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나탈리아는 제 옆 의자에 두었던 편지를 내게 건넸다.
“레이디 데이지가 토벌 탐사대에서 큰 활약을 하셨다죠. 기밀이니 자세한 공로는 모르지만, 알렉스 황태자께서 그대의 이름을 언급할 정도면 대단한 일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고요. 부디 초대에 응해 주시길 바라요.”
[오라: 세상에, 기어코 데스노트에 올라갔네.]
나탈리아의 말 뒤로 오라의 무서운 첨언이 겹쳤다.
[데, 데, 데스노트라니요?!]
나는 불길한 소리에 초대장을 선뜻 받지 못하고 나탈리아를 쳐다봤다.
나탈리아는 독버섯처럼 화려하고 위험한 얼굴로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봤다.
무섭지만 예뻐서 또 독버섯 하나 먹는다고 사람이 죽는 건 아니지 않나, 하는 안일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 차려. 이 얼빠 정신은 OFF 할 수 없는 걸까?
[오라: 영애 주접……. 역시 봄국 영애. 라리사 황녀가 떠오르는 주접이네요. 아니 영애가 더 심한 거 같아요. 데스노트 소환장을 보고도 독버섯 어쩌고저쩌고라니.]
탄식 어린 메시지가 내 주접을 지적했다.
‘메시지를 꺼야 하나.’
처음 만난 유저에게 드러나는 본심이 부끄럽다.
[오라: 끄지 말아요! 내가 지금 영애를 구하겠다고 15층을 뛰어 올라왔는데! 가만있어요!]
[왜 15층을 뛰어오세요?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오라: 근대 엘리베이터가 얼마나 느린지 몰라서 하는 말이네요. 게다가 요즘은 극성수기라 층마다 선다고요.]
본인 호텔 엘리베이터를 말하면서 참 객관적이다.
[오라: 내 호텔 모욕하면 그냥 내려갈 거예요.]
[아니에요! 모욕 안 했어요!]
나는 결국 메시지창을 그대로 두었다.
그때, 나탈리아가 입을 열었다.
“레이디 데이지, 가을국 신년제에는 여러 전통 행사가 있죠.”
스타카토처럼 톡톡 끊어지는 목소리가 고막을 건드린다.
그녀는 느슨하게 풀린 눈으로 나를 내려 보듯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첫날 열리는 개회 연회, 둘째 날 열리는 검투 대회 본선과 귀빈 초청 파티, 셋째 날 열리는 사냥제와 디너 무도회…….”
그녀는 묻지 않은 가을국 행사 일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TMI 세례에 나는 어찌하지 못하고 알렉스를 쳐다봤다.
알렉스는 나탈리아의 이런 반응이 익숙한지 고요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대체 너네는 어떤 소설 속에서 어떤 전개를 펼쳤던 남주와 원작 여주인 거니…….
이런 노잼 TMI를 설파해도 독자들이 참고 읽어 준 거냐고.
어떻게 인기 로맨스 판타지 소설로 선정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작가님 필력이 천상계였나?
기어코 7일의 신년제 일정을 모두 읊은 나탈리아가 대뜸 물었다.
“알겠어요?”
……알 리가 없잖아요.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녀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둘째 날 열리는 귀빈 초청 파티는 제가 직접 초대장을 전달하고 있단 말이죠.”
아니, 그거랑 연회 일정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나는 왜 갑자기 외국인인 나에게 자기네 나라 연회 소개를 한 건지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어떻게 말을 얹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데, 알렉스가 끼어들었다.
“이렇게 갑자기 초청하는 건 실례 같은데?”
나탈리아가 바로 답했다.
“저도 이런 결례를 범하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황제 폐하의 명이니까요.”
“폐하께서 왜 저를……?”
나는 내 얘기에서 소외되는 걸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이거 너무 불길하잖아.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원작 여주가 초대한 황실 파티.
그런데 그 초대를 명한 사람이 황제.
