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돌아보니 그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산책하러 나가지 못해 실망한 강아지처럼 울적해 보였다.
집순이에게 얼마 남지 않은 외출 욕구를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다행이라면 요한은 내게 강요하거나 나가자고 넌지시 찔러 보지 않았다.
그저 옆에 걸터앉아 같이 창밖의 황도를 바라봤다.
늦은 오후라 햇빛의 색온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아직 하늘은 파란색이었다. 그래도 곧 붉게 물들겠지.
예쁘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요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행 같은 걸 하는 건 처음입니다.]”
나는 놀라서 요한을 쳐다봤다.
“정말요? 한 번도 여행을 가 본 적이 없어요?”
“[성을 나갔을 때 사냥을 하거나 마물을 토벌한 적은 있습니다.]”
그의 눈이 잠시 어두워졌다.
“[다른 이유도 있긴 한데, 여행은 아니었습니다.]”
성 밖은 마물이 득실거리고 성안은 마왕이 지배하는 아포칼립스 마족 지대.
왜 여행을 못 다녔을지 이해할 만한 성장 배경이긴 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딱히 여행을 가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는 살풋 웃으며 덧붙였다.
“[가을국에 올 때는 이상하게 설렜습니다.]”
그는 손가락을 뻗어 유리창 한곳을 짚었다.
“[저 강의 이름은 ‘시간’이라고 합니다. 강의 상류 지역은 ‘과거’라고 부르고 하류는 ‘미래’라고 말하고요. 그런데 두 지역의 갈등이 심해서 신년제에는 강 한가운데에 ‘현재’라는 중간 지대를 만든다고 합니다.]”
들어 보긴 했다.
가을국은 워낙 급변하는 시대의 세계관이다 보니 빈부격차가 심했다.
그래서 상류와 하류 지역으로 묘한 계급이 형성되어 있는데, 가을국 황실은 두 지역을 화합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신년제 때마다 강 중간에 커다란 섬과 다리를 만들어 두 지역을 잇는다.
‘현재’라는 예쁜 이름으로.
딱 7일의 축제 기간에만 섬이 생기는데, 그곳에서 가을국의 전통 음식과 현재 유행하는 음식, 놀이, 야외 무도회, 연극 등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다고 했다.
근데 그걸 요한이 알고 있는 게 신기했다.
“그것도 책에서 읽었어요?”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이에테르 공작과 이에테르가 기사들이 알려 줬습니다.]”
“비에른은 그런 거 잘 알 거 같긴 한데, 기사들이 아는 건 의외네요.”
“[저도 놀랐습니다. 가을국에서 뭘 하면 좋아할지 물었는데 많은 걸 알려 주더군요.]”
“뭘 하면 좋아할지 물었다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사계국 문화를 모르니 데이지가 뭘 좋아할지 모르니까요.]”
순순히 나온 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가을국으로 오기 전에 이건 여행이라고 했던 내 말이 떠오른다.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여행 계획을 세운 건데, 이쪽도 내가 좋아할 만한 걸 고민해 온 듯싶다.
천사라니까. 마족 캐릭터 잘못 만들었어.
울컥한 나와 달리 요한은 여전히 섬에 시선을 둔 채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섬의 13구역에 연극을 보러 갔다가, 저녁은 12구역에 있는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먹을 생각이었습니다.]”
요한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신년제 첫날에는 섬에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니 강변 근처에서 산책을 하고요.]”
힐긋 시선을 내린 그는 뭔가를 발견한 듯 욕조 아래 있던 수건을 집었다. 그리고 내 손가락에 묻은 입욕제 가루를 닦아 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자꾸 손을 닦아 줘요?”
“[습관입니다.]”
“남의 손을 닦아 주는 습관이요?”
뭐가 웃긴지 요한이 웃음을 흘렸다.
“[아뇨. 손을 닦는 습관이요.]”
손에 피를 많이 묻히는 삶을 살아온 건가.
