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띵동띵동.
누군가 벨을 울리기에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복도에 선 직원이 내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레이디 데이지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바구니 안에는 여러 색깔이 뒤섞인 공이 들어 있었다.
입욕제였다.
향기가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 양도 많았다.
웰컴 선물인가?
오라 호텔에는 통창 앞에 욕조가 있었다. 가을국 전경을 내려다보며 즐기는 목욕이 끝내준다며 종종 커뮤니티에 후기가 올라오곤 했다.
아하, 사장 영애가 챙겨 주셨나 보네.
목욕을 즐기라고 선물해 준 것 같았다.
잘됐다. 비에른이랑 요한한테도 나눠 주고 아, 아래층에 시에나 영애도 숙박한다고 들었는데 시에나한테도 가져다줘야겠다.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오라 호텔은 정말 세심하네요. 감사합니다.”
“아, 이건 저희 호텔이 아닌 레이디 나탈리아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바구니 위에 올려진 작은 카드를 눈짓했다.
나탈리아가 누구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나는 커다란 바구니를 한쪽 팔로 안은 채 카드를 펼쳤다.
그리고 눈을 찌푸렸다.
저쪽도 나를 처음 본다는 내용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카데미 동기가 나에 관해 얘기를 많이 해서 궁금했는데 가을국에 와서 반갑다고, 시간이 되면 차를 한잔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람의 아카데미 동기가 누군데?
나에 관해 얘기할 만한 아카데미 졸업생이면 비에른을 말하는 건가?
“지금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억을 헤집는데 직원이 은근히 재촉했다.
“지금요?”
“네. 직접 라운지로 오셨습니다.”
고민 되네.
모르는 사람이라 무서운 마음 반, 가을국 귀족 영애라니 궁금한 마음 반이었다.
나는 바구니 가득한 입욕제로 시선을 내렸다.
솔솔 올라오는 향기에 취한 나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세심한 선물을 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 없잖아.
“네, 지금 올라갈게요.”
***
호텔 한 층을 사용하는 넓은 라운지가 고요했다. 피아노 선율만 잔잔히 들려올 뿐.
나는 의아한 눈으로 직원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극성수기인 지금 오라 호텔 라운지에 사람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됐다.
“혹시 브레이크 타임인가요? 너무 조용한데요.”
“아닙니다. 레이디 나탈리아께서 2시간 동안 라운지 대관을 하셔서 그렇습니다.”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다시 나를 창가로 안내했다.
아니 굳이 왜 대관을 하지?
귀족의 사치인가?
봄국에서 귀족 영애들과 시끌벅적한 카페를 자주 다녔던 터라 타국 귀족의 사치가 낯설었다.
그러나 테이블 앞에 앉은 독버섯처럼 화려한 백작 영애를 보는 순간 사치 좀 부리면 어떠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썹 위로 선을 그은 듯 풍성한 앞머리와 가슴까지 늘어진 긴 머리칼. 구체 관절 인형처럼 보드랍게 반죽 된 이목구비.
허리와 목을 곧게 세운 채 창밖을 내려다보던 인형이 시선을 틀었다.
순간, 가을 햇살이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뭐랄까. 우주를 담아 둔 신비로운 미모였다.
불행히도 나는 예쁜 언니들에게 나를 맞추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
찾아온 목적도 수상하고 조용히 있고 싶다고 사람들을 모두 쫓아낼 만큼 예민한 성품을 가졌음에도 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녀는 유저가 아니었다.
깨끗한 손목에는 스마트 워치 대신 가느다란 금팔찌가 끼워져 있다.
여자 캐릭터가 날 먼저 찾은 건 처음이라 신기해하는데, 직원이 입을 열었다.
“레이디 나탈리아. 레이디 데이지.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직원은 나와 나탈리아에게 인사를 하고는 바로 물러났다.
나탈리아는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살짝 올라간 눈썹 산 때문인지 그녀의 인상은 날카로웠다.
아니야. 여독 풀라고 입욕제를 한 바구니나 줬는데 나쁜 사람일 리 없잖아.
내가 예민한 거라 생각하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나탈리아.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탈리아는 대답 대신 한쪽 입꼬리를 살짝 들고는 제 앞 소파로 고개를 까닥였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아, 말을 못 하시나?
