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하레네는 정말 내가 사고를 친 거라 생각했는지, 몰래 만날 수 있도록 용병을 응접실이 아닌 온실로 안내해 뒀다.
“헉헉, 아가씨 체력이 참 좋으시네요. 저는 앞에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시면 말씀해 주세요.”
나를 따라 달려온 하레네가 숨을 몰아쉬며 온실 문을 열어 주었다.
용병이 나를 해코지할까 걱정할 만도 한데, 단둘이 있게 두는 걸 보면 이 사람이 나를 어지간히 높게 보고 있구나 싶었다.
나는 그런 치명적인 능력 여주가 아닌데.
보통 위험한 남주랑 무능력 여주랑 둘이 붙여 두면 여주는 #피폐물 직행이라고.
나는 하레네의 안목에 대한 신뢰감을 덜어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찰칵.
문이 닫히자 사위가 고요해졌다.
세상과 단절된 온실 특유의 적막이 살갗을 감쌌다.
기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수목원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인공 개천을 넘어가 발처럼 길게 늘어진 느티나무 잎사귀를 거두자 시야가 환히 트였다.
유리 천장에서 오후 햇살이 금빛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와 다양한 색의 꽃들이 그 햇살에 반짝였다.
나는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지금은 움직임을 멈춘 분수대가 보였다.
그 분수대 옆에 선 인영도.
폭우처럼 쏟아진 햇살에 흠뻑 젖은 은빛 생명체가 지루한 눈으로 나무를 보고 있었다.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따사로운 봄볕에 둘러싸인 눈사람을 보는 기분이었다. 기적 같기도 하고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해서 현실감이 없었다.
반가움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느려진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거대한 나무 기둥 사이로 요한의 인형이 모습을 감추었다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그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득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요한이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손을 들었다.
그는 열 손가락을 펴 보이더니 새끼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열 번은 채울 줄 알았는데, 9번 만에 사계국으로 넘어왔습니다.]”
경계를 빨리 벗어난 게 어지간히 뿌듯한 듯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마족과 인간의 사이가 어떤지 알 텐데 요한은 긴장감이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일이 있어서 사계국에 온 김에 들른 걸까?
그럴 리가 없지.
요한은 시즌 2 남주인데 사계국에 올 전개가 내장되어 있을 리가.
정말 나 때문에 온 건가?
나는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사계국에는 무슨 일로 왔어요?”
그런데 정말로 요한의 답은 나를 향했다.
“[전에 사계국에 오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는 맑은 눈동자로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과거를 꿰뚫어 보는 청명한 시선이었다. 그 탓에 기억이 나고 말았다.
처음 사계국으로 돌아오던 날, 요한에게 사계국으로 올 생각이 없냐고 묻던 내가.
오면 좋은 데 많이 데려가 주겠다며 허언을 떨던 가벼운 입도 기억났다.
이래서 사람은 말을 함부로 뱉으면 안 된다.
요한을 책임지는 게 부담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숨겨진 계좌를 찾았으니 친구 하나쯤이야 평생 놀고먹을 수 있게 지원해 줄 수 있고, 비에른에게 부탁해 방을 내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다만, 그건 요한이 사계국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주변을 살폈다.
요한의 정체를 누군가 알게 되면 큰일이었다.
나도 마족 지대에 넘어간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랐다.
요한은 마족의 제1의 수호성. 가장 서열이 높은 마족이었다.
그는 그의 세계에서 인간인 나를 지켜 줄 수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고작해야 명필, 번역 버프가 있는 최약체 94위 여주.
혹시라도 요한이 마족인 게 발각된다면 나는 요한을 지켜 줄 능력이 없었다.
뱉어 놓은 말이 있어 민망하지만, 사실대로 말해야 했다.
남의 목숨을 두고 자존심 세울 수는 없잖아.
“제가 요한을 초대한 적이 있어서 이렇게 말하는 게 민망한데요.”
나는 최대한 천천히 말하며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을 골랐다.
“혹시라도 누군가 요한이 마족인 걸 알게 되면 위험해질 거예요.”
나는 요한에게 사계국이 마족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내가 왜 그를 지켜 줄 수 없는지 설명했다.
“제가 요한을 지켜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저는 요한을 지켜 줄 수 없어요. 저는 힘도 없고 사회적 지위가 높지도 않거든요…….”
나는 어렵게 내 무능을 털어놓으며 그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리고 그가 다치길 원치 않는다는 내 진심도 덧붙였다.
한때 그렇게 보고 싶어 했지만 내 손으로 다시 그를 되돌려 보내야 하는 상황이 착잡했다.
적응됐다 생각했던 내 무능함이 다시금 원망스러워졌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요한을 바라보았다.
요한은 조금 놀란 듯했다.
겁을 먹거나 내게 실망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내가 이 세계관 속 최약체인 걸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자존심 상하네.
그렇게 투명한 눈으로 내 무능을 스캔할 건 없잖아요.
나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했다.
“어쨌든 제 말은 사계국은 요한에게 위험하다는 거예요.”
자존심이 상한 나는 괜히 허세를 부리며 하루 관광을 타협안으로 제시했다.
“뭐, 그래도 이왕 사계국에 왔으니까 하루 정도는 괜찮겠죠. 내일은 제가 가이드를 해 줄게요. 대신 내일 황도를 둘러보고 나면 바로 마족 지대로 돌아가는 거예요?”
하루 정도는 나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걸리면 어디 잡혀 들어가기 전에 스크롤 찢어서 도망가면 되니까.