나는 또 머릿속으로 빙하 지역 아포칼립스물을 상상했다.
“[듣기로 신년제 첫날은 황제의 신년 축사가 끝나면 불꽃놀이를 한다고 합니다. 섬에서 잘 보이고요.]”
“불꽃놀이는 여기서 더 잘 보일걸요?”
“[그치만 분위기가 다르겠죠.]”
그는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황성 앞 강변을 바라봤다.
“[사람들 틈에서 화약 냄새를 맡고 시끄러운 소리를 듣는 건 여기서 불꽃을 보는 것과 다를 겁니다.]”
밖에서 보는 게 전혀 좋아 보이지 않는 감상인데, 요한은 웃고 있었다.
“여기 있으면 조용하게 좋은 냄새를 맡으면서 감상할 수 있잖아요.”
요한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신 사계국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 왔는지 저도 알 수 있게 되잖습니까. 데이지가 어떻게 지내 왔는지 늘 궁금했거든요.]”
사계국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파에 들어가고 싶다고.
간지러운 말이긴 한데 솔직히 조금 이질감도 들었다.
‘요한은 왜 이렇게 나를 좋아하는 걸까.’
사실 우리는 그렇다 할 서사가 없었는데.
나도 요한을 좋아하지만, 요한은 나와 깊이가 다른 것 같았다.
오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랬다.
그래서 때때로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요한이 나를 이렇게 좋아할 이유는 슬롯에 담겨서니까.
아무리 내 취향이고 다정하게 대해 줘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가상의 존재와 진짜 감정을 교류하는 건 내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상황에 거부감을 느끼는 건 아니다. 크게 보면 유저도 게임 캐릭터니까.
나는 물끄러미 요한을 보다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저도 축제는 처음이에요.”
“[예?]”
나는 놀란 요한에게 데이지의 설정을 읊어 줬다.
“어릴 때 몸이 안 좋아서 부모님이 밖에 못 나가게 했거든요. 집 밖으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건 몇 달 안 됐어요.”
“[어디가 아픈 겁니까?]”
요한의 굳은 목소리에 당황한 나는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다 나았어요. 그냥 부모님이 불안해서 밖에 못 나가게 하신 거죠.”
“[왜 불안해하신 건지 이해가 안 가네요. 다 나았는데.]”
“저도 잘 모르지만, 제가 죽을까 봐 겁이 나신 게 아닐까요? 집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신 거 같아요.”
집착하는 부모의 마음을 알 리 없으니 대충 둘러댔다.
요한의 눈이 어두워졌다.
나는 무거운 이야기를 그만두고, 어느덧 붉은 색감이 스며든 가을 하늘을 바라봤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황도 전경이 한눈에 담겼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겁을 내고 있나?’
플레이가 내 뜻대로 안 풀린 건 사실이지만, 과하게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요한이 마족인 걸 눈치챌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데이지 부모랑 내가 다를 게 뭐야.
나는 입을 달싹이다 물었다.
“우리도 섬에 가 볼까요?”
요한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래도 됩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인파에 휩쓸리고 화약 냄새 맡고 그런 것도 추억이니까. 같이 가 봐요.”
요한의 입매가 휘어지는 걸 보며 나는 잠시 집순이 설정을 내려 두고 외출을 결심했다.
***
따뜻한 색감에 젖은 도시에 선선한 강바람이 불었다. 밀려난 붉은 구름 사이로 노란빛이 새어 나온다.
가만히 있어도 기분이 아늑해지는 날씨.
그래. 이래야 로판 축제지.
섬은 가을국 황족이 만든 섬답게 목조 건물이 가득했다.
식당, 카페, 술집뿐만 아니라 서점, 꽃가게, 옷가게, 화장품 가게 등등 온갖 소비재 판매점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축제 특수를 노려 어떻게든 관광객의 지갑을 털어 보겠다는 황실의 결연한 의지가 돋보이는 자본주의적 구성이었다.
