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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24화 (125/208)

124화.

알렉스는 그저 웃었다.

“데이지, 협박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

그는 답장을 쓰듯 내 계획을 반박했다.

“나는 저 호위가 마족이라고 밝힐 거야. 그대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능을 썼다고 하면 돼. 사람들이 누구의 말을 믿을 거 같아?”

나는 오만하게 웃고 있는 알렉스를 보며 웃음기 한 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저는 호위가 제 연인이라고 말할 거예요.”

알렉스는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께서 제게 연심을 품고 검투 대회 기사로 삼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저는 거절했고.”

그러고 싶지 않은데 목소리가 떨렸다.

“제 호위가 대신 기사가 된다는 사실에 분노해 누명을 씌우는 거라고요.”

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뒤로 숨겼다.

알렉스는 강하게 나갈 때,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타입이었다.

필요 없는 싸움은 피하는 게 최고지만, 물러서면 안 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때였다.

절대 약해 보이면 안 된다.

그러면 내가 아니라 또 요한에게 손을 댈 거다.

“전하께서 직접 이에테르가에 두 번이나 제 기사가 되게 해 달라 서신을 보내셨으니 저는 증거도 충분합니다.”

가만히 내 말을 듣던 알렉스가 입매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나는 저놈이 그대의 호위가 된 걸 오늘 알았는데?”

“뭐가 중요하겠어요. 증거도 없이 남의 호위를 마족이라 몰아세우는 황태자의 말보다는, 두 번이나 거절당한 황태자가 화풀이로 연적에게 누명을 씌운다는 말이 더 그럴듯한데.”

나는 떨지 않으려 노력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전 증거도 있잖아요. 전하와 달리.”

알렉스는 웃으며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알렉스가 요한을 마족이라 고발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알렉스는 내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제 잘난 맛에 사는 황태자의 성격이 얼마나 망가져 있든 간에 결국 내 말을 들을 거다.

그는 내게 #여공남수로 묶여 있으니까.

그러니 나는 부탁이 아니라 최대한 강압적인 태도로 알렉스를 눌러야 했다.

다행히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는지, 알렉스는 더 말을 잇는 대신 미묘한 숨을 내쉬었다.

나는 온실로 고개를 틀어 그쪽을 보다 말했다.

“어차피 저랑 얘기하러 오신 거잖아요.”

알렉스의 시선이 나를 따라 온실을 향했다.

“저랑 따로 얘기하세요.”

“그래. 할 이야기가 더 많아졌으니 자리를 옮겨야겠지.”

알렉스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내 쪽으로 걸음을 뗐다.

나는 요한에게 다시 마족어로 말했다.

“저기 3층 중앙에 있는 방이 요한이 지낼 방이에요. 입구에서 다른 사용인이 안내해 줄 테니 따라가면 될 거예요.”

요한은 대답 대신 차가운 눈으로 내 팔을 응시했다.

“[정말 데이지의 동료가 맞습니까?]”

믿기 힘들겠지만, 그나마 저게 인성이 착해진 거라고 알려 줘야 하나.

나는 긴말을 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한 자입니다.]”

알고 있어요.

내 키워드.

내 남주복.

씁쓸한 숨을 삼키며 요한을 안심시키기 위해 웃었다.

“괜찮아요. 저한테는 나쁜 짓 안 해요.”

“[저도 함께 가면 안 됩니까.]”

“아뇨. 같이 가면 정말 위험해질 거예요. 먼저 가 있어요.”

둘이 싸우는 걸 잠시 상상했다.

그만하자.

1초 상상했는데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왔다.

지금 피도 많이 흘려서 그런지 힘이 없었다.

진짜 쓰러질 것 같다.

“데이지.”

알렉스가 부르는 바람에 그쪽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그가 눈을 접어 웃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너 아까까지 나랑 얘기했잖아. 이게 무슨 내로남불이야.

눈이 가늘어질 뻔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짜증을 숨겼다.

일단 지금은 알렉스와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어쨌든 요한의 정체를 들켰으니, 이렇게 된 거 알렉스가 요한에게 호의적으로 나올 수 있게 잘 다독여 놔야 했다.

머리야 굴러 줘, 제발.

나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전하. 가실까요? 비에른 오라버니가 또 제가 다친 걸 보면 정말로 크게 항의를 할 것 같거든요.”

알렉스는 아직도 요한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르지 못한 짜증이 튀어나온다.

“가자니까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하자 알렉스가 순순히 걸음을 틀었다.

역시, 세게 나가면 말을 듣는구나.

알렉스에게 #여공남수 키워드를 적용한 건 신의 한 수였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알렉스의 광기를 누를 방법을 고민했다.

***

내게 온실이 생겨 다행이었다.

조용히 대화할 곳이 있다는 게 이렇게 마음 놓일 줄이야.

그는 제가 선물한 꽃들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큰 산이 남았지만, 일단 조금 기분이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앉으세요, 전하.”

나는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 와 예의 있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먼저 앉아.”

예전 같으면 저부터 바로 앉았을 텐데 알렉스는 내 의자를 먼저 빼 주었다.

아직 알렉스의 변화에 적응 못 한 눈이 자꾸만 멋대로 가늘어진다.

