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알렉스를 겨우 달래 돌려보내고 돌아오니 저택에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알렉스가 벌인 난장을 본 사용인들이 후다닥 비에른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
바로 서쪽 저택으로 달려온 비에른은 만발한 가시넝쿨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주위로 낭자한 핏자국도.
그렇다. 비에른은 꼭지가 돌아 버렸다.
그의 저택에서 멋대로 이능을 쓰고, 제가 보호자로 있는 사촌 여동생을 공격했으니.
“……그래서 제가 어디 있는지 말을 안 했군요.”
“[흥분한 상태라 데이지의 대화에 방해가 될 것 같았습니다.]”
나는 비에른과 면담을 끝내자마자 요한의 방으로 왔다. 창가 소파에 앉으며 아픈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내 실수다.
정신이 없어서 요한의 이능을 거둘 생각만 했지 알렉스의 이능을 치울 생각은 못 한 탓이다.
“[중재가 필요했다면 제게 도움을 요청했을 텐데, 멀리 떨어진 온실로 가는 걸 보고 데이지에게 생각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내 표정을 살피며 덧붙였다.
“[제 실수였습니까?]”
“아뇨. 잘하셨어요.”
나는 손을 내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만약 비에른이 온실로 와서 그 대화를 들었다면, 비에른도 요한의 정체를 알게 될 텐데 그러면…….
상상만 해도 복잡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일단 치료부터 해요.”
나는 내 방에서 가져온 상자에서 천과 약초를 꺼냈다.
마족 지대에서 의원이 챙겨 줬던 여분의 약이었다.
알아봤는지 요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의원을 부를까도 생각했는데, 요한은 마족이니까 마족 지대 약이 더 잘 듣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약초를 들고 요한의 소매를 걷었다.
그의 상처를 보는 순간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걸 참았어요?”
거대한 이빨이 박혔던 것처럼 그의 팔에 구멍이 여러 개 나 있었다. 핏자국 사이로는 푸른 멍이 번져 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이틀이면 나을 테니.]”
“이틀이요?”
허세도 정도껏 부려야 믿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요한을 쳐다봤다. 그러나 요한은 고요한 표정으로 제 상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허세가 아닌가?
생각해 보니 #아포칼립스물에서 남주가 좀비에게 물리는 거 아닌 이상, 파상풍이나 괴사로 죽는 경우는 거의 못 본 거 같긴 하다.
항생제도 없고 영양 상태도 안 좋은 상황에서 여기저기 상처를 입는데 말이지.
#아포칼립스 남주의 버프인가.
납득한 나는 요한의 상처에 약초를 올렸다.
“따끔해도 참아 봐요.”
따끔할 만한데 요한의 표정은 평온했다.
“안 아파요?”
“[괜찮습니다.]”
나는 붕대를 감으며 요한을 힐끗 쳐다봤다.
“……미안해요.”
그런데 지금껏 무감한 얼굴로 있던 요한이 눈을 찌푸렸다.
“[왜 사과를 하십니까?]”
“알렉스가 원래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이 아닌데…….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원래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이지만, 누군가는 사과해야 할 거 같아서 대신 요한을 위로했다.
그런데 요한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대신 사과하지 마십시오.]”
조금 당황스러웠다.
알렉스가 직접 사과할 일은 없을 텐데.
어떻게 달래야 하나 걱정하는데 요한은 다른 소리를 했다.
“[저보다 그 인간과 더 가까운 사이로 느껴져서 거부감이 듭니다.]”
……더 가까운 사이?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르는데 요한이 말을 이었다.
“[그게 사실이어도 싫습니다. 차라리 저를 대신해서 같이 욕해 주십시오.]”
내가 알렉스와 더 가까운 사이라 말할까 걱정된 모양인지 바로 말을 끊었다.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달싹였다.
“아니, 가까운 사이라기보다 동료긴 한데…… 아니, 그냥 같이 욕해 줄게요. 알렉스 인성에 관해 얘기할까요?”
나는 뭐라 변명하려다 그냥 쉬운 쪽을 택했다.
알렉스 뒷담은 꽤 숙련된 기술이라 언제 어디서든 선보일 자신이 있었다.
겨울국에서 탐사대원으로 지내던 시절, 체이스 경과 푸념을 빙자한 뒷담을 자주 해 왔던 터라 대화의 포문을 여는 레퍼토리도 있다.
‘오늘 날씨가 맑아서 제정신이 아니신가 봐요. 다섯 시간 동안 회의를 했으면서 내일 오전까지 볼 수 있게 회의록 정리를 부탁한다고 말씀하시는 거 있죠?’
‘데이지 레이디,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저녁을 잘못 드셨는지 오늘따라 광기가 폭주하시더군요. 14구역과 15구역을 주말에 다시 가서 보고 오자고 굳이 저를 본인 스케줄에 묶으셨습니다.’
날씨가 좋아도 저녁 메뉴가 좋아도 불안하던 시절.
체이스 경의 위장병과 내 손목 통증의 원인.
다시 떠올리니 또 열이 오른다.
