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전차 바퀴와 사람의 발에 짓이겨진 낙엽이 바닥에 달라붙었다.
가을국 황도는 오늘따라 유달리 붐비었다. 전 대륙에서 몰려든 관광객들 때문이다.
현지인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늘어난 손님 덕분에 행복하거나 관광객에게 출근길을 방해받아 짜증 나거나.
오라 베르니스는 그 두 가지 반응을 모두 보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지독한 교통체증을 뚫고 겨우 호텔에 도착했다. 마차 문이 열리자 각 잡힌 직원들이 그녀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가을국의 랜드마크 오라 호텔.
그 주인인 오라 베르니스는 완벽한 호텔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라 호텔은 신년제면 늘 정신없이 바빴다. 그런데 올해는 유독 심했다. 3국이 함께 신년제를 치르다 보니 전 대륙에서 예약 문의가 빗발친 탓이다.
[안녕하세요 오라 영애, 신년 평온하게 보내고 계신가요?^^ 저 먼 타국, 여름국에도 영애의 뛰어난 경영 스킬이 퍼져있답니다. 소문을 듣고…….]
[저희 가문이 최근에 마석 광산을 하나 발견했는데요. 가을국 황실에서 전차 노선 확대로 마석 수요가 늘어 고민한다던데, 제가 영애의 협상을 위해 힘이 되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영애, 바바라예요. 제 이름 아시죠? 작년에도 몇 번 영애 호텔에서 묵었는데. 작년에는 제가 바빴지만 올해는 영애의 호텔 연회에 참석 가능할 거 같아요.]
‘이 사람들 무섭다.’
다들 리버뷰 프리미엄 스위트룸을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스위트룸.
보통 호텔이라면 일반 객실 수에 비해 그 수가 적어 극성수기에 예약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호텔은 80%가 스위트룸이었다.
그 사연을 이야기하려면 10년 전, 부모님의 재산을 상속받던 날이자 그녀가 오라 베르니스로 빙의한 날로 돌아가야 했다.
오라 베르니스는 상속받은 재산으로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지내기에는 #경영인여주의 버프가 아까웠다.
황금손 경영자.
투자만 하면 대박이 난다는 무시무시한 버프였다.
오라는 황도에 있는 높은 첨탑을 상속받았다. 그 건물은 보이는 것보다 내부 공간이 아주 넓고 높았다.
마차 주차 타워였기 때문이다.
마차를 보관하는 15층 높이의 건물.
옥상에 오른 오라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황도를 보며 사업 아이템을 고민했다.
일단 이 주차 타워는 시스템의 개그일 테니 경영을 이어 갈 생각은 없었다.
뭘 해야 할까?
개그를 떠나서 마차 주차 타워는 미래가 없었다. 가을국은 하필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근대 세계관이었기 때문이다.
늦은 밤거리를 가로지르는 전차를 보며 오라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마차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게 뻔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전차에서 내리는 한 신사가 들어왔다.
신사는 가로등 앞에서 주춤하더니 주변을 살폈다. 그는 뻑뻑한 눈을 비비고는 가방을 내려 두고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오라는 호기심에 신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신사는 스트레칭을 마치고 건물로 들어갔다.
그 건물은 신문사였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황실 신문사.
그 순간 오라의 머릿속으로 반짝 섬광이 스쳤다.
‘산업 혁명과 함께 야근이 시작됐지!’
노동력 수요가 늘며 나타난 노동 착취.
지금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권 분립시대. 자본가는 본격적으로 노동 착취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운송 수단과 통신 수단도 발달하게 되지.
전 대륙으로 노동자를 파견 보내게 된다는 말이다.
벌떡 일어난 오라는 벽을 짚고 눈을 반짝였다.
호텔 경영을 시작해야 해!
전 대륙에 체인점을 많이 만드는 거야. 그런 다음 신문사나 공장에 할인을 미끼로 선계약을 해 두고.
그럼 파견을 나온 수많은 노동자들은 필히 오라의 호텔을 이용할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호텔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10년 동안.
