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나는 기겁해서 주변을 살피다 얼른 그쪽으로 갔다.
“아니, 왜 여기 계세요?”
차마 황녀라고 부르지도 못했다.
혹시라도 주변에서 들을까 봐.
라리사가 히죽거리며 내게 속삭였다.
“우리 로잘린느 영애가 드디어 공작한테서 도망쳤다길래 지금 황궁에 숨겨 주고 있거든요. 황도 온 김에 거리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같이 나왔어요.”
로잘린느?
들어 본 거 같은데.
옆에 서 있던 영애가 수줍게 모자를 들어 얼굴을 보이고는 가볍게 묵례했다.
“아아! 영애!”
내 첫 로판 소설의 여주였다. 공작의 #첫사랑이자 #도망여주!
“드디어 도망과 추적 전개인가요? 영애네 공작님 완전 집착 끝판왕이던데 이 주변에 있는 거 아니에요?”
나는 내가 더 긴장해서 경계심을 바짝 세웠다.
그러자 여유로운 얼굴로 라리사가 살랑살랑 스크롤을 흔들었다.
“주변에 있어도 지가 어쩔 거야? 황궁에 막 들어올 거야?”
하긴, 봄국 황제 성격이 좀 지랄 맞나. 납득한 나는 곧 더 큰 이질감을 느꼈다.
“아니, 영애 가족들은 영애가 나온 거 알아요? 이거 난리 나는 거 아니에요?”
“다들 바빠서 괜찮아요. 아빠는 신년제 준비로 바쁘고, 오빠는 약혼녀가 파혼하자는 거 말리느라 바쁘거든요. 신하들은 지금 제가 로잘린느 영애 방에서 놀고 있는 줄 알고요.”
그때, 로잘린느가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저희 어디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아무래도 도망치는 중이다 보니 거리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했다.
“아 네네! 저 자주 가는 카페 있는데 거기로 가요.”
“귀족 영애가 있으니까 편하네. 안내해 주세요!”
“네, 이쪽으로 가요.”
나는 그들을 카페로 안내했다.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로잘린느가 물었다.
“그나저나 거리가 정말 한산하네요.”
“그러니까요. 카페에도 사람이 없어.”
거리에는 귀족 여주들뿐 아니라 평민 여주들도 없었다. 심지어 몇몇 가게는 아예 문을 닫기도 했다.
“아무래도 신년제 때문인 것 같죠?”
“하긴 시스템이 가을국에 여행 갈 서사를 떠먹여 줬는데 다들 준비하느라 바쁘겠죠.”
가을국에서 3국 연합 신년제를 주최하겠다고 공표한 뒤, 봄국 영애들은 신년제 검투 대회 참가 의지를 불태웠다.
1차 중간 랭킹 평가와 리안 영애 사건 이후, 많은 영애가 남주 선택을 마친지라 그들은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 여겼다. 여긴 ‘남주 네버 다이’ 법칙이 있으니까.
미선택 남주를 참가시키는 영애들은 아마 예선 통과도 못 할 거다.
황녀 영애는 애초에 캐시 부자다 보니 가을국 검투 대회에 관심이 없었고, 로잘린느 영애는 작년에 그녀의 남편인 공작이 우승해서 참가가 불가능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매우 여유로웠다.
“아, 우유 좀 그만 먹고 싶다.”
라리사는 매끈한 유리병을 만지며 울상을 지었다.
로잘린느는 청순한 눈빛을 보내며 라리사의 등을 토닥였다.
“많이 먹어야 빨리 자라죠.”
“시간이 흘러야 자라는 거죠.”
라리사는 심통 난 얼굴로 로잘린느의 위로를 거부했다.
나는 라리사의 앞접시에 쿠키를 놔 주었다.
“그래도 카페인은 안 돼요. 대신 쿠키라도 먹어요.”
“미성년자 여주로 산다는 건 괴로운 일이었어요. 이걸 알았으면 육아물 빙의는 피했을 텐데.”
그녀는 늦은 후회를 하며 쿠키를 와작 씹었다. 통통한 볼이 그 반동에 씰룩였다.
아아, 볼살 움켜쥐고 싶다.
나는 꼼틀대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촉각 탐지 욕구를 눌렀다.
“그나저나 확실히 시스템이 개입한 뒤로 영애들 몰입도가 높아졌어요.”
로잘린느는 한산한 거리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요. 다들 여유를 잃었어.”
라리사가 혀를 차며 거들었다.
나도 다시 거리 밖을 쳐다봤다.
한산한 거리를 보니 조급해졌다. 뒤처진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나도 슬슬 [전]에 진입해야 하는데.
……그냥 엘런을 선택할까?
선택하면 남주는 안 죽으니까, 엘런도 무조건 토벌에서 살아 돌아올 텐데.
하지만 그랬다가는 엘런의 시나리오에 휩쓸려 내가 토벌에 끌려갈 수도 있다.
