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글쎄요. 가기 귀찮은데요.”
나도 모르게 진심을 말했다가 움찔했다.
아니, 이런 화원을 선물받고 대답이 왜 이 모양이야?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되지!
나는 얼른 귀찮음 가득했던 말투를 수습했다.
“요즘 교류하는 영애들이 가을국 검투 대회에 참석하거든요. 매일 봄국 예선전 얘기만 하는데, 파트너를 구했다느니, 못 구했다느니, 들어 보니까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더라고요. 어후, 말만 들어도 귀찮던데, 전 못 갈 거 같아요.”
비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는 내 퉁명스러운 말투에 상처받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비에른은 넘어간 게 아니라 내 말에서 뭔가를 캐치해서 고개를 끄덕인 모양이었다.
“역시 아직도 파트너를 구하지 못했구나. 황태자의 말이 맞았군.”
“황태자님과 만나셨어요?”
“아니, 어제 내게 서신을 보냈거든.”
알렉스가 나 말고 비에른에게도 편지를 보낸 모양이었다.
불길하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네 덕분에 탐사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가을국 황제께서 널 궁금해한다고 하더라.”
궁금해하지 마.
가을국 황실은 적자생존을 통해 살아남은 단 한 명의 강자가 적통을 이었다.
그런 황실의 황제라니.
알렉스를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상상됐다.
“주최국인 가을국에서 타국 귀족까지 챙기는 모양이더라고. 가을국 황실에서 우리도 참석하길 바란다고 이에테르가를 공식적으로 초대했어.”
“그렇군요.”
“황실에서 이렇게 예의를 갖췄으니 우리도 그들 전통에 맞춰 줘야 할 것 같고.”
“그렇죠.”
“가을국 신년제 행사 중에 가장 무난한 게 검투 대회니, 이에테르가는 검투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검투 대회는 보통 가문을 대표하는 검사가 나간다고 들었는데, 저희 가문은 누가 참가하나요?”
“그게 문제인데.”
돌연 비에른이 표정을 찌푸려졌다.
“황태자가 이에테르가를 대표해 네가 참석하길 바란다고 편지를 보냈어.”
미쳤나?
내가 어떻게 검을 들어? 알렉스 이 자식 또 무슨 생각이야.
“재밌지 않니? 나를 두고 굳이 황실에서 너를 찍어 검투 대회 참석을 부탁하는 게.”
헛웃음을 흘리는 비에른과 달리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혹시 가을국 황실에서 나와 알렉스 사이에 뭔가 있다고 오해하고 날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 걸까?
네가 감히 우리 아들을 만나?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돈 봉투를 먼저 건네는 것 같던데 가을국 황실은 목부터 따 버리는 건가.
슬픈 마음을 다독이는데 비에른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스가 네 대신 기사로 참석하고 싶은 모양이야.”
……왜?
“3국 황제가 모두 모이는 자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 걸 보니, 이미 가을국 황제와도 이야기가 끝난 것 같고.”
비에른이 아까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우리에게 청혼서를 보내려는 모양이지.”
나는 입을 벌렸다.
그리고 부정했다.
“계절이 국경을 나눈 지엄한 세상인데 국제결혼에 대한 제재 같은 거 없나요? 아니, 잠깐만요. 오라버니가 너무 나가신 거 아닐까요? 무슨 검투 대회 대신 나가 주는 거로 청혼을 말하세요?”
“사실 나도 황태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보통 레이디 대신 기사로 참석하는 건, 가족이나 연인들이 영광을 선물하고자 하는 일인데 말이지.”
정말 단순하게 생각하면, 알렉스는 지금 날 좋아하니까 별 뜻 없이 저지른 짓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황제한테 허락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토벌을 앞두고 있으니까 아들한테 져 주는 모션을 취한 게 아닐까?
여기서 눈치 없이 전 대륙 사람 앞에서 알렉스를 내 기사로 써먹고 미래의 황태자비로 눈도장을 찍으면…….
알렉스 토벌 갔을 때, 황제가 몰래 날 죽일 수도 있겠어.
현재 대륙에서 유일하게 이능을 보유한 황실이라 가을국 황실은 제 족보에 프라이드가 강했다. 그런데 한낱 외국인 하급 귀족 영애를 가족으로 맞이할 리가 없다.
