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네. 장발이 아니라 아쉽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남주가 봄국에 있었으면 제가 모를 리 없거든요. 다른 영애들도 그런 얼굴은 처음 봤다고 하는 걸 보면 외국에서 온 거 같아요.”
나는 내 착각일 거라고 애써 부정하며 물었다.
“그분 봄국에 언제 왔는지 혹시 아세요?”
“음,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어요. 일단 첫 글은 일주일 전에 올라왔던데. 용병소개소에 인력 채용하러 갔던 영애가 우연히 봤다더라고요.”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화이트 골드.
블루 사파이어.
혹시 은발에 푸른 눈이라 그런 이름을 떠올린 걸까?
묻자, 아리나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국에서 온 용병.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남주.
그러나 필담으로는 소통이 가능한 남주.
다리가 덜덜 떨렸다.
“어머, 갑자기 왜 테이블이 떨리지. 지진인가?”
푸른 머리 영애가 테이블을 붙잡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지 영애 왜 그래요?”
“아, 저 오늘 일이 있었는데 깜빡했어요. 다음에 뵐게요.”
미치겠네. 왜 유명해지는 거야!
슬롯에만 담겨도 요한이 마족 지대 남주인 건 보이잖아.
지금은 슬롯 중복이 차단되어 있지만, 시스템이 언제 제멋대로 슬롯 중복을 허용할지 모르는 일이다.
우연히 요한을 슬롯에 추가한 영애가 문의한답시고 커뮤니티에 글이라도 올리면…….
‘백 프로 소문날 거야!’
여주 사이에서 소문이 퍼지면 남주와 다른 캐릭터들 사이에서도 퍼질 가능성이 크다.
사계국에 마족 지대 수호성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정신이 아찔해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밖에 두면 안 돼.
어쩔 수 없다.
공익을 위해 요한은 우리 집에 가둬 둬야겠어.
언제 슬롯 중복 금지가 풀릴지 모르니까 빠르게 가둬 두자.
나는 사심 한 점 없는 이타적인 결심을 한 뒤, 비에른의 허락을 받으러 저택으로 돌아갔다.
***
1층에 카페가 있는 허름한 건물. 여긴 요한이 지내고 있다는 곳이었다.
건물 복도는 창문이 작아 해가 잘 들지 않았다.
환기도 잘 안 되는 모양인지 걸음을 따라 먼지가 일었다.
“콜록콜록.”
심지어 곰팡이 냄새도 난다.
어떻게 이런 데 묵을 생각을 했지?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며 계단을 올랐다. 좁은 복도에 들어서자 바로 문이 보였다. 문을 두드리려던 나는 흠칫했다.
문이 열려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설마 도둑이 들었나?
1층에서 기다리는 하레네를 데려와 같이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금방 그 생각을 치웠다.
만약 정말 도둑이 들었다면 위험한 건 도둑이지 요한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요한이 도둑에게 해코지라도 했다면…….
나는 봄국 황성의 독방에 갇혔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 허름한 공간이 천국으로 느껴질 만한 곳이었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라.
바닥에 시체도 핏자국도 없는 걸 확인하며 조금씩 더 안으로 들어갔다.
비로소 방 전체를 눈에 담았을 때, 안도의 숨이 새나왔다.
침대와 작은 테이블이 있는 단출한 방. 요한은 침대 위에서 손등으로 제 눈을 가린 채 자고 있었다.
“아니, 왜 문을 안 잠그고 자는 거야.”
허탈함에 툴툴거리는 말이 나왔다.
마족 지대는 종족 수가 별로 없어 그런 건지, 아니면 감히 그의 방에 들어오는 자가 없었기에 이런 습관이 생긴 건지 모르겠지만 생활 방식이 안일하기 그지없다.
나는 요한을 보다 눈을 찌푸렸다.
딱 그의 얼굴 위로 강렬한 오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커튼을 쳐 줄 생각으로 시선을 틀어 햇살이 들어온 곳을 찾았다.
방에는 때가 낀 꾀죄죄한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커튼이 달리지 않아 강렬한 봄볕을 고스란히 투과했다.
그게 불편한지 요한은 팔로 눈을 가린 채 자고 있다.
……진짜 열악하네.
착잡한 눈으로 방을 둘러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왜 이 시간에 자고 있는 거지? 잠자리가 바뀌어서 잠을 설쳤나?
자고 있을 줄은 몰랐던지라 난감했다.
카페에 내려가서 시간을 때우고 있어야 하나 고민하다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시야가 낮아지니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나무 천장에 그을음처럼 푸른 얼룩이 져 있었다.
곰팡이인가?
습기에 천장이 울퉁불퉁 부푼 걸 보니 이 건물은 비가 새는 모양이었다.
디자인팀이 디테일 한 건 알았지만, 이런 남루한 숙소까지 세세하게 그릴 건 뭐란 말인지.
#피폐물 #도망여주들이 이런 곳에서 은신하다가 저택으로 돌아가는 건가?
그 허름한 방에 어울리지 않는 요한을 보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찜찜했다.
이 집은 요한이 지내던 성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대체 왜 그 커다란 성을 버리고 나와서 이 고생인지 모르겠다.
