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곧 오라의 시선이 분산됐다.
그녀의 옆에 선 금발의 남자와 은발의 남자가 양쪽에서 시선을 잡아끈 탓이다.
그녀는 제 이름을 말하며 바로 상자를 들이밀었다.
“객실은 3개로 예약했는데요.”
곧 오라는 그녀가 누군지 기억해 냈다.
‘아, 프리미엄 스위트 1객실, 스위트 2객실 예약한 영애구나.’
특이하게도 저 영애는 객실을 3개나 예약했다. 보통 남주와 함께 오면 1객실을 함께 쓰던데.
오라는 호기심을 거두고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프리미엄 스위트 1객실, 스위트 2객실로 확인됩니다.”
“이분은 프리미엄 스위트로 안내해 주시고 저랑 이분은 스위트로 안내해 주세요.”
그녀는 웃으며 금발의 남자에게 프리미엄 스위트, 자신과 은발 남자에게는 스위트 2객실 안내를 요청했다.
뭐지? 왜 본인이 프리미엄 스위트룸에 안 묵고?
잠시 의아했으나 곧 생략된 의미를 깨달았다.
‘아! 효도 여행이구나.’
인물의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탓에 남주라 착각했는데, 이 여주는 #육아물 여주로 이제 막 성장을 마친 모양이었다.
저 금발 남주는 아버님이고 은발 남주는 오빠구나.
어머니가 은발이셨나 보네.
머리 색깔로 유전자 지도를 그려 보던 오라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역시 가족애는 힐링 서사의 근본. 봄국에서 온 영애와 남주다워.
금발의 영애는 벨보이가 가져다준 짐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짐은 프리미엄 스위트로 올려 주시고, 이쪽에 있는 짐은 스위트로 올려 주세요.”
그때, 오라의 머릿속으로 메시지가 파고들었다.
[데이지: 가장 위에 올려진 보라색 상자가 약속한 물건입니다.]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오라를 쳐다봤다.
오라는 그 시선을 받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는 오라에게 이능의 부산물을 거래 조건으로 걸었다.
그녀는 새로 개점하는 호텔 샹들리에에 붙일 불이 필요하지 않냐며 오라를 유혹했다.
저 상자 안에는 마석으로 밀봉한 불의 이능 부산물이 들어 있었다.
상자에 손을 올린 오라는 따뜻한 열감을 느끼고는 키를 내주었다.
그렇게 두 번째 손님을 보낸 오라는 태블릿 피시를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직 계약한 3명의 영애가 오지 않았다.
그들은 마차 연착으로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말을 하며 ‘ㅠㅠㅠ’를 덧붙였다.
하긴 오늘 교통체증이 심각했지.
오라는 이 김에 물건을 정리하는 척 불의 이능 부산물을 챙겼다.
그런데 그때 사색이 된 지배인이 달려왔다.
“사, 사장님! 큰일입니다. 도미니 백작가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도미니가에서 갑자기 왜?”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사장님을 뵙고 얘기하고 싶다고 하시는데 우선 라운지로 안내를 할까요?”
도미니 백작가는 가을국의 실세였다.
가을국은 부르주아 계층이 실권을 쥐고 있지만, 눈치 좋게 산업 혁명에 편승한 귀족들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도미니 백작가였다.
백작가 차녀 나탈리아 도미니, 그녀는 사업 수완이 좋은 여인이었다.
그리고 가을국 유저들의 경계 대상 1호기도 했다.
‘첫사랑은 지옥’의 원작 여주.
여주 흑화의 정석.
독한 원작 여주가 빙의 여주의 멘탈을 탈탈 털어 도망가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그 원작 남주는 무려 가을국 황태자였다.
아카데미에서 황태자를 만난 빙의 여주는 그에게 홀려 몸과 마음을 다 주고 상처받은 뒤 도망치게 된다.
그 상처의 원인 중 하나는 저 무서운 원작 여주였다.
그 소설에 빙의한 영애는 진작에 서브남이던 소꿉친구를 남주로 선택하고 아카데미에 진학하는 대신 사업을 시작했다.
호텔 맞은편에 있는 화장품 유통 브랜드가 바로 그녀의 사업체였다.
그러나 원작의 연은 함부로 끊을 수 없는 것일까?
나탈리아는 대뜸 화장품 사업을 시작해 그 영애와 끊임없이 경쟁했다.
가끔 그 영애는 커뮤니티에 울음 섞인 글을 올렸다.
왜 자꾸 내 가게 옆에 가게를 여는지 모르겠다며. #변호사여주에게 영업 방해 소송이 가능한지 상담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어쨌든 계급사회.
기어코 황족의 눈에 들어 차기 황태자비로 거론되는 도미니가와 척을 져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모두 그녀에게 그래도 결혼으로 안 엮인 게 어디냐며, 통장 잔고와 존잘 서브남주를 보며 참으라고 위로했다.
그리고 영애는 나날이 불어나는 잔고를 보며 슬픔을 참아 냈다.
어쨌든 해피엔딩이었단 소리다.
그리고 지금, 오라에게 든 의문은 이거였다.
‘……왜 나탈리아가 내 호텔에?’
황도에 호화로운 저택을 가지신 분이 왜?
그것도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니.
‘대체 왜?’
예감이 좋지 않다.
또각 또각.
오라는 로비 대리석 위로 미끄러지는 굽 소리를 들으며 흠칫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칼 간격.
도도하게 보라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로비로 들어온 나탈리아가 프런트 데스크 앞에서 멈추었다.
오라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도미니가의 레이디 나탈리아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직접 나와 줘서 감사하네요.”
원래 이곳에 있었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오라는 영업용 미소를 띠며 친절하게 물었다.
