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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35화 (136/208)

135화.

“아.”

그러고 보니 요한은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순간 민망했지만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고백을 강요했다.

[저 때문에 마족 지대에서 사계국으로 넘어왔잖아요. 저랑 놀려고 데이트 계획도 하고. 저 좋아하는 거 맞는 거 같은데? 아니에요?]

요한은 제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쓸었다. 고민하는 거 같았다.

[제가 오해한 건가요?]

다시 묻자, 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바로 펜을 잡았다.

[그게 아니라.]

그는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말은 제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요한은 인정하면서도 끝내 좋아한다는 말을 적지는 않았다. 그 단어에 예의를 갖추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도 더 이상 고백을 강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으니까.

[진짜 궁금한데 대답해 주면 안 돼요?]

나는 내가 아까 적은 ‘제가 왜 좋아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 질문을 하나 더 적었다.

[제가 웃겨서 좋은 건가요?]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요한이 가늘게 뜬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는 웃는 요한을 보며 계속 글을 적었다.

[이거 봐요. 나를 무슨 희극인 보듯이 보면서 웃고, 그렇게 또 웃고, 이거 봐 또 웃네?]

계속 써 내려가는 글씨를 보며 요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참아 보려 노력했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어 보였다.

나는 그런 요한을 보며 다시 말을 적었다.

[제가 어디 가서 웃기는 사람이 아닌데 요한은 저한테 엄청 웃어 준다니까요?]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내 머릿속 고민을 적었다.

[개그 취향이 맞는 건가?]

그러자 요한이 제 펜으로 내 펜 끝을 막고, 노트를 제 쪽으로 가져갔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웃기지는 않습니다.]

쿵, 심장이 조각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요한은 드디어 마족이라는 제 정체성을 찾았는지 잔인한 말을 이어 갔다.

[이해할 수 없는 말도 많이 하고, 또 가끔은 혼자 생각을 건너뛰고 말해서 대화를 따라잡지 못해 웃은 적도 있고요.]

나는 나라 잃은 미어캣처럼 입을 벌리고 요한을 쳐다봤다.

미어캣에게 나라는 없겠지만, 그 정도로 허망함에 젖은 감수성 예민한 동물이 된 기분이 들었다.

요한은 내가 웃기지 않다는 얘기를 하면서, 모순되게 웃음을 참으며 콕콕 펜촉으로 종이를 두드렸다.

마저 읽으라는 듯.

나는 서운한 눈으로 요한을 쳐다보다 시선을 내려 글을 읽었다.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저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유죄.

이 사람 유죄예요. 판사님, 이거 분명 빌드업이었어요. 계획적 범죄입니다.

얼빠에 금사빠, 미연시적 심신미약자인 저를 잔인하게 홀리려 저런 극악무도한 말을 하는 게 분명합니다.

저 남주에게서 #아포칼립스 플레이권을 박탈하고, 사계국에 감금하는 형벌을 내려 주세요.

지금 이 종이는 증거물로 보관해 형사님에게 보내야 한다.

여기 셜록 홈스 선생님도 계시지 않을까?

근대 세계관이면 있을 법도 한데, 추리 로판은 없나?

‘아아, 정신 차리자.’

갑작스러운 취향 남주의 플러팅에 정신이 나갔다.

요한은 손바닥에 입술을 누른 채 다시 글을 적었다. 내 표정이 웃겼는지 또 웃음을 참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요한의 질문에 나는 조용히 답을 적었다.

[그냥 이유가 궁금해서요.]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까닥 들어 올렸다.

[어떤 이유요?]

[사실 저는 요한이 절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거든요.]

순간 요한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웃음이 사라진 얼굴로 가만히 문장을 읽었다.

어둠의 끝자락에 걸려 있던 노을이 사라진 탓에 사위가 점차 어두워졌다.

“실례합니다. 초를 켜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다가와 화병 옆에 있던 초에 불을 켜 주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뭔가 고민하던 그는 한참 뒤에 시선을 들었다.

푸른 눈동자에 촛불이 그려 낸 빛무리가 번졌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허무하게도 요한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내가 혼자 또 이상한 걱정을 한 것처럼.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 요한이 마지못해 다시 펜을 들었다.

사각사각.