침대와 협탁, 작은 의자. 이 최소한의 가구마저도 감당하기 버거워하는 좁은 방.
소박한 가구들을 훑어보던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불의 이능 부산물을 팔았다면서 왜 이런 데서 묶는 거지? 사기라도 당한 건가?
나는 요한이 책상 위에 늘어 둔 짐을 쳐다봤다.
손바닥만 한 단도, 금화와 동화 몇 개, 내가 돌려준 로브와 신분증이 있다.
신분증에 적힌 출신 국가를 보니 요한이 사계국으로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리고 이 상황은 전부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도 선명히 와닿았다.
내가 그날 요한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요한은 사계국으로 오지 않았을 거다.
요한이 이 열악한 환경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건 전부 내 탓이었다.
나는 내 입을 소리 나지 않게 허공에서 몇 번 때렸다.
왜 #후회남주도 아닌 내가 지옥의 주둥아리를 가졌는지 모르겠다.
사계국에서 얼마나 지낼지는 모르지만, 일단 내 은인을 이런 곳에서 지내게 할 수 없었다.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정신을 다잡았다.
비에른이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겨울국에 탐사하러 갔을 때,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라고 말하니 비에른은 기꺼이 요한에게 호위 기사 자리를 내주고 집에 손님방까지 준비해 줬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다.
비에른은 심지어 알렉스에게 이에테르가 인장을 찍은 공식 항의서도 보냈다.
마물에 습격당한 나를 요한이 도와줬다고 말했더니, 그는 내가 토벌에 참석하게 된 원흉인 알렉스에게 분노했다.
어제 열심히 말리긴 했지만, 아침에 말하는 걸 보니 이미 항의서를 보낸 것 같았다.
그래도 비에른은 점잖은 귀족이니까 선을 넘지는 않았을 거다.
만약에 선을 넘었다면…….
“하.”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잠시 손바닥에 얼굴을 대고 숨을 고르는데 포근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내 소리는 아니었다.
손가락을 살짝 벌리니 고르게 움직이는 몸이 보였다.
요한의 숨소리였다.
나는 불편하게 잠든 요한을 보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빨리 집으로 데려가서 편히 자게 해 주고 싶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깨워야 할지 막막했다.
마왕 보니까 혼자 잠 설치다 사계국을 얼리겠다고 중얼대던데 갑자기 놀라서 얼음이나 불을 쓰면 어떡하지?
요한은 그런 마족이 아닐 거라 믿지만, 며칠 전 온실에서 본 모습이 충격적이라 조금 겁이 났다.
안전은 중요하니까.
혹시 모르니 나는 멀리서 요한을 불러 깨울 생각으로 슬쩍 침대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끼릭.
낡은 침대 스프링이 출렁이는 바람에 무게 중심이 뒤틀렸다.
“아!”
바닥으로 튕겨 나가듯 몸이 뒤로 휘청였다. 그런데 바닥으로 기울던 몸이 확 침대로 끌려갔다.
내 반사 신경 덕은 아니었다. 내게 그런 우월한 신체 능력은 없었다.
팽팽히 늘어난 팔 끝에 붙은 커다란 손이 보였다.
요한이 내 팔목을 잡고 있었다. 여전히 손등으로 제 눈을 가린 채.
안 자고 있었나?
민망함이 머릿속에서 부피를 키워 갔다.
요한이 눈을 가리던 손을 치우며 자연스럽게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역시 자고 있던 게 아닌지 눈빛이 깨끗하다.
나는 입을 뻐끔거리다 물었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
요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나 혼잣말 안 했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들어와서 깨우지도 않고 옆에 앉아서 몇 분이나 있었잖아. 자는 사람이나 훔쳐보고.
당황한 탓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폭주하는 생각이 밖으로 나오지 않게 입술을 꾹 다문 채 진정하려 애썼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조용한 방이 더 고요해졌다. 두툼한 유리창 너머로 에즈히나 거리 특유의 에너지 넘치는 소음이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요한이 몸을 일으켰다.
금빛 물감을 바른 것처럼 나무 벽으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영역으로 들어간 요한도 햇빛에 젖기 시작했다.
그는 나른한 숨을 내쉬며 목을 돌렸다.
나는 내 앞에서 멈춘 햇볕을 응시하다, 그 사이를 부유하는 금가루 같은 먼지를 보다, 다시 힐끔 요한을 쳐다봤다.
그러나 마주한 시선이 간지러워서 오래 눈을 둘 수 없었다.
취향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인가. 방금 잠에서 깬 취향 남주와 눈을 마주하는 게 어려웠다.
조용한 분위기가 부담스러워진 나는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이 시간에 자고 있어요?”
“[날이 따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계속 잠이 오네요.]”
춘곤증인가?
그러고 보니 요한은 평생을 겨울 속에서 살았다.
갑자기 환경이 바뀌면 적응하기 힘들 만하지.
나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요한은 봄 날씨를 처음 겪을 거다. 그러니 동면에서 깬 동물처럼 환경에 적응한다고 면역력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건강에 생각이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어나요. 우리 집으로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