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23화 (124/208)

123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푸른 시선을 떨어뜨린 채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참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건 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대놓고 선을 넘었다는 걸 직감했다.

요한의 비밀을 거침없이 헤집은 모양이다.

하긴 소설에서도 이런 비밀을 알아내려면 최소 10화 분량의 에피소드가 필요하던데.

‘나 너무 날로 먹으려 들었나.’

변명하자면 요한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고 믿어서 물은 거였다.

그저 확답을 받고 싶어서.

하지만 그 질문은 외려 확신 대신 요한이 그 전쟁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주었다.

요한은 시선을 피하듯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곤란한 질문을 했네요.”

꼭 이렇다. 왜 상대가 좋게 말하면 선을 넘게 될까.

나는 심지어 알면서도 선을 넘었다. 그러니 미안함은 배가됐다.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몰라 한참 입을 달싹이다 말했다.

“미안해요. 진심이에요.”

요한의 시선이 대답처럼 이쪽으로 흘러왔다.

그는 미소를 머금더니 입을 열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말해 드리고 싶지만, 금제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거라.]”

그는 신음을 삼키듯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어쨌든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데이지의 잘못은 없으니까요.]”

미안해하지 말라니.

내가 잘못한 거 맞는데.

불편한 질문인 거 알면서 빨리 호기심을 해결하려고 욕심낸 건데.

나는 울컥한 마음을 누르며 물었다.

“요한…… 저 진짜 마지막 질문인데요.”

그는 허락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내게 집중했다.

“요한은 천사인가요?”

“[……예?]”

“마족 지대에 피치 못할 사연으로 잠입한 천사죠? 당신 대천사 맞잖아요. 전부터 궁금했어요.”

머릿속에 꽁꽁 눌러 왔던 주접이 폭주했다.

요한은 다소 충격을 받은 듯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마세요. 전 심각해요. 진짜 이런 인성으로 살면서 마족이라고 우기지 말아요. 보는 저는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아세요?”

이 와중에 요한은 손등으로 제 입술을 누르고 웃음을 참았다.

저거 봐! 웃지 말란다고 웃음 참는 것 좀 보라고!

저게 무슨 마족이야. 저건 천사야. 요한도 분명 버그 걸려서 캐해 이상하게 꼬인 게 분명해.

남 일 같지 않은 잘못된 캐릭터 해석에 감정이 더 격해졌다.

마차 안에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차가운 인외 남주가 빵 터진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청순여주가 될 수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분석하고 싶지는 않으니 넘어가자.

나는 내 안에 숨어 있던 개그 욕심을 모른 척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틀었다.

언제 공작저에 도착했는지 마차는 이에테르가 정원 안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민망함을 치우기 위해 바로 화제를 돌렸다.

“도착했네요. 일단 요한이 지낼 방부터 알려 줄게요. 짐 풀고 비에른이 알현 시간을 잡아 주면 같이 인사하러 가요.”

요한은 아무래도 좋은지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는 아직도 웃음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끼익.

내 방이 있는 서쪽 건물 앞에서 마차가 멈췄다. 먼저 내린 요한이 내 손을 잡아 줬다.

다행히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아무래도 요한에게 사연이 있는 것 같으니, 앞으로 말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요한은 내 손님이잖아.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있는 동안은 편하게 지내도록 노력하자. 나도 마족성에서 그렇게 지냈으니까.

나는 은혜 갚는 까치처럼 요한에게 편안한 생활을 제공할 방법을 고민하며 걸었다.

그런데 그때, 대리석 계단 난간에 기댄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걸음이 절로 멈춰졌다.

눈이 마주치자 알렉스가 난간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말없이 한참 가만히 있던 알렉스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네.”

그의 시선이 곧 요한에게 미끄러졌다.

“저쪽은 처음 보고.”

예복이나 자켓을 걸치지 않은 걸 보니 집무를 보다 들른 것 같았다.

한동안 멋대로 찾아오지 않아서 안심했는데, 왜 하필 오늘 갑자기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

분명 따사로운 봄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데 주변으로 서리가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쏴아아아.

심지어 분수 소리마저 서늘하게 느껴진다.

몇 초 뒤, 알렉스가 입매를 기울이며 나를 불렀다.

“데이지.”

알렉스가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가볍게 묵례를 하며 그에게 대답했다.

“네, 전하.”

금빛 눈동자가 옆으로 조금 굴러갔다. 그 시선은 정확히 요한에게 고정됐다.

“저건 돌려보내는 게 낫지 않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렉스가 요한을 턱짓하며 피식 웃었다.

“내 앞에서도 저따위로 표정 관리를 못 하는데, 금방 들킬 거야.”

알렉스가 뭔가를 알고 얘기하는 것처럼 들려서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모른 척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죄송하지만 전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하.”

웃음을 터트린 알렉스가 순식간에 모든 표정을 지워 냈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요한을 보며 입을 열었다.

“데이지.”

“네.”

“금서를 보유하는 것과 마족을 데리고 있는 건 차원이 달라.”

얼굴 근육이 굳었는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표정마저 읽혔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야, 넘겨짚는 거 아닐까?

얼굴만 보고 어떻게 마족인 줄 알아?