“객실 예약 문의차 방문하셨을까요?”
“그런 일을 처리하러 제가 직접 올 리는 없겠죠?”
날카로운 보랏빛 눈을 빛내며 그녀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오라는 눈치 좋게 그녀가 원하는 것을 직접 말할 때까지 침묵했다.
“제가 만나고 싶은 분이 있는데, 그분이 이곳에 묵고 있다고 들어서 왔어요.”
바바라의 사생이었나?
오라는 권력으로 은밀한 만남 주선을 강요하는 이 비도덕한 귀족 사생을 어떻게 돌려보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의외였다.
“라운지에서 차를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 혹시 이 쪽지를 전해 줄 수 있나요?”
직접 정체를 오픈하고 쪽지만 전해 달라는 상식적인 제안이었다.
아니면 혹시 이거 협박 쪽지인가?
미리 검열해야 하나 깊은 도덕적 갈등을 느끼는데 그녀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 봄국 영애에게 이걸 전해 주세요. 아, 그리고 비록 서면 인사긴 하지만 첫인사를 빈손으로 하는 게 뭐해서 이것도 가져왔어요. 이 선물도 전해 주면 좋겠어요.”
그녀는 향기로운 바구니를 건넸다. 아름다운 색채를 자랑하는 둥근 입욕제가 가득 담긴 바구니였다.
오라 호텔은 리버뷰 통창 앞에 커다란 욕조가 있었다.
호캉스의 기본은 힐링. 심신을 풀어 주는 세심한 선물이었다.
좋은 선물을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나쁜 짓을 하려는 건 아닌가 보네.’
대충 판단을 끝낸 오라는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운지에 계시면 답변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나탈리아는 부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그녀가 사라진 걸 확인한 오라는 슬쩍 쪽지를 먼저 열어 봤다.
별 내용 아니었다.
아카데미 학우에게 그녀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친하게 지내고 싶으니 같이 차 한잔 하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쪽지를 다시 접은 그녀는 직원을 불러 데이지가 묶고 있는 스위트룸으로 쪽지를 전했다.
그나저나 아카데미 친구가 누굴까?
데이지라는 영애는 #귀족영애라고 했지?
귀족끼리는 통하는 건가.
오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키워드에 따라 유저의 삶이, 그러니까 전개가 완전히 달라지는 게 새삼 실감이 나서다.
그녀는 제가 일군 특급 호텔을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로비를 보던 그녀는 뿌듯함을 느끼며 어깨를 쫙 폈다.
‘역시 중간 랭킹 5위다운 나야.’
최상위권 여주로서 그녀는 제 전개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성실히 일하며 다시 전개를 완성하려던 그녀는 로비 입구를 보는 순간 얼음처럼 굳고 말았다.
가을국 여주들은 대부분 #직업물 여주, 그러다 보니 그녀들은 연애보다 커리어 확장을 더 선호했다.
그들은 남주 선택을 할 때도 집안일을 서포트해 줄 #다정남이나 사업에 도움이 될 #계략남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짙었다.
그리고 절대 선택을 기피하는 남주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황태자 알렉스였다.
황실이라는 거대 인맥을 손에 쥘 수 있지만, 그에게는 무시무시한 원작 여주가 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홀로 로비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나탈리아가 온 지 20분도 되지 않아서 말이다.
오라는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엘리베이터를 흘깃 쳐다봤다.
하지만 이미 쪽지를 받은 직원은 스위트룸 층으로 올라간 뒤였다.
아, 설마. 아카데미 친구라는 게…….
황태자하고 나탈리아는 아카데미 동기잖아.
오라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그녀는 제 앞에 선 제국의 황태자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제국의 생명, 태양의 빛, 알렉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충직하게 낯간지러운 인사를 한 오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웃음을 짓고 있는 알렉스의 모습이 들어왔다.
비주얼은 천상계이나 따라붙은 옵션이 너무 무시무시하다.
사이코패스 시댁과 집착만렙 원작 여주.
그리고 지금 막 그 무시무시한 서사 입구에 선 영애에게 제 손으로 직접 원작 여주와의 만남을 주선해 준 것 같다.
오라는 떨리는 손을 꽉 맞잡고 태연한 척 미소를 지었다.
침묵 사이로 오라의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황태자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혹시 레이디 나탈리아가 다녀갔나?”
“예. 그렇습니다.”
“언제?”
“20분 정도 됐습니다.”
“아.”
그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
“누굴 만나러 왔다고 말했고?”
“네, 맞습니다.”
오라는 방문객의 이름을 말하는 대신 단답으로 빠르게 황태자의 물음에 긍정했다.
고객 정보를 유출할 수 없다는 우회적인 화법을 인지한 그는 다시 눈웃음을 지으며 질문을 바꿨다.
“두 사람이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지 아나?”
“라운지에서 만나실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이 호텔에서 공개적으로 만날 장소는 라운지밖에 없었다. 그러니 곤란한 질문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웃으며 프런트에 기댔던 몸을 떼어 냈다.
대화를 빨리 끝내 주겠다는 뜻이었다.
“라운지가 몇 층이지?”
“15층입니다.”
“고맙네.”
“아닙니다. 라운지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오라가 눈짓하자 옆에 서 있던 직원이 냉큼 알렉스를 엘리베이터로 모셔 갔다.
그는 호위 하나 달지 않고 혼자 왔다. 심지어 도어맨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간소한 차림이었다.
아주 급하게 왔다는 뜻인데.
‘으아.’
사색이 된 오라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황태자를 보다 허겁지겁 계단으로 달려갔다.
막아야 한다.
치정은 안 돼!
그녀는 봄국 영애의 로그아웃을 막기 위해 다리가 터지도록 계단을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