서였다.

결승전 진출 증서.

“……거짓말.”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그 증서를 빼앗아 샅샅이 살폈다.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요한이 결승전에 진출해요?!”

“[말이 안 되는 일입니까?]”

묘하게 목소리가 차갑다.

또 자기 증명을 할까 겁먹은 나는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제 말은! 아니 그러니까. 아! 제가 보지도 못했는데 혼자 이기고 오는 게 어디 있냐는 말이었죠. 아아, 아쉬워라.”

나는 억지로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본선이잖아!

전 대륙에서 온 예선 통과자들과 겨루는 본선이잖아!

또 운 좋게 미선택 남주들이랑 붙었다고?

나는 증서를 보던 눈을 들어 요한을 쳐다봤다.

어떻게 이게 가능해?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이 흔들렸다.

그런 내 속을 모르는 요한은 제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깊게 잠든 것 같아서 혼자 다녀왔는데, 깨울 걸 그랬습니다.]”

아니야. 그것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고.

이게 뭐지, 대체?

나는 요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를 자세히 살폈다.

요한은 세계관이 달라서 ‘남네다’ 법칙에서 벗어나는 건가?

하지만 지금 이능을 쓰는 걸 보면 코드인지 뭔지 그게 적히고 있는 거 아니야? 사계국이 남주로 인식하고 있다는 거잖아.

봐봐, 아직도 손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걸?

‘……그럼 정말 또 대진 운이 좋았다고?’

본선에 가지 못해서 정말 운 좋게 미선택 남주들과 붙은 건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고 증서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그러자 요한이 손을 뻗어 내 입술을 풀어냈다.

“[다칩니다.]”

고작 이런 거로 다칠 리가.

진짜 검으로 싸우고 온 남주가 말하기엔 지나치게 부드러운 걱정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헛숨을 흘리는데 요한의 소매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소매에 핏물이 배 있었다.

“다쳤어요?!”

나는 놀라 요한의 소매를 걷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빠르게 팔을 거두는 바람에 보지 못했다.

“[아닙니다.]”

“아닌데, 피가 묻어 있던데요? 줘 봐요.”

“[괜찮습니다.]”

“아니, 줘 보라니까요?”

내가 몸을 기울이자 요한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괜찮은 거 봤으니까 나가 보겠습니다. 더 주무십시오.]”

“잠 다 깨워 놓고 뭘 또 자래요. 상처 보여 줘요.”

“[다친 거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요한은 빠르게 문가로 걸어갔다.

거짓말을 못 하는 모양인지 누가 봐도 티가 나게 도망친다.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린 채 그 모습을 쳐다보는데, 자기도 민망했는지 문고리를 잡은 요한이 힐긋 뒤를 돌아봤다.

“[제가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낮잠이 급해서……. 그럼 주무십시오.]”

달칵.

요한은 기어코 방을 나갔다.

나는 요한이 사라진 문가를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세상에 낮잠이 급한 사람도 있구나.

‘……그럴 리가 있냐.’

나는 요한의 어색한 거짓말에 할 말을 잃었다.

요한은 거짓말을 진짜 심각하게 못하는 사람이었다.

왠지 속아 줘야 할 것 같다.

그래. 저렇게까지 하는데 인간적으로 속아 주자.

상처도 별로 심해 보이지 않았고.

내가 본 건 말라붙은 핏자국이었다.

색이 옅은 게 찜찜하지만 마른 걸 보면 출혈은 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다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좀만 더 자자.”

다시 침대에 누워 몽실몽실한 이불에 뺨을 묻으니 천국에 온 기분이 들었다.

잠시라도 이 평온함을 오롯이 즐기고 싶었다.

‘한 시간 뒤에 준비해야지.’

오라가 데스노트라고 말했던 황실 연회에 갈 준비를 하려면 한 시간 뒤에는 일어나야 했다.

나는 슬픔을 삼키며 가을국에 온 지난날의 선택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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