알렉스는 민망한 줄도 모르고 눈웃음을 지으며 다시 의자를 고갯짓했다.

마지못해 앉으니 의자까지 넣어 준다.

‘진짜, 적응 안 돼…….’

나는 차분해지려 노력하며 떨리는 동공에 힘을 주어 집중했다.

자리에 앉은 알렉스가 먼저 물어왔다.

“어떻게 돌려보낼 거야?”

돌려보낼 거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방법을 묻는다.

돌려보내는 건 당연하다고 여겼다.

나는 일부러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대답했다.

“요한이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날 스크롤을 주려고요.”

알렉스가 피식 웃으며 테이블에 손을 올렸다.

“지금은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는 거네.”

나도 요한이 돌아가길 바라지만, 그걸 서두로 꺼낼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공작 인플레이션이 만연한 세상이라고 하나, 타국 공작가에서 난장을 부리는 알렉스인데 연고 없는 마족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

더 무서운 건 요한이 순순히 알렉스에게 져 줄 리 없다는 거고.

알렉스는 요한을 마족 지대로 보내고 싶어 한다. 요한은 사계국에 있고 싶어 하고.

나도 요한이 돌아가길 바란다는 걸 알면 알렉스는 서슴없이 요한을 공격할 게 뻔했다. 물리적인 방법이든 정신적인 방법이든.

둘이 맞붙는 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나는 그걸 막기 위해 알렉스의 에너지를 내 쪽으로 돌릴 생각이었다.

요한이 돌아가려면 나랑 얘기해야 한다는 걸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해야 한다.

왜인지 초등학생 둘을 중재하는 담임 선생님이 된 기분이다.

탈력감이 든다.

왜 나는 남주를 두고 육아와 교육을 겸업하는 기분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강압적관계에 왜 코어팬이 있는지 알 것 같다.

남주가 내 멱살을 잡고 전개를 이끌어 줬으면 좋겠다.

‘그냥 끌려가고 싶어…….’

하지만 얘네 둘이 날 끌고 가면 내 사지가 찢어질 테니 일단 이 친구들의 전투 모드를 끄는 게 먼저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으니 지루했는지 알렉스가 턱을 괴고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데이지, 마족이야.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놈이라고.”

나는 그 시선을 받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저도 이게 위험한 일인 건 알아요.”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한이 돌아가게 만들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의 호의에 기대면 충분히 가능했다.

내가 나중에 마족 지대로 찾아가겠다고 거짓말을 해 돌려보내는 방법도 있고, 부담되니까 찾아오지 말라고 무안을 주는 방법도 있다.

다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굳이 상처를 줄 바엔 요한이 스스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 주고 싶었다.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걸 깨달으면 요한도 옳은 선택을 할 거라 믿었다.

침묵하던 알렉스가 철제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데이지, 사계국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지?”

“알아요.”

“아니. 모르는 거 같은데.”

그가 웃으며 테이블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바닥에서 잔디 줄기가 올라와 하얀 철제 테이블을 뒤덮었다.

가느다란 줄기가 뭉쳐지며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었다.

풀 인형은 16개가 되었고, 나란히 늘어선 인형 앞으로 도드라지게 큰 인형이 하나 더 생겼다.

알렉스는 그 커다란 인형의 머리에 왕관을 만들어 줬다.

“데이지, 지금 마왕은 사계국을 멸망시키려 하고 우리는 그걸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긴 머리처럼 바닥까지 잔디 잎사귀를 길게 늘어뜨린 인형 하나.

그 뒤로 선 16개의 똑같은 인형.

마왕과 16 수호성이었다.

알렉스는 내게 그 모습을 보여 주며 경고했다.

“마족은 우리와 달라. 국가로 분열되지 않고 한 종족으로 뭉쳐 있지. 그리고 그대도 봐서 알겠지만, 일개 마족조차 이능을 쓸 수 있어.”

테이블을 보던 금빛 눈동자가 올라와 나를 직시했다.

“마족이 사계국에 잠입할 수 있는 건, 단순히 위험하다고 표현할 일이 아니야.”

알렉스의 걱정을 이해했다.

기껏 마왕을 물리친다고 해도, 마족들이 몰려온다면 다시 사계국은 위험해진다.

성벽이 뚫리지 않게 막아야 하는데, 마족이 이미 사계국의 성벽 안에 있으니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요한이 사계국을 공격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제작진 예산 지켜.’

전쟁 씬 구현 절대 없을걸?

그리고 요한은 시즌 2 오픈 지역에서 왔다고.

시즌 1 남주 알렉스가 걱정하는 시즌 1과 시즌 2 세계관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나는 흐린 눈을 거두고 다른 말을 했다.

“요한이 사계국에 있는 게 우리에게도 안전해요.”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알렉스가 대놓고 웃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모르겠군.”

나는 웃지 않고 말했다.

“요한은 제1 수호성이에요.”

알렉스의 웃음이 멈췄다.

그의 눈빛이 어두워지는 걸 보니 내 추측이 맞는 것 같다.

“전하도 아시죠. 16명의 수호성이 마왕을 지키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걸요.”

역시나, 테이블에 열여섯 개의 인형을 만든 걸 보니 알렉스도 마족의 계급에 대해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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