소름이 쫙 돋았다.
“아무래도 부담스럽네요. 거절해야겠어요.”
다행히 비에른도 그럴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참석은 하겠지만, 너를 위한 기사는 이에테르가에서 찾을 거라고 회신했다.”
역시, 나의 빛 비에른!
공작 인플레이션 속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일 잘하는 공작!
이 세계의 진정한 공작님!
후광에 눈이 부셔 나는 손으로 잠시 눈을 가렸다가 내렸다.
비에른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팔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뜻이었다.
존경하는 눈빛을 담아 그를 올려다보며 팔에 손을 올렸다.
그는 화원을 걸으며 제 계획을 알려 주었다.
“검을 내려 둔 지 몇 년 됐지만, 아카데미 재학 시절에는 늘 3등 안에 들었지. 그러니 걱정하지 마.”
“오라버니가 제 기사가 되어 주시려고요?”
“가문 내에서 나서는 게 가장 일반적이니까. 혼담이 오가는 집안이 있는 게 아닌 이상. 그리고 이에테르가에서는 내가 검을 가장 잘 다루니 내가 나가는 게 맞아.”
비에른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너의 기사로 참석하는 거니 상품은 네게 주마.”
비에른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좀 걱정이 됐다.
남주가 가득한 세상.
영애들을 위해 싸울 선택 남주가 줄을 선 세계였다.
그렇다 보니 ‘남주 네버 다이’ 법칙이 걱정됐다.
선택된 남주는 절대 지지 않을 텐데 비에른은 괜찮을까.
아니다. 지면 어때?
나는 경품에 욕심이 없었다.
검투 대회는 가을국 축제 중 유저의 참여울이 가장 높은 축제였다. 가을국에서 열리는 시스템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TOP 5명에게 캐시를 주는 일종의 로또였다.
원래도 참석률이 높았는데 올해는 3국 연합으로 진행하는 덕에, 전 대륙 영애들이 참석할 수 있게 됐으니 경쟁률이 더 높아졌다.
요즘 영애들이 만나면 가을국 검투 대회 얘기만 하던데, 나도 이제 그 대화에 끼게 생겼다.
이렇게 가을국도 가 보게 되는 건가?
신기했다. 나는 늦게 타임라인을 시작했는데도 봄, 여름, 겨울, 마족 지대 그리고 가을의 나라까지 가 보게 됐다.
역마살이 끼었나.
집순이가 왜 세계여행을 하고 있어.
흐린 눈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시스템 씨, 자꾸 이따위로 캐해 대충할 거예요?
아니, 아무리 지금 베타 테스트라지만 너네 너무 구멍이 많은 거 아니냐고요.
테스트가 끝난 후 제작진의 수정 작업이 걱정될 정도다. 캐릭터 해석부터 설정까지 싹 다 이상했다.
이런데도 94등이나 하다니.
인내심 넘치는(사실은 그저 게으른 거지만) 내가 ‘데이지’ 안으로 들어왔으니 다행이지 다른 유저였으면 스트레스로 벌써 로그아웃 했을 거다.
쯧쯧 눈빛으로 혀를 차며 허공을 노려보는데 비에른이 다시 말을 걸었다.
“데이지.”
“네?”
“호위 기사를 붙여 줄까?”
비에른이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밤에 몰래 나가는 일이 잦은 것 같던데. 이유는 모르지만, 몰래 나가야 한다면 호위라도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움찔했다.
프리마돈나 영애 집에 갔을 때랑 어제 마족 지대로 넘어갔을 때 딱 두 번 몰래 밤에 외출했는데 걸린 모양이다.
눈이 커졌는지 시야가 확 트였다.
비에른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내가 마검사라는 걸 모르는 듯해서. 내 저택에서 마력을 쓰면 느낄 수 있어.”
“……죄송해요.”
“아니, 사과를 받자고 하는 말이 아니야. 네게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 마왕 동면지 탐사대와 엮이는 걸 보면 내가 도와줄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고. 다만…….”
그는 잠시 침묵하다 제 본론을 강조했다.
“너 혼자 감당할 필요는 없으니 언제든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는 뜻이야.”