결국 오라는 전 대륙에 60개의 호텔 체인을 거느린 명실상부 거대 자본가가 되었다.
오라는 로컬라이징, 일명 현지화 전략을 펼쳤다.
지방 출장 목적의 호텔은 간소하게 지어 숙박비를 낮추고, 관광지나 수도의 호텔은 화려하게 지어 숙박비와 예약 경쟁률을 높였다.
가을국 황도 본점은 후자였다.
본점은 100개의 객실 중 무려 80개가 스위트룸이었다. 충분히 유저들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예약을 해 주지 않았다.
[아이코…… 지금 예약이 다 차서요 ㅠ.ㅠ 제가 스케줄 한번 보고 캔슬되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합장 이모티콘)]
“후후후.”
오라는 며칠간 지켜본 예약 전쟁을 떠올리며 웃음을 흘렸다.
매의 눈으로 거래 조건을 살핀 오라는 마음에 드는 조건을 제시한 영애들에게 방을 배정해 주었다.
그리고 그중 5명의 영애에게는 프리미엄 스위트룸을 배정해 줬다.
그렇게 오늘.
신년제 첫날, 드디어 그날이 왔다.
오라는 태블릿 피시로 메시지를 다시 살폈다.
모든 게 계획대로 되고 있다.
필요했던 마석까지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왜 마석이 중요할까.
가격이 비싸서?
아니다. 황실이 원하기 때문이었다.
가을국은 특이하게도 #직업물 여주들이 몰려 있었다.
유저들은 대부분 사업을 하거나 전문직 여주로서 제 능력을 펼치며 돈을 쓸어 모았다.
그래서일까.
가을국에는 황족과 귀족 유저가 없었다.
완벽한 균형이지.
제작진은 대충 사는 인간처럼 굴면서 은근히 세심하게 플레이 존을 설계했다.
사업의 핵심은 인맥.
아무리 근대라 해도 아직은 신분 제도가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니 황실과 귀족의 힘을 빌린다면 유리하게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쉬운 게임은 재미없어.’
즉 밸런스 붕괴로 게임이 노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제작진은 가을국 유저들을 모두 평민으로 설정함으로써 노잼의 위험성을 사전에 차단했다.
오라는 3년 전 건물 증축을 위해 분투했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황족이나 귀족 영애가 있었다면 쉽게 건설법 개정을 밀어붙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오라는 모든 걸 스스로 이룩해야 했다. #건축가여주와 #변호사여주에게 조언을 받긴 했지만, 황실 설득은 오라의 몫이었다.
오라는 버프를 적절히 이용하며 제 사업을 키워 갔다.
‘진짜 미친 대박 X존잼의 시간이었지.’
커리어로 내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켜 나가는 기분.
짜릿했다.
이래서 게임에 중독되는 건가.
그녀는 이미 대륙 최고의 호텔 경영자가 됐지만, 멈추지 않았다.
최근 오라는 고급 정보 하나를 입수했다.
봄, 여름, 가을국이 연합하여 마왕 토벌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
물론 패전할 수 있다는 리스크가 있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겨울국이 그녀의 사업권으로 들어오게 된다.
오라는 사업 확장을 위해, 황실로부터 겨울국 개발 사업권을 따내고 싶었다.
그리고 마석이 있으면 황실을 설득하기 쉬웠다.
이곳은 전기가 없어 마석으로 모든 동력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황실은 최근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기차 노선을 개통한 뒤로 마석의 안정적인 공급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마석이면 황실을 꼬실 수 있지.’
오라는 동화 속 겨울 국가에 자리한 자신의 호텔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하, 아드레날린이 차오른다.’
이 맛에 사업가들이 폭주하는군.
딱, 그녀의 취향이었다.
영애들은 흔히 말한다.
힐링물 전개를 원하면 봄국으로, 오감 자극을 원하면 여름국으로, 머리 쓰는 걸 원하는 가을국으로 가라고.
오라는 그 말에 동의했다.
가을국의 난이도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재밌었다.
오라는 호텔 앞에 즐비한 건물들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 건물의 1층에 자리한 프랜차이즈들을.
