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나는 대충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다시 계산대 위에 올려 두었다.
그 짧은 사이에 요한은 티슈를 집었다. 그러고는 내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 줬다.
#다정남의 무시무시한 키워드 위력에 흠칫했다.
요한은 자연스럽게 카운터에 올려 뒀던 상자를 들었다.
“아, 제가 들게요.”
나는 다시 상자를 받으려 손을 뻗었지만, 요한은 말없이 제 손을 뒤로 뺀 채 문을 열었다.
그거 진짜 지금 내가 가져가야 하는데? 하레네랑 마부 아저씨 줘야 한단 말이야.
나는 문을 나오자마자 까치발을 들어 다시 요한에게 귓속말을 했다.
“주세요. 지금 하레네랑 마부 아저씨 드리려고 산 거예요.”
그러자 늘 부드럽게 풀려 있던 요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하레네가 누굽니까?]”
“밖에서는 크게 말하지 마세요. 그러다 들키면 어떡해요!”
나는 다급히 속삭이고 상자를 뺏었다. 그러자 요한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뭐야, 질투하나?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하레네가 누군지 말하는 것보다 보여 주는 게 빠를 거라는 생각에 바로 마차를 가리켰다.
저 사람이라고.
질투할 필요가 전혀 없는 중년의 사용인이라고.
“하레네는 이에테르가 집사예요. 요한이 처음 저택에 찾아왔을 때 안내해 줬던 사람이고요.”
마침 마차 앞에서 대기하던 하레네가 우리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레이디, 이제 나오셨군요.”
하레네가 웃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환히 웃는 하레네를 본 순간, 나는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깨달았다.
하레네의 나이는 40대 중반, 중년의 집사였다.
그러나 이곳은 , 디자인 비용을 절감하려 노화 구현을 과감히 포기한 세계다.
하레네가 집사 특유의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반듯하게 걸어왔다.
올해 예순인 마부 아저씨 또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깊게 팬 셔츠를 걸쳤는데, 그 바람에 탄탄한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절대 60대 노인의 몸이 아니었다.
의 철학, 외모가 개연성.
익숙한 게 가장 무서운 거라고, 어디서든 로맨스 서사가 완성되는 이 극악무도한 캐릭터 디자인을 깜빡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요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하레네가 내 손에 든 상자를 들며 웃었다.
“제가 대신 들어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마부 아저씨랑 같이 드세요.”
나는 눈물을 삼키며 내 실책을 받아들였다.
누가 봐도 잘생긴 고용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귀족 영애잖아.
주변 캐릭터의 외모에 너무 익숙해져서 이게 오해를 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아, 그때 오셨던 용사님이시네요. 제가 안내를…….”
하레네는 요한에게도 인사를 건넸지만, 요한은 말없이 하레네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하레네가 눈치를 보며 내게 붙어 속삭였다.
“……정말 레이디를 구해 주신 분이 맞습니까?”
“네. 좋은 분이신데 피곤해서 그래요.”
나는 요한의 인성을 수습하며 마차로 걸었다.
요한은 마차에 오르지 않고 그 앞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먼저 타라는 뜻 같았다.
하레네에게도 한 번 시선을 주는 걸 보니, 하레네가 나를 올려 줄까 봐 제가 먼저 손을 건넨 듯하다.
순순히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자 무거운 침묵이 시작됐다. 다각거리는 마차 소리만이 고요한 내부를 채웠다.
나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 거 같긴 한데,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창밖을 보던 요한이 이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오해요?]”
“전 맹세코 고용인에게 집적거리는 주인이 아니에요. 나 때문에 밖에 나왔으니까 미안해서…….”
“[데이지.]”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저들에게 마음을 줬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런 거였다면…….]”
요한은 뭔가 말을 하려다 바로 입을 닫았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데이지의 다정함은 잘못이 아닙니다. 불편한 기분을 느끼게 해 미안합니다.]”
요한이 사과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다정하다고?
눈이 흐려졌다.
“다정한 건 요한이지 제가 아니죠.”
요한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는 화제를 바꾸고 싶었는지 다른 질문을 했다.
“[이에테르 저택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아마 10분 정도 걸릴 거예요.”
“[공작은 제가 마족인 걸 압니까?]”
“아뇨. 겨울국 사람이라고 했어요.”
아무리 비에른이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좋은 오빠라도 거기까지 수용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요한이 절 마물한테서 구해 준 얘기를 했더니 은인이라고 바로 요한을 고용하고 방까지 내줬어요. 비에른은 요한을 좋아하니까 편하게 지내요.”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 말도 덧붙였다.
“방에 커튼도 있으니까 낮잠 자기도 편할 거예요.”
요한은 그게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지었다.
“[공작은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비에른을 자랑했다.
“비에른은 제 사촌오빠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완벽한 공작이에요. 일도 완벽하게 하고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많이 가까우신가 봅니다.]”
질투가 아니었다.
그는 입매를 휘고 있었다.
나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요한도 비에른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
비에른은 이미 요한에게 호의적이다. 그가 준비한 방은 손님용으로 쓰는 방 중에서 가장 좋은 방이었다.