요한이 #인어남주로 오해를 받았던 걸 떠올리면 #인어여주도 충분히 있을 법했다.
나는 이 우주처럼 신비로운 여자의 인성이 나쁠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하지 못하고 바로 앞에 착석했다.
“…….”
“…….”
그러나 나탈리아는 또 말없이 나를 쳐다볼 뿐, 필담이나 몸짓을 통한 의사소통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어색해서 그런가?’
나는 그녀에게 눈웃음을 한 번 짓고는 주문을 위해 놓인 펜과 종이를 들었다.
그리고 먼저 질문을 적었다.
[특성 버프 ‘명필 필사가’ ON]
이 버프는 시도 때도 없이 켜지네.
나쁜 건 아니니 그냥 두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종이를 밀었다.
맑은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테이블 위로 똑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미간이 움찔했다.
[왜 저를 찾아오셨나요?]
짧은 문장을 읽은 그녀가 헛숨을 흘렸다.
“직접 물으면 될 걸 왜 여기에 적는 거죠?”
“아, 아니 저는 말을 못 하시는 분인 줄 알았어요.”
놀라 눈을 크게 뜨자 반대로 나탈리아는 눈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그녀는 기가 차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든 채 또 헛숨을 흘렸다.
당황하는데 머릿속으로 누군가 답을 줬다.
[오라: 영애! 쉿, 조용.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영애 기 누르려고 하는 거니까 더 자극하지 마세요.]
다급한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틀어 목소리 주인을 찾았다.
입구 쪽 바에 젖은 미역처럼 축 늘어져 있는 여자가 보였다.
‘엥? 사장 영애 아니야?’
거친 숨을 몰아쉰 사장 영애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그녀를 보고 흠칫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가 두어 개 풀어져 있고 단정히 올렸던 머리는 누군가에게 머리채를 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아까 로비에서 봤을 때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 그 자체셨는데.
가쁜 숨을 내쉬던 사장 영애가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쓱 쓸어 넘기며 나를 쳐다봤다.
[오라: 계단으로 뛰어왔더니 숨이 차네요. 영애 이쪽 보지 말고 일단 나탈리아한테 시선 떼지 마세요.]
그녀는 게임 가이드처럼 내게 나탈리아와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가르쳤다.
뭔가 이상했지만, 나는 반항 없이 오라의 조언을 따라 다시 나탈리아를 쳐다봤다.
나탈리아는 금세 차가운 표정을 다시 찾은 뒤였다.
그녀는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는 팔걸이에 양쪽 팔을 올렸다.
[오라: 나탈리아는 집착이 심하기로 유명한 원작 여주예요. 제정신 아닌 여주라 엮이면 아주 X 되는 거예요. 하지만 침착하게 잘 대처하면 떨쳐 낼 수 있을 거예요.]
[……원작 여주요?]
[오라: 네 가을국 황태자 나오는 소설의 원작 여주인데, 황태자랑 엮이면 질투에, 열폭에, 술수에, 아주 골 아파질 거예요.]
황태자라는 말에 나는 입을 벌렸다.
설마 이 영애가 가을국 황제가 점찍은 며느릿감인가!
잠깐만, 내 얘기를 했다던 아카데미 동기가 알렉스였어?
‘미친!’
소름이 돋았다.
알렉스와 기꺼이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면 나탈리아도 보통 사람이 아닐 텐데.
어쩐지 저 날카로운 눈이 익숙하다 했더니, 알렉스의 눈에 서린 광기와 비슷했다.
[오라: 영애 근데 가을국 황태자랑 무슨 사이예요? 가을국은 불륜에 예민해서 결혼 전이라도 혼담이 오갈 때 바람피우면 다들 비난하거든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나는 머릿속으로 꽥 소리를 질렀다. 졸지에 불륜녀로 찍힐 위기에 처했다.
와, 이건 아니지!
내가 아무리 머릿속 꽃밭 여주를 지향한다고 해도, 그건 머리 쓰기 싫어서 그런 거지 내연녀 캐릭터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설마 이 여자도 시스템이 서사 꼬아서 데려온 거 아니야?