종이 위로 펜촉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촛불에 녹은 기름 냄새가 테이블을 채우고, 따뜻한 빛이 요한이 써 내려간 문장을 포근하게 비추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또 간지러운 말이다.

‘첫눈에 반했다’라는 고백처럼 운명적인 말이 또 있을까.

그러나 나는 그 문장을 눈에 담는 순간 거리감을 느꼈다.

이유 없이 내게 반했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개연성이 없잖아.’

요한과 나 사이의 느슨한 틈을 채울 만한 최소한의 서사는 슬롯뿐이다.

첫눈에 반한 여자를 위해 제 세계를 등지고 떠나오는 남주는 멋지지 않다.

그 말은 처음 요한을 만난 그 자리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요한은 그 여자를 위해 또 세계를 넘어왔을 거란 뜻이니까.

고작 아이템을 내가 받았다는 이유로 이런 관심을 받는 건 기쁘지 않았다.

캐릭터에게 이러는 게 웃기지만 대체할 수 없는 나를 선택해 주길 바란 모양이다.

인간적인 매력이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내가 플레이를 잘해서 이런 사랑을 받았다면 기분이 좋았을 텐데.

그러나 고작 운으로 첫눈에 반한 행운을 누리는 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발에 맞지 않는 뻑뻑한 유리 구두를 신어 뒤꿈치 살갗이 모두 벗겨진 느낌이다.

내가 가짜라는 느낌만 선명해진다.

나는 그 기분을 인지하고 놀랐다.

내가 욕심을 내고 있어서.

아무 남주나 선택해서 [결]을 치고 나가면 되는데, 남주가 ‘나’라는 존재를 인정해 주지 않아 깬다고 생각하다니.

과몰입도 이런 과몰입이 없다.

나는 다시 시선을 들어 요한을 바라봤다.

어둑한 실내에 퍼진 은은한 촛불처럼, 거대한 욕심 사이로 피어오른 부끄러운 감정이 보였다.

나는 나를 특별하다고 여겼다. 요한이라는 캐릭터를 나 혼자 멋대로 각별하다 여기면서.

그는 그저 베타 테스트에 흔히 일어나는 버그 때문에 제 플레이 존에서 이탈한 캐릭터일 뿐인데.

나는 그 사실을 다시 되새기며 펜을 쥐었다.

그리고 담담한 플레이를 하듯 적당한 답장을 썼다.

[맞아요. 누구를 좋아하는 데 이유가 왜 필요하겠어요.]

나는 다시 웃으며 게임에 임하는 유저로서 다정한 대화를 이어 갔다.

[식사 다 하고 인형극 보러 가요. 재밌을 거 같아요.]

***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해가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그래도 건물 테라스마다 달린 등불과 거리의 가로등 덕분에 어둡지는 않았다.

게다가 인파가 늘어 거리는 더 시끌벅적해졌다.

나는 요한과 그 소란한 거리를 말없이 걸었다.

그때 눈앞으로 노트가 밀려왔다.

[화난 겁니까?]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놀라 걸음을 멈추고 그 노트를 받았다.

[아니요?]

요한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넘어가는 대신 장문을 적었다.

[제가 예민한 걸 수도 있지만, 아까 테이블에서 좋아하는 이유를 물으신 후로 기분이 안 좋아진 것 같습니다. 이유라도 알려 주세요.]

예민하다니.

나는 오히려 내 변화를 기민하게 잡아낸 요한에게 놀랐다.

그러나 심경의 변화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창피하다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요한은 정말로 궁금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이었고, 또 묘하게 위축되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예민한 거고 내가 생각을 숨긴 건데 저쪽이 위축되고 스트레스를 받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망설이다 어느 관계에서든 진솔한 게 최고의 대처라는 말을 떠올리며 솔직히 털어놨다.

[사실 좋아하는 이유가 없다는 게 좀 이상해서요. 처음 만난 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요한은 다른 사람을 좋아했을 거라는 말로 들렸거든요.]

사각사각.

길어진 문장을 적는 펜촉 소리가 모든 소음을 짓누른다.

[나는 요한이 좋아요. 나를 구해 줬고, 고립된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 줬잖아요.]

사각사각.

