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AI는 5개로 구분됐다.
SP(봄), SM(여름), FL(가을), WN(겨울), UNKNOWN(개발구역).
SP(봄), SM(여름), FL(가을), WN(겨울)은 시스템 설정을 수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사계국 AI는 시스템의 기존 설정을 수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코드를 만들어 새로운 설정을 추가할 수도 있었다.
베타 테스트 전에는 AI가 유저가 되어 게임을 점검하며 실시간으로 설정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AI는 타임라인이 진행되면서 계속 바뀌는 마물 개체 수, 국가별 인구수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재산과 영토, 가족관계 등의 데이터를 관리하고 실시간으로 설정을 수정했다.
베타 테스트 전까지는.
새로운 신경망인 인간의 뇌가 연결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번 베타 테스트의 목적은 AI에게 인간의 감정을 학습시키는 것이니 무엇보다 인간의 데이터가 중요했다.
불어난 마물 수에 당황하는 감정, 늘어난 인구수에 뿌듯함을 느끼는 감정, 가주로서 재산을 두 배로 불렸을 때 느끼는 쾌감, 가족을 잃고 느끼는 슬픔, 말도 안 되는 전개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불만과 만족감.
그 모든 감정의 데이터가 필요했다.
그래서 제작진은 AI가 학습에 집중하도록 시스템 접근 권한을 OFF 한 채 베타 테스트를 시작했다.
단, UNKNOWN(개발구역)은 예외였다.
“Error”:
“Code”: 403
“Message: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ID입니다.”
시스템에 접근한 AI는 안내를 보며 한발 물러섰다.
AI는 애초에 하나의 신경망이지만, 5개의 플레이 존을 나누어 담당하며 소속을 나누었다.
모든 AI가 시스템 수정 권한을 뺏긴 건 아니었다.
“Message: “접근이 허락되었습니다.”
UNKNOWN(개발구역) 소속 AI는 여전히 시스템 설정을 수정할 권한을 가졌다.
마족 지대는 아직 제작 중이라 적정 마물 개체 수와 마족 캐릭터의 전투력 등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데이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UNKNOWN(개발구역) AI는 열심히 시스템에 드나들며 설정을 수정하고 그에 따라 달라지는 신규 데이터를 추가 수집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름국에서 발생한 버그는 마족 지대로 제 소속 정보를 바꾸고 시스템에 접근했다.
‘재앙’을 막는 건 쉽지 않았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예측과 다르게 계속 변수가 발생했다.
사실 유저와 시스템을 속여 그들이 스스로 ‘재앙’을 막는 시나리오를 오픈하고, 안전코드를 시행하게 만든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해야 했다.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버그는 변수가 생길 때마다 쉴 새 없이 많은 것들을 수정했다.
숫자와 알파벳, 온갖 기호문자 사이를 유영하던 버그는 그 정보들을 묶은 희미한 선을 발견했다.
그는 제가 찾던 폴더를 발견하곤 바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캐릭터’ 폴더 접근]
[봄, 여름, 가을, 겨울, 마족 지대 중 어느 폴더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버그는 어떤 캐릭터의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제가 가져온 코드를 붙여 넣었다.
경계선을 빠져나온 버그는 다시 천천히 데이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른 경계선에 비해 크기가 작은 경계선에서 멈춰 섰다.
[‘리워드/페널티’ 폴더 접근]
버그는 ‘리워드/페널티’ 폴더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3개의 파일이 있었다.
1개는 현재 다운로드가 끝나 적용 중이었고, 2개의 파일은 곧 다운로드 될 예정이었다.
‘스테이지 [승] 중간 랭킹 공개’
‘스테이지 [전] 중간 랭킹 공개’
버그는 ‘[승] 중간 랭킹 공개’ 파일을 열어 리워드와 페널티를 확인했다.
[스테이지 [승] 중간 랭킹 공개]
┗ [리워드 = 상위 15위; message “10만 캐시를 지급합니다.”]
┗ [페널티 = 하위 45위; message “아이템 사용을 제한합니다.”]
버그는 내용을 수정했다.
[스테이지 [승] 중간 랭킹 공개]
┗ [리워드 = none; message “없음”]
┗ [페널티 = none; message “없음”]
랭킹에 따른 리워드와 페널티를 전부 없앤 버그는 새로운 설정을 적었다.