익숙하게 시스템을 의심하며 분노의 방향을 트는데 나탈리아가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데이지 양은 알렉스 전하와 무슨 사이죠?”
“저희는 그저 친한 동료 사이입니다.”
전형적인 오피스 불륜녀의 대사가 나왔다.
나는 질겁하다 얼른 덧붙였다.
“황태자 전하는 제가 존경하는 분이지만 감히 그분의 옆자리를 욕심낸 적 없습니다. 당연히 알렉스 전하께는 나탈리아 양처럼 아름답고 지혜롭고 우아한 분이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빠르게 내연녀 역할에 선을 그으며 나탈리아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때, 내 의지를 비웃듯 익숙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왜, 그대도 아름답고 지혜롭고 우아하잖아.”
알렉스가 내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아니, 전하가 왜 여기에…….”
아침 드라마의 삼자대면 장면처럼 기가 막힌 타이밍에 알렉스가 등장했다.
절로 입이 벌어졌다.
나를 내려다보던 알렉스가 웃으며 손끝으로 내 턱을 닫았다.
그는 나탈리아에게 시선을 틀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탈리아, 오랜만이네.”
“전하께서 어제 알현을 피하지 않으셨다면 오랜만이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나탈리아는 입꼬리만 든 채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아서 무서웠다.
두 사람에게서 싸한 케미가 느껴졌다.
말없이 서로를 보며 웃고 있을 뿐인데 공기가 얼어붙는다.
[오라: 영애, 설마 알렉스 황태자랑 슬롯에 엮여 있나요?]
[아, 네. 제 슬롯에 들어 있기는 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라: RIP.]
[아니, RIP라니....... 왜 멀쩡한 사람을 영면에 들게 하세요.]
[오라: 하필 가을국 최고난도 남주를 획득하다니. 힐링의 나라 봄국 영애가 어쩌다…….]
안타까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오라: 브런치나 먹고 가요. 힘나게 배라도 채워 줄게요.]
나는 불안함에 오라의 조언을 잊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씁쓸한 얼굴로 직원을 불러 뭐라 말하다 이쪽을 쳐다봤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눈꼬리를 내렸다.
시한부 여주의 앞날을 애도하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나는 분명 #돈지랄 키워드를 발현할 생각으로 쇼핑의 메카 근대 로판 플레이 존에 놀러 왔는데, 왜 내 무덤 자리를 미리 보러 온 기분을 느끼는 걸까.
내가 혼란스러워하든 말든 두 사람은 계속 대화를 이어 갔다.
“레이디 나탈리아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한데, 알려 줄 생각은 없나?”
알렉스의 목소리에 나는 울적한 마음을 누르고 다시 그 두 사람을 쳐다봤다.
“어제 알현을 받으셨다면 이유를 충분히 들으셨을 텐데 안타깝네요.”
나탈리아는 ‘내가 어제 말해 주려고 했는데 네가 싫다고 했잖아 ㅎ’라며 알렉스를 돌려 깠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눈만 굴리며 침묵했다.
스텔스 모드가 있다면 켜고 투명인간이 되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 비싼 돈 주고 예약한 내 스위트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사라진 안락, 평온, 힐링.
내 호캉스 돌려줘요.
“저희 사장님께서 서비스로 드리는 브런치입니다.”
두 남녀의 광기 어린 눈빛 사이로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접시가 훅 들어왔다.
연어를 곁들인 수란과 샐러드, 그리고 비스킷과 소시지.
저것도 커뮤에서 본 유명 브런치였다.
나는 슬쩍 시선을 들어 알렉스와 나탈리아를 쳐다봤다.
둘이 얘기하는 동안 방해 안 되게 저쪽 테이블에서 먹고 온다고 하면 안 될까?
이 의미 없는 전개를 건너뛰고 싶어 그런 상상을 하는데 나탈리아가 입을 열었다.
“어제 폐하께서 저를 부르셨답니다.”
황제를 입에 담자 알렉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알렉스의 굳은 표정이 마음에 드는지 나탈리아가 입매를 기울였다.
“연회 손님 초청을 제게 맡기셨거든요.”
말꼬리를 늘이며 나탈리아가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폐하의 초대장을 전달하기 위해 데이지 영애를 찾아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