[그런데 나는 요한한테 해 준 게 없어요. 요한을 구해 준 적도 없고, 딱히 뭔가를 해 준 기억이 없거든요. 요한이 세계를 건너올 만한 뭔가를 한 적이 없는데]

나는 잠시 펜을 움켜쥐고 멈췄다.

모르겠다.

요한을 좋아하는데, 좋기는 한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세계를 건너가 요한을 선택할 용기가 없을뿐더러, 신년제가 끝나면 요한이 마족 지대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었다.

요한에게 받기만 한 나조차도 고작 이 정도 마음인데, 요한의 마음은 과했다.

나도 모르는 새 혼자 사랑에 빠진 거 같아서 감정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그 간극이 요한은 실존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정말 요한이 이러는 이유는 ‘슬롯’ 외에는 모르겠는걸.

반복이다.

계속 무시하고 기분 좋게 플레이를 하려고 해도, 생각이 이쪽으로 끌려온다.

나는 더 솔직해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덮어둬 봤자 또 이런 생각을 반복할 테니까.

게임인데 요한이 게임 캐릭터처럼 구는 건 당연한 거잖아. 나도 캐릭터야. 서로 다르다고 징징대지 말고 심플하게 생각하자.

[결]을 위해 억지로 상대를 유혹할 필요도 없고, 배드 엔딩을 피하려 남주를 밀어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불만이야.

‘배가 불렀지.’

얼마나 여유로우면 고구마를 스스로 재배해서 쪄먹으려 하고 있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자.

나는 다시 펜을 움직였다.

[나도 요한을 좋아하지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다른 세계로 넘어갈 정도도 아니고, 날 위해 넘어와 줬다고 그 마음에 온전히 감사할 정도도 아니에요.]

요한은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제 펜을 들지도, 종이를 돌려달라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계속 내 말을 읽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천천히 진심을 적어 갔다.

[여기 있는 동안 나는 최선을 다해 요한을 지킬 거예요. 하지만 이건 알아야 해요. 요한은 언젠가 다시 마족 지대로 돌아가야 해요.]

나는 펜을 내리고 요한을 올려다봤다.

바로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 요한의 뺨으로 푸른 빛줄기가 퍼졌다.

팡.

사람들의 환호 소리도 밀려왔다.

불꽃이 터지는 소리였다.

쉴 새 없이 터지는 폭죽 소리를 따라 다양한 색채의 빛이 요한의 얼굴에 어렸다.

붉기도 했고 푸르기도 했다.

고요한 얼굴인데도 정신없이 터지는 불꽃 때문에 그의 감정이 일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한은 천천히 시선을 내리더니 내 손에 든 노트를 받아 갔다.

그는 몇 번 펜을 움직이더니 내게 노트를 보여 주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걸 싫어하실 줄 몰랐습니다.]

싫은 게 아니라…….

나는 흠칫했지만, 아니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그가 돌아가길 바라는 건 맞으니까.

같이 있고 싶은 건 내 욕심이었다. 그리고 욕심과 별개로 요한이 위험을 무릅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마족과 사계국 사람들의 적대적인 관계 때문은 아니다.

시스템은 설정 오류를 스스로 복구할 줄 알았다. 그런 시스템이 혹시라도 요한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에게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만족스럽다.

평화롭고 안온하고.

내가 바라던 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존재해서는 안 되는 시간이었다.

평온한 시간은 현재 눈앞에서 흐르고 있지만,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욕심이 불러올 불확실한 미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물끄러미 나를 보던 요한이 입꼬리를 한 번 들어 올렸다. 내 얼굴에 불안함이 그대로 드러난 모양이다.

그는 시선을 내리고 다시 문장을 적었다.

[오해하신 내용을 하나 바로 잡고 싶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좋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요한은 페이지를 넘겨 다시 글을 적었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종이에서 펜을 뗀 그는 뭔가를 망설이듯 잠시 고민했다.

한참 후에 그가 다시 글을 적었다.

[어떤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는 한숨을 쉬듯 웃다 다시 노트에 글을 적었다.

[다음에는 무슨 말을 들어도 감당할 준비가 됐을 때, 질문하겠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불꽃놀이 빛무리가 거친 종이 위로 스며들었다.

나는 단정한 글씨를 보다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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