드디어 난도 최상급 황성에 가서 죽는 건가.
[오라: 네? 영애가 왜 죽어요? 아까 데스노트라고 하긴 했지만 과장한 거였어요.]
내 의식의 흐름을 들었는지 오라가 깜짝 놀라 물었다.
나는 훌쩍이는 마음으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 전개 뭔가 익숙하지 않으세요? 내 아들은 네게 과분하니 떨어져 하면서 돈 봉투 던지는 거요.]
[오라: 그럼 땡큐죠! 돈 받고 헤어지면 되지. 황궁에 파밍 하러 간다고 생각하세요.]
역시 사업가 여주.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구나.
하지만 문제는…….
[비유였어요. 가을국 황실은 돈 봉투를 주는 대신 독약을 먹이거나 죽이지 않을까요?]
[오라: 황성 플레이 난도가 무시무시하긴 하지만 에이, 설마 그럴까요?]
설마 그럴 거 같았다.
이미 독향에 한 번 당해 본 뒤라 그런 의심이 들었다.
어떻게 거절할지 고민하는데 머릿속으로 비명이 파고들었다.
[오라: 뭐라고요?! 이미 독에 당해 봤다고요? 영애 전개 무슨 일이에요?!]
나는 머리와 귀가 울려 눈을 찌푸렸다.
오라 영애는 절제된 커리어 우먼의 비주얼을 가졌는데, 목소리는 장군처럼 우렁찼다.
[영애, 저 이거 잠깐만 끌게요. 지금 대화에 집중해야 해서요.]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이 파티를 거절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집중하자. 머리를 굴려 보자.
[오라: 자, 잠깐만요! 저한테 방법이 있어요!]
놀랄 새도 없이 그녀가 메시지를 보냈다.
[오라: 샴페인과 보드카, 위스키가 포함된 룸서비스 패키지를 넣어 드릴게요.]
뭔가 아이템 설명 같은 걸 잘못 들은 것 같았다.
[오라: 제대로 들었어요. 이 정도 술이 들어가면 사람은 죽게 되어 있거든요.]
그녀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 영애는 최소 오후 3시까지 일어나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선반을 정리하듯 아래에서 보드카와 위스키 병을 샴페인 옆에 나란히 세웠다.
[오라: 이 세 병을 섞어 마시고 연회에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오라는 고개를 저으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오라: 술병 났다고 하세요.]
[……초면에 정말 죄송한데, 그런 방법이 먹힐 리가 없잖아요.]
베타 테스터 합격 조건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인 듯하다.
내 생각을 들었을 텐데 오라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나를 애송이 취급하며 입매를 기울였다.
[오라: 이 말 한마디만 하죠.]
오라는 바 테이블에 늘어져 있던 샴페인 병을 움켜쥐고는 나를 그윽하게 쳐다봤다.
[오라: 가을국에 있는 #원나잇 #임신튀 키워드 영애들이 매년 제게 감사 인사를 보내고 있다는 걸 알아 두세요.]
왜 #원나잇 #임신튀 키워드 영애들이 호텔 주인 오라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지…… 모르고 싶다.
그러나 순수하지 못한 마음과 머리는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을 한 번에 이해하고 말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톡톡톡 세 병을 하나씩 찍으며 메시지를 보냈다.
[오라: 술병 나서 연회에 못 가는 귀족 영애? 황실 체면이 있지 절대 엮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아침에 술병 났다고 연락하면 앞으로 연회 참석은커녕 입궁도 못 하게 할 거예요.]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 영애의 자유로운 영혼을 자랑하세요. 황실의 관심을 뚝 잘라 낼 기회예요.]
메시지에 스민 오라의 웃음이 느껴진다.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조언에 나는 메시지를 차단하려 했다.
[술은 괜찮고요. 이만 메시지 끌게요.]