여주는 ‘여주 네버 다이’ 법칙 없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노려봤다.
가뜩이나 툭하면 내게 ‘로그아웃’을 권하는 놈들인데, 마왕과 조우하면 옳다구나 하고 죽일지도 모른다.
“으으.”
나는 복잡한 머리를 어찌하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뭐야, 영애 무슨 일 있어요?”
라리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살폈다.
“우리 뉴비 영애가 한숨이라니. 뭐예요. 전개 꼬였어요? 내가 아이템 하나 줄까요?”
황녀다운 자애로운 대사에 감동했다. 나는 뭉클한 마음을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개가 꼬인 건 아니고…….”
나는 망설이다 솔직히 말했다.
“저 남주를 선택하려고요.”
그 말에 두 영애가 찻잔을 내려 두었다.
갑자기 봄국의 따뜻하던 공기가 싸늘해졌다. 두 영애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한 탓이다.
로잘린느가 진지하게 물었다.
“잘생겼나요?”
그에 나는 시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라리사도 우유 잔을 매만지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영애 취향이면…… 은발 벽안?”
나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흑발 적안이에요.”
디저트 카페에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마주한 두 영애가 내게 무언가를 더 요구하듯, 테이블에 몸을 바짝 붙였다.
미취학 아동의 치명적인 비율을 뽐내며 라리사가 허공에 뜬 다리를 힘겹게 꼬았다.
“나이는요?”
“저보다 다섯 살 많아요.”
이번엔 로잘린느가 눈을 반짝였다.
“뭐 하는 사람인가요?”
뭐 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햐지?
엘런의 직업과 역할을 고민하던 나는 그럴듯한 프로필을 말해 줬다.
“북부 대공이요.”
[쿵]
뭐야, 이거.
분명 효과음이 들렸다.
흠칫한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라리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며칠 전 남주 인기투표 2위를 차지한 그분 말하는 거죠?”
최근 남주 선택 러시가 일면서, 영애들이 커뮤에서 S급 남주를 찾자며 집단 지성을 모았다.
아무리 남주 교환권을 쓰고 새로운 남주를 선택해도 S급 남주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기가 생겼는지 S급 남주가 누군지 얼굴이라도 보고 [결]을 쳐야겠다며 커뮤니티에 불만을 토로했다.
일시적 동맹을 맺은 유저들은 남주의 외모와 직업 등의 요소로 남주의 순위를 매겼다. 엘런은 그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다.
로잘린느가 허공을 보다 입을 열었다.
“짐승 같은 외모에 그렇지 못한 다정함, 북부 대공 엘런 카이엘드?”
항마력 달리는 첨언에 움찔했지만, 커뮤니티 AI 연동창에 뜬 정보를 읊은 거겠거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만난 건가요?”
로잘린느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제 저와 결혼해 준다고 찾아왔어요. 제 오랜 짝사랑을 끝내 주겠다면서…….”
내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하자, 두 영애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들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맞아요. 제게 #착각계 키워드가 있어요.”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힘든 키워드를 부여받은 내 처지를 딱하게 보는 듯했다.
하지만 난 슬프지 않았다.
나는 창밖의 거리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 거리의 건물들을 제게 주겠대요.”
“에즈히나 거리인데요?”
“네. 결혼 선물로 주겠다고 하셨어요.”
두 영애의 눈이 동그래졌다. 뭘 망설이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엘런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 말을 하려니 목이 탔다.
“그런데 경험이 없으시대요.”
“…….”
“제 만족을 위해 열심히 공부할 테니 방법을 알려 달라시는데…… 하, 뭐라 해야 할지.”
“혹시…….”
“맞아요. #동정남 키워드를 가지고 있어요.”
끼이익.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로잘린느와 라리사가 동시에 일어난 탓이다.
두 영애는 북쪽 수장이 생각나는 다부진 얼굴로 내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고막을 휘갈기는 그 청명한 소리에 당황하는데, 라리사가 깡충깡충 뛰었다.
“확실해! 우리 데이지 영애가 S급 히든 남주를 주웠어!”
정말 엘런이 S급 남주일까?
나는 한숨을 삼켰다.
이 X 같은 빙의 듀스에 빙의한 지 세 달.
어쩌다 S급 히든 남주를 주운 듯하다.
다시 자리에 앉으며 로잘린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동정남이어도 그 이후 일은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동정남 키워드 좋아해서 많이 읽었는데 보통…….”
[19금 필터링]
갑자기 필터링 알람이 뜨며 로잘린느의 목소리가 차단됐다.
블라인드 처리됐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로잘린느가 당황하는 새 라리사가 물었다.
“그럼 전에 황성에 데려온 황태자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머, 황태자도 영애 남주예요? 남주 인기투표에서 1위 한 남주 맞죠?”
