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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36화 (137/208)

136화.

여전히 시끄럽게 터지는 소리와 불빛이 공해처럼 주변에 가득했다.

나는 시선을 미끄러뜨려 요한의 어깨너머 광장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보며 기뻐했다.

그중에는 손목에 워치를 찬 사람들도 있었다.

광장에서 남주와 웃는 유저도 있었고, 높은 시계탑 창가에 기대 둘이서 대화를 주고받는 유저도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

위험을 감수하고 취향에 따라 남주를 선택할까?

나는 다시 요한을 바라봤다.

씁쓸한 요한의 표정이 보인다.

로판의 꽃, 불꽃놀이를 남주와 함께 보고 있는데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복잡한 마음을 누르고 그에게 노트를 받아 다시 말을 적었다.

[내일 저 원형 극장에서 검투 대회 본선을 한대요.]

요한이 제 뒤에 놓인 원형 극장으로 잠시 시선을 틀었다.

나는 다시 문장을 적었다.

[대회에서 떨어지면 제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거 기억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입매를 기울이며 다시 적었다.

[잊지 말아요.]

요한은 또 자존심이 상하는지 눈을 찌푸렸다.

[제가 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대답 대신 다른 말을 썼다.

[온 김에 경기장 한번 둘러보고 갈까요? 내일 경기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지만, 요한도 하려던 말을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순순히 내가 돌린 화제를 따라와 주었다.

나는 해결할 수 없는 불안 때문에 지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차츰 사그라지는 폭죽 소리를 들으며 요한과 나는 경기장으로 걸어갔다.

***

축제에서 돌아오니 거의 12시였다.

간단히 씻고 나왔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요한인가?

왜 이 시간에 찾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긴장한 채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틈으로 불쑥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시에나와 오라였다.

“안 자고 있었네요?”

두 사람은 술을 마신 모양인지 붉어진 얼굴로 히죽 웃고 있었다.

“시에나 영애가 ‘망각의 밤’ 패키지를 샀는데, 도저히 다 못 먹을 거 같아서 가져왔어요.”

오라가 트롤리 위에 가득한 술병을 건드렸다. 그 위에는 새 샴페인과 보드카 병이 놓여 있었다.

못 먹을 거 같아서는 핑계고 이미 한 패키지를 끝냈으면서, 더 마시려고 새 패키지를 챙겨 찾아온 것 같았다.

나는 흐린 눈으로 그들을 보다 안으로 들였다.

“일단 들어오세요.”

트롤리를 끌고 오던 오라가 창밖을 보고는 감탄했다.

“내가 만들었지만 우리 호텔 야경 뷰 장난 아니다. 그쵸?”

오전에 봤던 사업가 언니 어디 갔어요.

오라는 술상을 차리며 쉴 새 없이 내부 인테리어를 찬양했다. 그러다 내게 고개를 돌렸다.

“데이지 영애는 가을국에 처음 온 거죠?”

오라가 샴페인 잔을 내밀며 물었다.

“아, 네. 처음이에요.”

나는 목욕 가운을 여미며 소파로 다가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오라가 피식 웃으며 주황색 카드를 하나 건넸다.

“가을국에서만 쓸 수 있는 유저 특권이에요. 우리 탑백 영애들한테만 발급해 주는 특별 회원권.”

오라는 창문 너머 거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기 1층에 있는 프랜차이즈 가게들 거의 다 가을국 영애들 사업이거든요. 이거 보여 주고 결제하면 30%씩 할인해 줘요.”

“유저인 걸 오프라인에서 티 내도 돼요?”

“괜찮아요. 원래는 연간 1,000골드 이상 결제하는 고객들한테 주는 건데, 우리는 실적 없어도 주는 정도니까. 여기 적힌 브랜드는 다 동참한 거예요. 쇼핑할 때 할인 챙기세요.”

나는 감동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시에나가 소파에 앉으며 손뼉을 쳤다.

“맞다. 데이지 영애가 준 입욕제 너무 좋더라고요. 고마워요.”

“괜찮으셨어요? 저도 내일은 꼭 써 봐야겠네요.”

“영애는 목욕 안 했어요?”

“네, 저는 축제에 다녀왔어요.”

“아하, 그 호위 기사 남주랑 다녀온 거죠?”

고개를 끄덕이자 오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영애는 호위 기사 남주랑 알렉스만 슬롯에 있는 거예요?”

“아뇨. 엘런이라고 한 명 더 있어요.”

“엘런 카이엘드요?”

오라가 입을 벌렸다.

“남주 듀스 2위 한 엘런을 말하는 거예요?”

괜히 말했다. 엘런도 유명했지.