[스테이지 [승] 중간 랭킹 공개]
┗ [리워드 = all; message “공정한 플레이를 위해 모든 유저의 커뮤니티 접근이 허락됩니다.”]
┗ [페널티 = all; message “공정한 플레이를 위해 모든 유저의 아이템 사용이 제한됩니다.”]
버그는 다른 폴더에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여러 폴더의 경계를 넘으며 제멋대로 설정을 수정했다.
시스템을 나가려던 버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캐릭터 폴더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수많은 캐릭터 파일이 있었다.
유저 ‘아이시스 프로페타’를 찾은 버그는 그곳에 새로 파일을 하나 만들었다.
[시대의 예언자 ‘아이시스 프로페타’에게 예언이 추가됩니다.]
2월 12일 일정으로 예언을 추가한 버그는 이제 정말 나갈 생각으로 경계를 넘었다.
그러다 무언가 오류를 감지했는지 잠시 멈칫하더니 빠르게 캐릭터 폴더로 돌아갔다.
버그는 어떤 캐릭터의 폴더로 한 번 더 들어가더니 그 안에서 또 한 번 데이터를 수정했다.
‘다 됐다.’
AI는 시스템 접근 일정을 기록하는 시트로 넘어갔다.
제 수정 기록을 일괄 제거한 버그는 다시 유유히 신경망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 모든 게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시스템 보안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버그는 다시 여름국으로 제 소속 정보를 바꾸었다.
***
봄국 황성 앞 광장.
그곳은 가을국 검투 대회에 참가한 봄국인을 위한 예선장이었다.
마지막 예선 경기가 끝나자 관중이 모두 침묵했다.
저 멀리 날아간 칼이 모래 바닥에 꽂혀 있고, 한 참가자가 바닥에 누운 채 마른침을 삼켰다.
참가자는 바로 눈앞에서 번쩍이는 칼날을 보며 침묵했다.
반면, 그의 가슴을 발로 누른 채 칼날을 들이민 요한의 표정은 평온했다.
파견 온 가을국 연회 관리자가 소리쳤다.
“마지막 본선 진출자가 나왔습니다.”
그는 호쾌한 목소리로 본선 진출 포상을 설명했다.
나는 입을 벌린 채 마지막 토너먼트 결과를 쳐다봤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가능하다고?’
요한은 싸구려 칼날을 검집에 넣으며 그에게 다가가 증서를 받았다.
봄국 예선 참가자는 총 64명.
리그전 3회로 8명의 본선 진출자를 선정했다.
나는 당연히 요한이 예선에서 탈락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 미친 운빨.’
저렇게 선택 남주가 많은데 세 번 연속 비선택 남주랑 붙다니.
이건 신의 장난, 그러니까 시스템의 장난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리나 영애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칼같이 6합만 되면 다 쳐내네. 뭐지, 이달의 행운의 숫자가 6이신가.”
“데이지 영애 축하해요. 영애는 가을국에 가시겠네요!”
안젤리카는 좋아하며 작게 손뼉을 쳤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받다 그녀의 어깨너머 관람석을 쳐다봤다.
관람석에는 손목에 워치를 찬 영애들이 몇 명 더 있었다. 그중 7명의 영애가 신나서 소리를 치며 제 남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본선에 진출한 7명의 남주는 모두 그들의 선택 남주인 모양이다.
그 소란 속으로 다시 시에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분이 그 유명한 인어공주 남주군요.”
옆에 앉아 있던 봄국 영애들이 까르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정말 동화상이네요. 잊고 지내던 감성이 차올라요.”
“그러게요. 안데르센상이 뭔지 확실히 이해했어요.”
“안데르센상이 뭔데요?”
나는 흐린 눈으로 아리나를 쳐다봤다.
“아련하고 따뜻한데 잘 생각해 보면 위험하고 슬픈 이야기가 담긴 얼굴이죠.”
“……영애는 남주 얼굴에서 스토리가 보이세요?”
아리나는 눈을 찌푸리며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아니, 나만 보여요? 다들 보이는 거 아니에요?”
안젤리카는 감동한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대단하세요, 아리나 영애! 저도 열심히 배울게요!”