[오라: 자, 잠깐만요 영애! 내가 잘못했어요. 사실 저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래요. 제발 일단 저 두 사람이 내 호텔에서 나가게 도와줘요. 나 너무 무서워요.]
아무래도 이 말이 진심인 듯 오라가 입술을 살짝 떨며 울상을 지었다.
역시 아무리 부자고 사업이 잘되어도, 진상 고객이 두려운 건 어쩔 수 없는 듯하다.
나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틀어 나탈리아의 손에 들린 초대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초대장이 상태창으로 보인다. ‘황궁 플레이를 시작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NO 버튼이 있다면 누르고 싶지만 슬프게도 그런 간결한 선택지는 없다.
스토리텔링으로 흘러가는 게임의 폐해.
거절을 위해서는 개연성이 포함된 핑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여독 탓인지 돌아가지 않는 머리는 변명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추상적인 거절 멘트를 날려 봤다.
“이런 자리에 제가 가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과분한 제안이라…….”
“과분한 제안이긴 하죠.”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탈리아가 내 입을 막았다.
“그렇다면 가지 않는 게 맞지.”
이번엔 알렉스가 나탈리아의 말을 받으며 짙은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 둘의 신경전을 무시하려 착잡한 마음으로 시선을 떨궜다.
머릿속으로 파고든 메시지 때문에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오라가 저 둘이 여기서 싸우면, 새로 들인 마호가니 테이블이 조각날 거라며 비명을 질러 댔다.
눈앞에서는 원작 남주와 원작 여주가 일촉즉발 기 싸움을 하고 있고, 머릿속에서는 유저가 울고 불며 열심히 꾸며 둔 한정판 스킨이 찢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빌고 있다.
‘응, 그냥 죽자.’
황궁 가서 독주 마시는 게 더 마음이 편하겠어.
“폐하께서 초대하셨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네요. 그럼 감사한 마음으로 연회에 참석하겠습니다.”
초대장을 받은 나는 창밖의 오후 하늘을 바라봤다.
강변 너머로 보이는 황성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죽기 좋은 날씨라는 어느 영화 속 대사가 또 생각나는 날이었다.
***
“황성에서 지내도 된다고 했는데, 이에테르 공작이 말 안 하던가?”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뒤에서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두 사람이랑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계단으로 한층 내려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는데, 굳이 알렉스가 나를 따라 내려왔다.
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뒤를 돌아 알렉스를 쳐다봤다.
“전하.”
“응?”
“나탈리아 영애가 저러는 건 본인 의지니 전하께 책임은 없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두 분은 아직 공식적으로 약혼한 사이도 아니니까 저도 나탈리아 영애한테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고요.”
알렉스는 뒷말을 기다리는지 나를 보며 벽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신경 써 주시는 건 알지만, 솔직히 조금 불편해요.”
나는 알렉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눈으로 주변을 한 번 둘러보다 말했다.
“전하도 이런 상황이 딱히 유쾌하지는 않으시잖아요.”
“난 좋은데.”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한쪽 눈이 찌푸려졌다.
알렉스는 웃으며 덧붙였다.
“얼굴도 볼 수 있고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데 싫을 리가 없잖아.”
“…….”
“그래도 그대가 불편해하는 건 이해하고 있어. 그래서 최대한 찾아오지 않으려 했고.”
알렉스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리고 너무 단정 짓지 마.”
“뭐를요?”
“지금은 그놈을 좋아해도 나중에는 나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잖아.”
결국,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알렉스에게 여지를 줘서 헷갈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띵, 하는 소음이 내 대답을 앗아 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걸 본 알렉스가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온 알렉스는 장난치듯 손가락으로 내 입을 꾹 눌렀다.
“대답하지 마. 답하라고 한 질문이 아니니까.”
당황해서 미간을 찌푸리는데 알렉스가 손을 떼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오늘은 먼저 내려갈게.”
그는 문이 닫히기 직전에 웃으며 덧붙였다.
“다음엔 같이 내려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