나는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마족이라니요! 큰일 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알렉스가 짙은 눈웃음을 지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때 짓는 표정이다.

학습된 위축감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알렉스는 곧 눈웃음을 거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넓은 난간에 손을 올린 그가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이에테르 공작이 항의서를 보냈어. 약속과 다르게 봄국 일원을 위험에 방치했다고 말이지.”

그는 차분히 제가 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물으니, 비에른이 화를 내더군. 마물 속에 고립된 제 동생을 겨울국 탐사 대원이 구해 줬다고. 고작 기사 한 명이 물리칠 수 있는 마물인데, 왜 두고 도망쳤냐고 말이야.”

내가 비에른에게 말하며 각색한 요한의 이야기였다.

“처음엔 여름국 황제를 이야기하나 싶었는데, 뭔가 이상하더군. 봄국의 공작이 감히 제국의 황제를 기사라고 표현할 리는 없으니.”

나는 비에른이 보낸 편지를 읽지 못했는데, 그는 꽤 자세한 내용을 담아 항의한 모양이었다.

비에른이 내 얘기를 듣고 항의를 한다고 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항의를 한 줄은 몰랐다.

“오늘 회신을 받자마자 제대로 얘기를 해 보려 이에테르 공작저로 왔지. 그리고 비에른에게 그대의 은인이 호위로 지내게 됐다는 말을 들었어.”

알렉스는 요한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눈으로 훑고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마물 떼를 홀로 퇴치한 기사, 갈 곳 없는 외국인. 그리고 그대가 마족 지대에서 가져온 로브에 맞는 장신.”

요한에게 머무르던 시선이 내게로 박혀 왔다.

“그 마족이 찾아왔나 보군.”

나는 슬쩍 한 걸음 움직여 요한을 가렸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억지로 데려온 거예요.”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상대가 가장 먼저 요한의 정체를 눈치채고 말았다.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요한이 다시 내 옆으로 섰다. 그는 무슨 일이냐 묻듯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촤아아아악.

바닥에서 돋아난 가시덩굴이 요한의 손목을 끊을 듯 거세게 움켜쥐었다.

“전하!”

나는 기겁해서 소리를 질렀다.

요한은 시선을 들어 알렉스를 응시했다. 그 와중에 줄기는 더 단단해졌고 요한의 손목은 으스러지고 있었다.

질겁한 나는 팔목처럼 두툼하게 자란 장미 줄기를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하지 마세요! 풀어 주세요!”

알렉스는 잠시 움찔했지만, 요한과 눈을 마주한 채 계속 제 이능을 유지했다.

이러다가 요한의 손목이 잘릴 것 같았다.

당황한 나는 마족어로 소리쳤다.

“이능을 써요. 어차피 요한이 마족인 걸 알아요!”

짧은 설명에 요한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협박당하고 있는 겁니까?]”

무슨 생각인지 요한은 마족인 걸 들켰다는데도 이능을 쓰지 않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빨리요! 손목 끊어진다고요!”

나는 요한의 다른 팔을 끌어 억지로 덩굴을 쥐게 했다. 그는 그제야 이능을 썼다.

넝쿨 위로 얼음 결정이 맺혔다.

성장을 멈춘 덩굴이 움찔거렸다. 요한의 팔을 따라 생겨 난 얼음은 부피를 넓히며 줄기를 살갗에서 밀어냈다.

나는 바로 요한의 팔을 당겨 덩굴에서 분리했다.

그리고 알렉스를 노려봤다. 머리끝까지 피가 치솟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요한의 팔이 잘렸을 수도 있었다.

나는 분명 요한을 내가 데려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비에른도 요한을 손님으로 대우했다.

그런데도 알렉스는 내 눈앞에서 요한을 공격했다.

대체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 걸까?

시스템이 나를 94위라고 조롱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모욕이었다.

여기서 참는 건 성인군자다.

그리고 난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시덩굴을 움켜쥐었다.

“이번엔 제가 항의서를 보낼 거예요. 전하께서 저를 공격하셨다고요.”

“내가 언제?”

나는 헛웃음을 흘리는 알렉스를 무시하고 얼어붙은 가시에 팔을 그었다.

촤악.

팔뚝에 붉은 선이 생기더니 핏방울이 툭툭 맺혔다.

“공작저의 장미 줄기를 억지로 키워 공격하셨어요.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고 침실로 돌아가던 저를요.”

알렉스가 입을 다문 채 나를 노려봤다. 금안에서 흘러나오는 살기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러나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화가 나서 몸이 떨렸다.

나는 알렉스를 응시한 채 마족어로 요한에게 말했다.

“이능의 흔적을 지워 주세요.”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는 바람이 치맛단을 흔들었다. 요한은 이유를 묻지도 않고 제 이능을 거뒀다.

나는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 바람에 팔을 타고 흐르는 핏줄기가 굵어졌다.

바람이 사라졌을 때, 나는 다시 알렉스에게 말했다.

“전하, 먼 길 오셨으니 항의 서한 내용을 미리 알려 드릴게요.”

알렉스의 시선이 잠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 말에 그가 다시 시선을 들었다.

“전하께서는 항의한 저를 찾아와 이능으로 공격하셨고, 그걸 본 제 호위가 목숨을 걸고 맞서다 다쳤다고 고발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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