웃으며 답을 회피하자 오라가 샴페인을 다시 가득 따라 줬다.

“영애 남주복 좋네요. 저는 사실 엘런이 S급 남주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오라의 말에 시에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왜요? 1등은 알렉스잖아요.”

“음…… 알렉스는 무서운 시댁이랑 집착 원작 여주가 붙은 걸 보면 지뢰 요소가 강한 남주예요. 아무래도 외모랑 신분으로 페이크 S급 남주를 세운 게 아닐까 싶어요.”

시에나는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저는 이유 없는 1위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대중 픽 1위인 걸 보면 알렉스가 S급 같아요.”

나는 조용히 두 유저의 이야기를 들으며 샴페인을 홀짝였다.

우연히 그 두 남주를 모두 슬롯에 넣은지라, 두 남주의 평가를 듣는 게 민망했다. 누군가 내 앞에서 자식 자랑을 해 주는 걸 듣는 기분이랄까.

“그나저나 대단해요. 어떻게 S급 남주 후보 1위랑 2위를 둘 다 슬롯에 넣었어요?”

시스템의 간택이었죠.

아무것도 모르던 뉴비 시절 우연히 손에 넣은 아이템 덕분에 그 둘과 엮였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시에나가 대답을 가로챘다.

“왜 3국에서 마왕 동면지를 찾는다고 탐색대를 꾸렸잖아요. 데이지 영애도 거기 일원이었거든요. 엘런 공작과 알렉스 황태자도 같이 갔으니까 엮인 거죠.”

엘런은 그 전에 슬롯에 담긴 걸 알 텐데, 시에나는 왜인지 대신 변명을 해 주며 오라의 호기심을 차단했다.

“어머! 데이지 영애도 그 탐색대 대원이셨구나. 유저는 황제 영애랑 성녀 영애만 간 줄 알았는데.”

“제가 그즈음에 타임라인을 시작해서 절 모르는 분이 많다 보니까 소문이 안 난 것 같아요.”

오라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눈을 반짝였다.

“그나저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저희가 마왕을 먼저 공격한다면서요? 왜 굳이 그러는 거예요? 괜히 잠자는 사자 코털 건드리는 거 아니에요? 그냥 더 자게 두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나는 오라의 반응이 낯설었다.

사실 마왕의 기상 시간은 공유가 차단된 정보라 유저들은 마왕 토벌에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뭔가 하나 보다’ 하고 지나칠 뿐.

이 질문에 답해 봤자 시스템이 공유가 금지된 정보라고 블라인드를 걸어 또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게 분명하니 그냥 웃으며 회피했다.

“글쎄요. 겨울국 영토를 놀게 두기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닐까요?”

대충 둘러댔는데 오라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쵸. 그 넓은 땅을 그냥 놀게 둘 수는 없죠.”

그녀는 생각을 곱씹듯 내 말을 따라 했다.

나는 왜 알렉스와 엘런이 S급 남주 투표에서 1위와 2위를 차지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마왕 토벌대에 대한 소문이 퍼진 듯하다. 그래서 마왕 토벌대 대원인 두 남주가 유력한 S급 남주 후보로 거론된 거 같고.

S급 남주가 마왕을 물리친다고 했으니까.

근데 S급 남주가 마왕을 물리치면, 굳이 찾지 않아도 정체가 드러나는 거 아닌가?

나는 문득 호기심이 들어 영애들에게 물었다.

“저 궁금한 게 생겼는데, S급 남주는 선택되지 않아도 마왕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그녀들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애초에 히어로로 설정된 남주인데, 선택 안 돼도 타임라인 때가 되면 마왕을 물리치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오픈되는 남주 시나리오는 여주와 엮이는 로맨스 서사를 말하는 거 같거든요.”

“맞아요. 히든인 건 마왕을 물리치기 전에는 모르니까 히든 S급이라 붙인 거 같고, 마왕을 물리치고 나면 누군지 알게 되니까 S급 남주로 닉네임만 변경되지 않을까요?”

시에나의 말에 오라가 웃으며 속삭였다.

“저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S급 남주한테 관심 없지만, 마왕을 물리치고 나면 관심이 생길 거 같아요.”

“오라 영애 남주 선택하셨잖아요. 왜 관심을 두세요?”

시에나가 한쪽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오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왕을 몰아낸 영웅이면 겨울국에서 대접을 크게 받지 않을까요? 대가로 겨울국 영토를 받을지도 모르고요!”

오라가 눈을 반짝였다.

“저 겨울국으로 호텔 사업 확장 준비 중이거든요. 겨울국에 호텔 100호점 내고 로그아웃 하면 너무 좋을 거 같아요.”