감동과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위험한 일에 엮인 건 맞지만, 첫 번째 외박은 그냥 놀러 나간 거라 양심이 찔렸다.
진실을 고백할지 말지 망설이던 나는 감동적인 분위기를 이어 가기로 했다.
“감사해요.”
“그래.”
다행히 비에른은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훈훈한 분위기를 이어가 줬다.
***
비에른이 나를 위해 검사로 참석해 준다고 말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제야 가을국 황실의 답장이 왔다.
매일 전서구를 보내거나 스크롤을 써서 하루 만에 답장을 보내던 알렉스답지 않은 속도였다.
의심스럽지는 않았다.
신년제 준비로 한창 바쁜 시기니까.
하지만 비에른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의심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지금 나는 비에른의 집무실로 호출받아 그의 앞에 앉아 있다.
나는 그의 어두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비에른은 피곤한 눈으로 나를 보다 제 뺨을 쓸었다.
“가을국 황실에서 네가 이에테르가의 대표로 검투 대회에 참가하는 건 승인했는데.”
“네, 그런데요?”
“내가 네 기사로 대신 검투에 참가하는 걸 거절했어.”
“네? 왜요?”
“가족은 대신 참석할 수 없다는구나.”
“그런 규칙은 없잖아요!”
비에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신년제부터 참가 자격이 개정됐다더군.”
답장이 일주일 만에 온 이유가 있었다.
일주일 동안 황태자님이 신년제 검투 대회 규정을 개정하신 모양이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알렉스의 서신을 쳐다봤다.
이 와중에 필체는 또 우아해서 어이가 없었다.
『가문의 경쟁으로 변질될까 저어되어 가족은 레이디의 기사로 나오지 못하도록 규정이 추가되었습니다.
전 대륙이 힘을 모아야 하는 현 시국. 화합을 위해 황실 연회 담당 대신들이 고심하여 내린 결정이니 부디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규정이 급하게 변경된 만큼 레이디 데이지를 위한 검사가 나오지 않는다면, 제가 레이디를 위해 검을 들 수 있는 영광을 대신하겠습니다.』
예선이 일주일 남은 시점.
이제 와서 뛰어난 검사를 어떻게 구해?
아무나 기사로 세워 예선 탈락해서 혼자 오거나, 본인을 기사로 선택하라는 뜻이었다.
“하…….”
한숨이 절로 새나왔다.
#계략남 필요하신 분?
무료 양도합니다.
나는 울적한 마음을 누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나마 선택권이라도 주는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평소 성정이라면 협박해서 자길 기사로 세우라고 했을 텐데 #여공남수 키워드가 안전망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전 대륙에 황태자 애인으로 이름 찍고 살게 되는 건가.’
알렉스 평판 생각하면, 이대로 알렉스 선택하게 되는 거 아닐까? 목숨 걸고 알렉스 전 여자친구랑 연애해 줄 남주는 없을 거 같은데.
나는 #사패남주 #계략남주에 의해 결정되는 내 미래를 가늠해 보다 눈물을 삼켰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비에른이 허락하자 그의 보좌관이 들어왔다.
“카이엘드 공작이 도착했습니다.”
“아, 지금 내려가지.”
보좌관이 나가자 비에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카이엘드가에서 논의할 게 있다고 만남을 청했거든.”
그가 피식 웃었다.
“엘런도 네 기사가 되고 싶다는 얘기를 하러 온 거겠지.”
“제 기사요?”
왜인지 비에른은 뿌듯해 보였다.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할 생각이니 마음이 정해지면 말해 줘.”
비에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가문의 얼굴이 걸린 일이다 보니, 비에른은 엘런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듯했다.
이에테르가의 예선 탈락을 막아 줄 북부의 공작님.
엘런은 출병 준비로 바빠서 신년제에 안 갈 것 같은데.
하지만 이에테르가가 검투 대회에 참가하게 된 건 나 때문이니 입을 다물었다.
비에른이 큰 오해를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오해를 풀어 주는 대신 도망치듯 그의 집무실을 나왔다.
무거운 걸음으로 응접실을 향해 가는데,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아치형 격자창으로 쏟아지는 봄볕을 모조리 흡수하는 올블랙의 남자. 엘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