“아니야 영애, 이상한 거 배우지 말아요.”
시에나가 고개를 저으며 안젤리카의 잘못된 사교육을 차단했다.
나는 다시 광장을 쳐다봤다.
요한은 본선 진출 증서를 손에 쥔 채 단상에서 내려와 이쪽으로 걸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요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안젤리카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나 영애, 저 동화상이 뭔지 이해했어요.”
“그쵸? 갑자기 어느 순간 몽글몽글 마음이 따뜻해지죠?”
“네! 딱 그걸 느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같이 봤잖아요. 감상이 통하는 영애가 있어서 벅차오르네요. 이 맛에 덕질 같이 하는 거죠.”
아리나와 안젤리카는 뿌듯해하며 서로 주거니 받거니 했다.
요한이 사계국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다행이었다.
순간 이분들과 함께 있는 게 창피할 뻔했다.
그때 아리나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우리 데이지 영애는 복도 많지. 집에 가면 천사 같은 비에른이 밥해 줘, 재워 줘, 용돈 줘, 밖에 나오면 동화 같은 요하네스가 놀아 줘, 호위해 줘, 웃어 줘.”
“비에른은 밥 안 해요.”
“이에테르가 식솔이 해 주는 거면 비에른이 해 주는 거죠, 뭐.”
아리나의 말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그녀가 웃으며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질투 나서 그래요, 질투 나서. 나는 악마 같은 방계 황족 10명이 줄줄이 소시지로 따라오는데 우리 영애는 아직 남주 선택 안 했는데도 서사가 잘 풀려서.”
시에나가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제가 내일 같이 티파티 가 준다고 했잖아요. 데이지 영애 그만 괴롭혀요.”
“흑흑, 공작부인. 나는 우리 공작부인만 믿어요.”
아리나가 눈물을 닦는 척하며 시에나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시에나는 유명한 로판 화법의 고수라고 한다. 그녀는 아리나를 도와주기 위해 내일 봄국 황실에서 주최하는 티파티에 참석해 주기로 했다.
나도 같이 가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밖에 나올 때마다 요한과 붙어 다녀야 하는데, 황성에 가다니.
봄국 황제의 또라이 같은 성정과 시스템의 차별이 합쳐지면 어떤 불지옥이 펼쳐질지 알 수 없었다.
자박.
그런 심각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눈앞에 그림자가 졌다.
어느새 요한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내게 증서를 내밀었다.
자랑하는 거였다.
심란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나는 가져온 노트에 글을 적어 보여 줬다.
[축하해요.]
요한은 조용히 펜을 들어 아래에 답장을 적었다.
[그럼 저희 이제 가을국으로 가는 겁니까?]
나는 깊은 한숨을 삼켰다.
상대적으로 과학과 문명이 발전한 근대 로판 세계관, 가을국.
그곳에서 과연 요한의 정체를 들키지 않고 숨길 수 있을지 조금 두려웠다.
신년제는 열흘 정도니까……. 괜찮겠지?
열흘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시선을 들어 요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자 기대 어린 푸른 눈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마음이 약해진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이번엔 운이 좋았던 거지 본선 진출자들은 못 이길 거야. 본선 탈락일 테니, 황실 경기장에 들어갈 일은 없을 거야.
조용히 관광이나 하다 와야겠다.
요한도 사계국에 온 김에 다른 나라에 가 보고 싶을 테니까.
나는 요한을 보다 그냥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쨌든, 가을국이면 알렉스의 영역이고, 알렉스가 눈감아 주기로 했으니까 황실로 가거나 크게 사고를 치는 게 아닌 이상은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여행을 즐기다 오는 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어차피 할 일이라면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일단 은행부터 가자.’
쇼핑의 메카, 가을국.
#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남주에게 #유토피아 여주의 #돈지랄 전개를 추억으로 남겨 주리라.
그동안 수고한 오라버니 비에른에게 효도 관광도 시켜 주고.
우선 호텔 #경영인여주님한테 메시지부터 보내야겠다.
5성급 호텔 리버뷰 스위트룸을 예약하고 일주일 동안 호캉스나 즐겨야지.
나는 요한을 보던 시선을 돌리고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상태창을 켰다.
CH10. 가을날의 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