이곳엔 다양한 #경영자여주들이 있었다.
화장품 체인점, 프랜차이즈 카페, 놀이 공간이 된 대형 서점.
유통업계는 이미 유저들의 손에 들어간 뒤였다.
오라는 결심했다.
[결]을 치고 20억을 타면 이 플랫폼에 올인 투자를 하겠다고.
이 게임은 된다!
베타 테스트면 오류가 자주 발생할 법한데, 그녀가 기억하기로는 지난 10년간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가끔 일어나는 설정 오류도 알아서 복구되었다.
오랫동안 준비했다는 뜻이겠지.
그건 출시가 임박했다는 뜻과도 같았다.
금방 수익 실현할 수 있겠어.
게다가 이 게임은 착실하게 유저의 현금 결제를 유도했다.
게임의 수익화 방법 중 하나는 유저의 결제. 이른바 현질.
현생에서 게임을 할 때면 오라는 쉽게 제 지갑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무기 하나에 수천만 원이 오갈 정도로 현질이 일상인 게임에서도 말이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는 몇 번이나 캐시를 질렀다. 자꾸만 자신이 유저라는 사실을 잊고 더 나은 경영 성과를 위해 아이템을 사게 된 것이다.
그녀가 주로 구매한 것은 ‘남주시점 전개권’.
남주의 속마음을 보기 위해 쓰는 아이템이지만, 그녀는 계약 전 상대방의 허세와 마음을 파악하기 위해 썼다.
그렇다.
아이템은 여러 기능으로 사용될 수 있고, 캐릭터 관계도 수많은 방향으로 만들어졌다.
그만큼 돈 쓸 일이 많다는 소리.
과금에 미친 게임.
돈이 된다니까 이건.
오라는 음흉하게 웃으며 다시 태블릿 피시를 쳐다봤다.
오라 호텔에 5개밖에 없는 프리미엄 스위트룸.
이제 그 5개의 객실을 손에 넣은 고객들이 도착한다.
“사장님, 프런트 데스크에서 곧 손님들이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오라 호텔의 자랑. 라운지의 통유리창으로 가을국 황도를 내려다보던 오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1층 로비로 내려갔다.
화려한 로비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사장인 그녀가 직접 객을 맞이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오라가 프런트에 등장하자 직원들이 긴장했다.
오라는 경직된 직원들의 태도를 모른 척하고 데스크 앞에 섰다.
곧 첫 번째 방문객이 들어섰다.
봄국의 프리마돈나 바바라였다.
“어머, 사장님이 직접 나와 주셨네요.”
바바라는 화사하게 웃으며 오라를 끌어안았다. 오라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저희 호텔을 다시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바라는 웃으며 직접 체크인을 했다. 그리고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다음 달에 안드레아스 대공님 결혼식도 오라 호텔에서 진행한다고 들었어요.”
“네, 맞습니다.”
오라는 들고 온 파일을 열어 계약서를 한 장 꺼냈다.
“이제 곧 안드레아스 대공비가 되실 아이렌 양께서 바바라 양의 팬이셔서요. 혹시 그날 축하 공연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바바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저야 영광이죠. 여기 사인하면 될까요?”
최근 가을국의 대법관으로 임명된 안드레아스 대공의 결혼식.
그는 제 아내의 결혼식을 최고로 만들어 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바바라를 초대할 수 있는지 여기저기 묻고 다녔다.
그런 바바라를 축가 가수로 섭외했으니, 오라는 대공과 대공비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 오라가 직접 프런트로 내려온 이유는 영애들에게 계약금(?)을 직접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사인을 마친 바바라는 객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프리미엄 스위트룸 층으로 올라갔다.
로비에서 그녀를 알아본 이들이 소곤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셀럽의 삶이란.’
오라는 제 취향이 아니라 동정하듯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시선을 내리고 서류를 정리하는데 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로비로 들어오는 한 무리의 사람이 보였다.
두 번째 예약자인가.
오라는 금발의 여자가 들어오는 걸 보며 생각했다.
그녀의 손목에도 워치가 감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