그래, 하루 정도야 뭐.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내가 뱉은 말도 있으니 나는 요한에게 당일치기 관광을 제안했다.
솔직히 나도 요한을 떠밀 듯 바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요한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곧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데이지.]”
“네.”
“[사실 사계국에 온 지 일주일 정도 됐습니다.]”
“……일주일이요?”
요한의 등장에 충격을 받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는데, 이제야 그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왔다.
튜닉형 셔츠와 그의 어깨와 가슴을 감싼 가죽 하네스. 그리고 허리춤에 꽂힌 작은 단도가 보였다.
그제야 하레네의 말이 떠올랐다.
용병이 찾아왔다던 그 말.
“설마 용병으로 취직했어요?”
용병 시장은 실력만 있으면 과거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인력시장이었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루 일을 하긴 했습니다. 용병으로 등록하려면 최소 하루는 일해야 한다기에 어쩔 수 없었죠.]”
“왜 용병 등록을 해야 해요?”
“[책에서 읽기로 사계국은 신분이 없는 자도 길드에 소속되면 길드에서 신분을 보증하는 증서를 준다고 봤거든요.]”
요한은 제 도서관에서 봤던 책으로 사계국 문화를 파악한 모양이다.
그는 뒷주머니에서 나무패를 꺼내 보여 줬다.
웰컴 길드 소속 신분증이었다.
웰컴 길드라니.
작명 대충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봄국 불어 사용권이라면서 길드명은 영어냐고.
고개를 젓던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 토종 회사들도 영어 이름이 많잖아. 심지어 이 게임을 만든 K-웹소설 플랫폼도 영어 이름이야.
하긴, 이건 K-로판이니 한국 문화가 녹아들 수밖에 없지.
그래도 ‘웰컴’은 좀 거부감이 든다. 길드에서 대부업 느낌이 나는 건 내 기분 탓인가.
요한의 착장을 다시 보니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야. 기분 탓이 아닌 거 같아.
일주일 만에 지낼 곳을 구하고 비싼 가죽옷과 무기를 살 정도면,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주는 거야?
숨길 수 없는 불법 길드의 느낌이 난다.
나는 일단 모른 척 요한을 떠봤다.
“용병 수입으로 집도 사고 옷도 사고 그런 거예요?”
“[아뇨. 생각보다 용병 보수가 적더라고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 다행이 아니잖아.
그럼 그 돈은 어디서 난 건데?
“그러면 돈은 어떻게 구한 거예요.”
요한은 대답 대신 눈웃음을 짓더니 제 손바닥에 불을 피웠다.
“[책에서 말한 것과 실제 물가가 많이 다르더군요. 불의 이능 부산물이 제 생각보다 더 비싸게 팔린 덕분에 정착금을 구하기 쉬웠습니다.]”
어쩐지 표정이 여유롭더라.
불의 이능이라면 일주일 만에 정착금을 번 게 납득이 된다.
불의 이능의 부산물은 그 어떤 이능의 부산물보다도 수요가 많았다.
가로등이나 등대처럼 국가에서 구매하는 경우도 있고,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주인이나 밤새 서류 작업하는 가주들이 제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해 탐내기도 했다.
그러나 겨울국 황족이 전멸한 탓에 구하기 힘들어 그 가격이 엄청났다.
중고가 중고가 아니었다.
가지고만 있어도 가격이 치솟는 탓에 투자 차원에서 품고만 있어도 좋은 물건이었다.
근데 이쯤에서 의문이 생겼다.
“아니, 불의 이능 부산물을 파셨으면 이제 용병 일은 그만둬도 되지 않아요……?”
촛불 정도의 작은 불만 팔아도 엄청나게 벌었을 텐데.
내 물음에 요한은 처음 보여 줬던 길드 소속 신분증을 내게 더 가까이 내밀었다.
나는 신분증에 적혀 있는 작은 글자들을 살펴보았다.
출신은 겨울국, 이름은 간 크게도 본명 ‘요하네스 히엠 실렌티아’를 썼다.
“[사계국에서 계속 지내려면 신분이 필요하니까요.]”
요한은 신분증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사실은 조금 더 제대로 정착을 한 뒤에 찾아오고 싶었는데, 이에테르가에서 호위 기사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오게 됐습니다.]”
“제 호위 기사로 지원하시려고요?”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입을 벙긋거리다 인상을 썼다.
“아, 안 돼요! 그……. 아! 비에른은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용병을 고용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데이지에게 부탁을 하려고요.]”
“안 돼요!”
나는 바로 거절했다.
“말했잖아요. 사계국은 요한한테 위험해요. 그리고 특히나 저는…….”
나는 마왕을 죽이는 게 목적인 토벌단과 엮여 있다.
이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마왕은 요한의 주군이니까.
미치겠네.
이러다 엘런이나 알렉스가 요한에 대해 알게 된다면…….
요한에게 지금 내 상황을 설명하기 망설여졌지만, 그럼에도 알려 줘야 했다.
요한은 내가 경계에 갇혔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도 그 위험을 무릅쓰고 왔다. 내 경솔한 초대 때문에.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몰라 무섭긴 하지만, 요한은 왜 내 옆에 있는 게 위험한지 그 이유를 공유받을 자격이 있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에 힘을 주어 입을 열었다.
“몇 달 전에 사계국에 예언이 내려왔어요. 마왕이 사계국을 얼려 인류가 멸망하게 된다는 예언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