시에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 직업물 여주들이 무서워. 어떻게 커리어가 꿈이 되냐고.”

나도 시에나의 반응에 깊이 공감했다.

난 내일도 목욕이나 하고 방에서 뭉그적대고 싶은데.

그런데 갑자기 오라가 내 손을 잡았다.

“영애, 만약에 영애가 S급 남주를 선택하게 되면 절 잊지 말아 주세요. 호텔 사업, 도와주세요.”

괜히 나쁜 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도와드려야죠. 근데 제가 S급 남주를 선택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에이 무조건 엘런이나 알렉스 둘 중 하나겠죠. 50% 확률이면 높잖아요. 전 영애를 믿겠어요.”

나는 또 그냥 웃었다. 오라는 엘런이나 알렉스 둘 중 한 사람이 S급이라고 믿고 있었다.

정말 둘 중 한 사람일까?

확실히 요한은 S급 남주가 아닐 것 같긴 했다.

마왕을 물리쳐야 하는 남주가 시즌 2에 있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에서는 모든 유저가 해피엔딩을 맞는다고 했는데, S급 남주가 개발 중인 맵에 있을 리가.

‘나 참…….’

또 자연스럽게 요한을 떠올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샴페인을 마셨다.

S급이 아닌데, 심지어 사계국 남주도 아닌데 나는 왜 요한에게 끌리는지 모르겠다.

빈 잔을 내려 둔 나는 마른세수를 하다 그녀들에게 물었다.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질문을 기다렸다.

“만약에 어떤 남주가 있는데 완전 영애들 타입인 거예요. 근데 선택할 수 없는 엑스트라인 거죠.”

그녀들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포기했는데, 갑자기 버그가 발생해서 그 엑스트라가 남주가 된 거예요.”

“엑스트라가 주인공이 됐다고요? 어, 나 이 설정 많이 봤는데? 메이저 에피소드 적립 안 해 주나?”

오라가 풀린 눈을 크게 뜨며 허공을 쳐다봤다.

“오라 영애, 물 좀 마셔요. 술 취했다.”

시에나는 오라에게 물을 먹이며 내게 계속 말하라고 눈짓했다.

“아, 이게 끝이에요. 취향 남주를 선택할 수 있게 됐지만, 이건 일종의 오류니까…… 음, 선택해도 [결]을 치지 못할 수도 있다면…… 그래도 그 남주를 선택하실 건가요?”

시에나와 오라는 각각 6년, 10년이나 플레이를 한 유저였다.

그녀들은 나보다 현명한 답을 알 것 같았다.

나는 긴장한 채 답을 기다렸다.

오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라면 안 고를 거 같아요. [결]을 못 치면 20억은 둘째 치고, 로그아웃도 안 될 수도 있잖아요? 오류가 일어난 거라면 시스템이 불안정하다는 뜻인데.”

시에나도 같은 생각인지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저도 그래요. 저라면 목표는 [결]이니까 취향은 내려 두고 우선 완결부터 낼 거예요. 나중에 정식 발매됐을 때 플레이 해서 다시 공략하면 되잖아요?”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그런데 오라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영애, 여기에 너무 감정 쏟을 필요 없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흠칫했다.

오라는 내 얘기라는 걸 눈치챘는지, 보드카를 새로 따 잔에 채워 주며 말했다.

“제작진은 내 취향에 따른 선택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어쩐다 하는데, 저는 솔직히 그거 거짓말 같거든요.”

그녀는 제 잔도 채웠다.

“제가 10년 플레이 해 보고 느낀 건데, 내 선택이……. 으음, 사실은 선택이 아닐 때도 있더라고요.”

오라는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예민한 걸 수도 있지만, 생각해 보면 상황이 내가 그 선택을 하도록 몰아갈 때도 있었어요.”

그녀는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깊게 생각하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가볍게 즐겨요. 최악의 플레이를 해도 20억을 타는 건 똑같잖아요?”

그녀는 원샷을 하더니 우리에게도 원샷을 강요했다.

나는 마지못해 그 독한 술을 한 번에 비웠다.

“으으. 이거 왜 이렇게 독해요?”

입안이 썼다.

그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에 나는 오라의 말에서 모순을 느꼈다.

“근데……. 정말 이 게임이 선택하도록 의도적으로 상황을 만드는 거라면, 우리가 이렇게 고민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요?”

시스템은 내가 오류를 무릅쓰길 바라는 걸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고……. 모르죠.”

뭉근하게 일그러진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오라가 뭐라고 답을 했는데 눈이 감겼다.

꽤 긴 대답을 들은 것 같은데, 기억이 모두 끊겨 버렸다.

다음화에 계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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