쇼핑하는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음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소비는 만족감을 받고 돈을 주는 행위.
모두가 포만감 어린 표정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분위기에 취한 밝은 에너지가 공기 가득 느껴진다.
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걷다 고개를 돌렸다.
요한에게 우리도 가게에 들어가 보자고 말하려 했는데, 요한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는데 강가 노점상 거리에서 요한이 오고 있었다.
양손에 어울리지 않는 걸 들고.
하얀색 솜뭉치 두 개를 들고 온 요한은 내게 하나를 건넸다.
나는 그 솜사탕을 물끄러미 보다가 필담 수첩에 글을 써서 보여 줬다.
[이건 왜 사 왔어요?]
요한은 답을 하고 싶은지, 제 양손을 보다 다시 솜사탕을 건넸다.
내가 솜사탕을 받자마자 그가 펜을 받아 갔다.
[다들 먹길래 궁금해서요.]
답을 적은 요한이 내 옆을 고갯짓했다.
섬 끝자락 공원에는 사람이 많았는데, 대부분 손에 솜사탕을 들고 있었다.
나는 기대 가득한 요한의 눈을 보다 피식 웃으며 답장을 썼다.
[이거 엄청 달아요.]
[괜찮습니다.]
안 괜찮을걸?
요한은 단걸 싫어했다.
몇 번 식사를 같이 했는데, 캐러멜 시럽을 뿌린 토스트를 한 입 먹더니 돌을 씹은 것처럼 인상을 쓴 적도 있었다. 마물의 목을 베면서도 무표정하던 아포칼립스 남주가 말이다.
나는 솜사탕을 조금 뜯어 먹으며 요한을 쳐다봤다.
그는 물끄러미 솜사탕을 응시하다 머리끝을 조금 베어 물고는 움찔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달죠?]
요한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요한은 솜사탕에 입을 대지 않았다. 투명한 모습에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요한은 쓰레기통이 나오자마자 솜사탕을 버렸다.
얼마 걷지 않아 요한이 말했던 해산물 레스토랑이 나왔다.
역시 여주의 데이트 버프란 예사롭지 않구나.
운 좋게도 섬이 내려다보이는 2층 테라스 자리로 안내받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이 피크 타임에 노을과 축제 전경이 한눈에 담기는 자리가 비어 있다니.
여주라서 행복하네.
현생에서도 이렇게 자리 복을 누리며 살고 싶다.
[우는 겁니까?]
내게는 아주 드물게 주어지는 시스템의 특혜를 받으니 감동해서 눈물이 고였다.
나는 요한에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장을 썼다.
[네, 너무 좋아서요.]
[뭐가요?]
울 정도로 좋은 일이 뭔지 가늠이 안 가는지 요한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그냥. 날씨랑 분위기가…… 이 조명, 온도, 습도가 다 좋네요.]
요한은 착하게도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보지 않고 그냥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 보듯 웃어 줬다.
개그 욕심을 자극하는 순수한 얼굴에 또 이상한 말을 하고 싶어졌지만, 꾹 참았다.
어떻게 봐도 요한은 천사 같았다.
누구도 밟지 않은 설원 같달까.
새하얀 은발과 깨끗한 얼굴선 그리고 푸른 눈동자. 바다 같은 청량한 색감과 설원처럼 깨끗한 윤곽의 조화. 자연의 순수함을 사람으로 빚은 것 같다.
도저히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였다.
이래서 인외남주인가.
그런 남주가 무슨 말만 하면 웃어 주니 감정선을 잡아야 할 타이밍에도 개그 욕심을 부리게 됐다.
‘아 설마…….’
미인은 희극인을 좋아한다는 오래된 명언이 떠올랐다.
요한은 내가 웃겨서 날 좋아하는 건가?
주문을 끝내고 음식을 기다리는데 손을 닦던 요한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눈이 마주친 김에 물었다.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요한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제가 왜 좋아요?]
그러자 요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붉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매우 당황한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펜을 잡았다.
[제가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