필터링이 끝나자 로잘린느가 바로 물었다. 라리사가 키득거리며 솜뭉치 같은 작은 손에 턱을 괬다.
“맞아요. 우리 데이지 영애 남주복 좋다니까?”
“대체 그 남주들은 어떻게 만난 거예요?”
이어지는 질문 세례에 나는 몇 시간 동안 카페에 붙잡혔다.
***
결국 나는 용병소개소에 가지 못했다.
영애들과 헤어진 후 바로 이에테르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기지개를 켜며 복도를 걸었다.
내일은 꼭 가야지.
라리사와 로잘린느를 만나고 나니 용병이 더 간절해졌다.
엘런이랑 알렉스는 절대 기사로 세우면 안 되겠어. 일면식 없는 유저도 이렇게 관심이 많은데.
엘런과 알렉스는 이 세계에서 너무나 유명한 남주였다. 그만큼 주변 인물이 많이 얽혀 있었다.
2주 전쯤 엘런의 청으로 그의 가신들 앞에서 연인인 척해 줬는데, 그 여파가 엄청났다.
봄국 영애들과 카페에서 만나고 있으면 이름 모를 남자들이 와서 내게 인사를 하고 갔다.
그들은 카이엘드가의 가신들이었다.
모솔 가주님이 처음 연애를 한다는 소식에 카이엘드가가 뒤집어진 모양이었다.
그저 손수건 하나를 줬을 뿐인데 나는 그들에게 예비 공작부인 취급을 받았다.
알렉스는 더 하겠지. 최소한 가을국 제국민은 전부 간섭하려 들 거야.
익숙하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던 나는 피해 의식에 빠졌다.
나 혹시 #개그물 여주인가?
왜 나랑 엮인 남주들은 다 핀트가 나가 있지?
나는 찜찜한 눈으로 복도 창밖을 쳐다봤다.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한 예쁜 정원과 푸른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맑은 하늘을 보며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시스템 놈 생각해 보면 처음에도 보상이라고 하면서 이상한 사건을 줬어. 마왕의 수면 스케줄을 공유하면서 남주랑 첫 만남 시작한 여주는 듣도 보도 못 했다고.
나는 어두워진 시선을 조금 더 높이 들어 올렸다.
‘시스템 씨, 나도 예쁜 감정선 좀 주세요.’
하지만 시스템이 그럴 리 없지.
시스템이 내게 호의적으로 나오길 바랄 바엔 에서 랭킹 1위 하는 걸 바라는 게 더 희망적이다.
욕심을 비워 내고 복도를 걷는데, 내 방문 앞에 서 있는 하레네가 보였다.
“오, 아가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하레네가 주변을 살피며 내게 귓속말을 했다.
“혹시 용병소개소에 다녀오신 적이 있습니까?”
“네?”
입구까지 가긴 했다만, 건물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하레네는 주저하다 목소리를 더 작게 낮추었다.
“어떤 용병이 아가씨와 아는 사이라며 찾아왔습니다.”
“잘못 찾아온 거 아닐까요?”
“그…… 레이디께서 이에테르가의 데이지를 찾으면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걱정 가득한 하레네의 얼굴을 보며 그가 몰래 날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두 번의 외박이 여기까지 소문이 난 듯하다.
아니면 비에른이 외박이 잦으니 나를 잘 감시하라고 하레네에게 일러둔 건가.
밤에 몰래 집을 나가는 아가씨한테 웬 용병이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고 찾아왔으니 하레네가 긴장할 만했다.
어떤 용병이신지 모르지만, 타이밍 한번 참 기가 막혔다.
내가 뒤에서 뭔가 일을 꾸민다고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 익명의 용병이 아는 사이라며 찾아오다니.
암살이라도 꾸미고 있는 거 같잖아.
나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레네. 무슨 생각을 하든 지금 하는 생각은 오해예요. 나는 나쁜 짓을 꾸미고 있지 않아요.”
“아가씨가 나쁜 짓을 꾸민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아가씨가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셨다면 죽일 놈이겠죠.”
아니라고. 그런 계획을 세우기에 나는 게으른 사람이라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다 방문을 열었다.
“돌려보내세요. 뭔가 착오가 있는 걸 거예요.”
버그가 하루 이틀인가.
여주를 헷갈린 남주를 돌려보내고 쉬려는데 하레네가 내 방문을 덜컥 잡았다.
“그…… 혹시 자길 모른다고 하시면 이걸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레네가 불쑥 종이를 내밀었다.
나는 쪽지를 받으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밀지?
컨셉충 남주인가?
쪽지를 펴는데 하레네가 머쓱하게 말했다.
“말을 못 하더라고요. 들리지도 않는 모양인데 필담은 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그 말에 손이 멈추었다. 나는 다시 빠르게 종이를 펼쳤다.
그 안에는 장난 같은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저는 9번 만에 경계를 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