비에른은 동생의 면을 살려 줄 줄 아는 좋은 오빠고 귀족이었다.
뿌듯함에 또 입매가 길어진다. 그런 내가 웃긴지 요한이 따라 웃었다.
“왜 웃어요?”
“[데이지의 가족이 좋은 사람이라.]”
그는 입안에서 굴리던 말을 천천히 뱉었다.
“[제가 이곳으로 넘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가족. 기분 탓인지 요한의 표정이 묘하게 어두워졌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닐지 모른다.
사실 늘 궁금했지만, 실례일 것 같아 호기심을 묻어 두고 있었다.
차창으로 들어온 오후 햇살에 침묵이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불편하지 않은 적막에 호기심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곤란하면 답 안 해 주셔도 괜찮아요.”
요한은 무슨 질문인지 들어 보려는 듯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요한은 불의 이능을 썼다.
그리고 불의 이능은 겨울국 황족의 고유 이능이다.
아마도 요한은 겨울국 황족과 마족의 혼혈인 것 같다.
혼혈인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인간과 마족이 적대적이라고 해도 국경이 맞닿아 있으니까 눈이 맞을 수도 있지.
그리고 여긴 로맨스 판타지 세상이니 #혐관 키워드를 고려하면 그런 맛있는 서사가 존재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니 요한의 가족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걸리는 건 겨울국과 마족의 전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겨울국 협회에서 알게 된 ‘전쟁의 이유’가 문제였다.
겨울국 황족과 마족이 ‘출생의 비밀’ 때문에 싸웠다고 했으니까.
혹시 이 전쟁이 요한 때문에 일어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선뜻 물을 수 없었다.
단순한 가정사가 아니라 메인 스토리가 시작된 심각한 역사가 끼어 있으니.
나는 늘 호기심을 누르고 모른 척해 왔다.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 반, 요한의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 반이었다.
요한은 질문해도 되냐고 물어 놓고 조용히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고개를 기울였다.
질문을 재촉하듯.
마지막까지 망설이던 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제 같이 지내야 하니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사계국에서는 내가 요하네스의 보호자잖아.
그래,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대처하려면 미리 알아 둬야 할 거 같아.
긴 망설임 끝에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요한은 겨울국 황족의 혼혈인가요?”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탈할 만큼 빠른 답이었다.
나는 이번에는 조금 쉬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반은 인간인 거네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시 어려운 질문.
“요한은 몇 살이에요?”
요한은 제 나이를 계산하는 모양인지 잠시 눈을 아래로 굴렸다.
“마왕은 영생의 삶을 산다고 들었는데, 마족도 그런지 궁금해서요.”
“[마왕뿐 아니라 마족도 영생을 누립니다. 다만, 음…….]”
요한은 설명하기 복잡한지 잠시 한숨을 삼켰다.
“[인간과 마족은 나이를 계산하는 방법이 달라서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단순하게 질문을 바꿨다.
“인간 기준으로 몇 살이에요?”
“[인간의 기준으로는 23살입니다.]”
“마족의 기준으로는요?”
“[마족은 동면 기간을 나이로 세기 때문에 113살입니다.]”
“90살이나 차이가 나요?”
빠른 년생 정도의 문화적 차이를 생각했던 나는 놀라 움찔했다.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40년과 50년, 두 번 동면했습니다. 동면 중에는 성장을 하지 않으니, 인간은 이를 죽음으로 여기더군요.]”
“그렇군요. 최근엔 50년 동면을 치른 건가요?”
“[네.]”
“깨어난 지 얼마나 된 거예요?”
“15년 정도 됐습니다.”
나는 머릿속으로 요한의 타임라인을 계산했다.
50년 전, 아니 이제 해가 바뀌었으니 51년 전이구나. 51년 전에 겨울국과 마족의 전쟁이 있었다.
당시 요한은 동면 상태였다.
15년 전에 50년 간 이어진 동면에서 깼다면, 65년 전에 동면을 시작했다는 거잖아. 그럼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요한은 동면 중이었네.
계산해 보니 요한은 51년 전에 일어난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찜찜했다.
65년 전에는 겨울국이 마족 지대를 습격했다고 들었는데.
요한은 왜 65년 전에 동면에 든 걸까?
같이 싸우지 않고 왜?
이유를 알 수 없다.
적들이 쳐들어왔는데 자는 건 위험하지 않나?
게다가 요한은 마족의 제1 수호성.
가장 강력한 마족인데 왜 참전해 동족을 돕지 않고 홀로 잠에 든 걸까?
왠지 그 이유는 좋은 이유가 아닐 것 같았다.
여기서 호기심을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완전히 알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진실을 안다고 해도 해결할 능력도 없으면서 나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했다.
“51년 전에 겨울국과 마족의 전쟁이 일어났다고 들었어요.”
요한의 얼굴이 굳어서 움찔했지만, 이미 호기심은 입 밖으로 나온 뒤였다.
“……혹시 요한 때문에 일어난 전쟁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