요한의 부탁이 아니어도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알렉스 뒷담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요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냥 생각하지 마십시오.]”
잠시 내가 허공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더니, 알렉스에 대해 아련한 생각을 한다고 오해한 모양이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해명할 틈도 없었다.
정말 듣기 싫었는지 요한은 제 팔을 거둬 가며 화제를 바꿨다.
“[아까 이에테르 공작이 제게 검을 잘 다루는지 묻더군요.]”
그래. 앞담보다는 낫지만, 뒷담도 나쁜 거니까 하지 말아야지.
나는 순순히 요한이 바꾼 화제를 따라갔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별 뜻 없는 질문인데, 요한이 충격적인 답을 주었다.
“[궁금하시면 직접 대련을 해 봐도 좋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마족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았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신분 하락이 적응되지 않았나 보다.
공작에게 용병이 대련 요청을 하다니!
내가 실수한 것도 아닌데 마른침이 넘어갔다.
“설마 진짜 두 분이 대련을 하셨나요?”
요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쳤나 봐!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물었다.
“몇 합으로 이겼어요?”
나는 요한이 부디 일주일간 사회생활 능력을 키웠길 바라며, 최소 3합은 했다고 답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마족 혼혈 인외남주는 호락호락하게 인간 사회에 순응하지 않았다.
“[1합으로 끝났습니다.]”
심지어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솔직히 당황스럽더군요. 사계국 인간들은 강하지 않아도 지도자의 말을 따라 주는 겁니까?]”
나는 괜히 울컥해서 비에른의 편을 들었다.
“사계국은 무력이 전부가 아니라서 그래요. 가주는 가솔들이 굶지 않게 잔고 관리도 잘해야 하고, 가문의 위상을 높여서 무시당하지 않게 해야 하죠. 그런 면에서 비에른은 뛰어난 지도자예요!”
요한은 납득은 안 가지만 문화 차이라고 받아들였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사계국은 무력보다 다른 것들이 중시되는 곳이군요.]”
우리 비에른도 무력 괜찮은데!
아카데미에서 TOP 3안에 들었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냥 그쪽이 아포칼립스 버프로 무력이 뛰어난 거잖아요!
나는 뱉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곱씹다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비에른은 뭐라던가요?”
1합으로 져서 기분 상했을지도 모른다.
호위 채용을 취소하면 어쩌지?
그러나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아주 좋아하더군요. 제게 데이지의 기사가 되어 검투 대회에 나갈 생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예?”
“[이유는 모르겠지만, 빨리 기사를 선택해야 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동안 비에른이 알렉스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이다.
하긴 간단한 축하 카드 쓰는 것도 은근히 신경 쓰이는데, 계속 타국 황실에 서신을 보내야 하니 정말 부담되겠지.
심지어 거절과 항의 서한이잖아.
미안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때, 요한이 덧붙였다.
“[다만, 데이지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데이지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안 돼요.”
지금 겨우 알렉스한테 눈을 감아 주겠다는 답을 받았는데, 그 많은 사람 앞에 나서겠다니.
안 돼. 절대 안 돼!
단호하게 거절하자 요한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왜 안 되는 겁니까?]”
“올해 신년제는 3국이 함께 치른단 말이죠. 전 대륙에서 사람들이 모이니 참가자도 관람객도 어마어마할 거예요. 그런데 그 많은 사람 앞에 서겠다고요? 그러다 누가 마족인 걸 눈치채면 어떡해요.”
나는 마지막 말은 속삭이듯 말하며 문가를 힐긋거렸다.
“[들키지 않겠습니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위험해요!”
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를 생각해 주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위험해질 거란 각오도 없이 오지 않았습니다.]”
각오가 문제가 아니라니까?
요한이 들키면 그를 숨겨 준 이에테르가도 위험했다. 그리고 같이 눈감아 주기로 한 가을 나라 황태자도.
이 말을 하려는데, 눈치챈 요한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그대와 그대의 가족에게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아뇨. 마족을 숨겨 준 걸 들키면 저희도 처벌을 피할 수 없어요.”
“[죄를 묻는 사람이 없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요한은 매우 간단한 사실을 말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했다.
멍하니 그 무표정한 얼굴을 보다 물었다.
“죄를 묻는 사람이 어떻게 없을 수가 있어요?”
“[죽은 사람은 죄를 묻지 못하니까요.]”
“…….”
잠시 잊고 있었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차이.
인간 사회와 마족 사회는 구조부터 가치관까지 큰 차이가 있었다.
“그건 불가능해요. 제가 잘못한 걸 벌한다고 다 죽일 수는 없어요.”
“[가능합니다.]”
“아니요. 황실 근위대만 3천 명은 되는데 그걸 어떻게 이겨요.”
하지만 요한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지 또 진지하게 답했다.
“[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약하니까요.]”
참으려 했으나 웃음이 새나왔다.
“만약에 전 대륙 사람들이 다 저희를 잡겠다고 달려들면요? 그것도 이길 수 있어요?”
요한은 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 정도로 강해요?”
나는 비웃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 노력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요한은 한 치의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