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눈을 뜨자 다리가 보였다.
여전히 거대한 다리 위에 천사상이 앉아 있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조각상들은 악마가 아닌 천사처럼 보였다.
소복이 쌓인 눈 때문이었다. 굵은 눈송이가 깃털처럼 하늘에서 끝도 없이 떨어졌다.
나는 하얗게 물든 다리 위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마다 쌓인 눈이 푹푹 꺼졌다.
두려워야 하는데 발에 닿는 푹신한 감각이 좋았다. 크리스마스의 새벽에 아무도 없는 길에서 홀로 눈을 맞는 기분이었다.
몇 번 경계에 와 봤다고 긴장이 풀린 건지, 막상 와 보니 생각보다 무섭지 않아 안도한 건지 모르겠다.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나는 계속 하얀 눈길을 걸었다.
자박.
깊은 골짜기 사이로 내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렸다. 경계는 그만큼 고요했다.
그때 바닥에서 바람이 밀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떨어질 때 충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뜨니 앙상한 하얀 나무들이 보였다.
자작나무 숲이 내 발밑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공중에 뜬 채 떨어지지 않았다. 발아래로 얇은 유리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작은 얼음을 보다 시선을 틀어 날 잡아 준 존재를 찾았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미끄러진 시야에 바로 아는 사람이 담겼다.
숲 사이로 난 길가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머리에 쓴 로브 후드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고 도와줄 마족은 요한밖에 없었다.
내게는 드물게 일어나는 행운이 겹쳐 온 탓에 반가움이 더 커졌다.
요한이 어떻게 딱 지금 여기에 온 건지 신기했다. 오류 없이 한 번에 경계를 넘어온 것도 그렇고.
차츰 시야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얼음판이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간 탓이다.
바닥까지 내려간 얼음판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시야가 달라진 탓에 이제는 내가 요한을 올려다봐야 했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보니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한 번에 경계를 넘을 줄 몰랐고, 바로 요한을 만날 줄도 몰랐기 때문에 모든 게 갑작스러웠다.
인사를 먼저 해야 할지, 받아 줘서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차오른 여러 생각이 말문을 막았다. 고민은 어이없게도 생각지도 못한 말로 튀어 나갔다.
“왜 여기 있어요?”
요한의 가지런한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나는 요한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시선을 틀어 주변을 둘러봤다.
설원 위로 길게 늘어진 발자국이 보였다.
굵은 눈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발자국은 아직도 가려지지 못했다.
요한도 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타이밍 잘 맞췄네. 지금 오길 잘했어.
뿌듯한 마음에 다시 요한을 쳐다보니 그는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요한이 헤어진 이후 계속 이곳에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족 지대에서 사계국으로 돌아온 날을 머릿속으로 세 보았다.
여름국에서 2주 넘게 있었고, 봄국에 돌아와서 또 한 달 정도 지냈다.
마족 지대에서 사계국으로 온 지 한 달이 훌쩍 넘었구나.
나는 불편한 마음에 어색하게 손끝으로 손바닥을 긁었다.
쌓인 눈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나뭇가지가 눈을 털어 내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숲은 고요했다.
“혹시 계속 기다렸어요?”
길어지는 적막을 들으며 요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르륵.
가파른 각도를 견디지 못한 후드가 뒤로 미끄러졌다. 요한과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선 고개를 높이 들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머리 위로 차가운 눈송이가 쌓이기 시작했다.
침묵을 지키던 요한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갔다. 그는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가벼운 손길을 따라 눈송이가 주변으로 흩어졌다.
“[우연입니다.]”
그는 뒤로 넘어간 후드 자락을 끌어와 내 머리에 덮어 주고는 다시 시선을 내려 눈을 맞춰 왔다.
“[돌아오신 겁니까?]”
마족 지대는 잠시 들른 거였다. 앞으로 여기에 올 생각이 없으니 영원히 작별 인사를 할 생각으로 왔다.
그리고 되도록 비에른이 깨기 전에 빨리 돌아가야 했다.
이상하게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면서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입을 달싹이다 손뼉을 쳤다.
“맞다!”
여기 온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나는 가방을 풀고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보여 줬다.
“전에 빌려줬던 로브하고 이동 스크롤이에요. 스크롤은 제가 몇 장 더 채워 놨어요.”
애초에 많이 가져온 게 아니다 보니 가져온 물건 소개는 금방 끝이 났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가방을 통째로 내밀었다.
“돌려주러 왔어요.”
요한은 물끄러미 그 가방을 보다 시선을 들었다.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제 붉은 입술을 열었다.
“[다시 돌아가시는 겁니까?]”
“네. 그리고 앞으로는 오지 못할 거 같아요.”
고작 인사가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변명이 먼저 나온 것 같다.
“저 그날 돌아갈 때 경계에 갇혔었어요. 다리랑 자작나무 숲이랑 골짜기 바닥을 수백 번 넘나들다가 겨우 빠져나와서 집에 돌아갔거든요.”
나는 후드를 더 깊게 내려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경계를 넘는 게 무섭더라고요. 지금도 큰마음 먹고 돌아온 거예요. 이것도 돌려줘야 하고 또…….”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혹시 기다리고 있을까 봐.”
또 적막이 내려앉았다.
곧 낮은 목소리가 침묵 위로 올라탔다.
“[경계에 갇히셨다고요.]”
질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바닥을 보던 시선을 들자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 보는 얼굴이 있었다.
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도 오신 겁니까?]”
질문이 아니었나 보다. 경계에 갇혔던 사실도, 그럼에도 다시 돌아온 이유도 방금 내 입으로 말했으니까.
다만, 나를 걱정해서 화를 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기에는 목소리가 담담했다.
요한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듣고 싶지 않았다.
한숨 뒤에 나오는 말이 좋은 말일 리 없지 않나.
요한한테는 나쁜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좋은 추억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었다. 요한과는 마지막까지 좋은 기억만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요한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뜬금없는 말에 요한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은인이기도 하고. 어쨌든 진심으로 요한이 잘 지내길 바라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요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싫다고 하면 거부할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그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키가 동등했다면 어깨를 토닥이며 우정 어린 포옹을 했을 텐데, 아쉽게도 남주의 키 인플레이션이 심한 세계다 보니 나로서는 요한의 허리를 끌어안는 게 최선이었다.
몸이 맞물리자 요한의 단단한 등이 손끝에 닿았다. 민망해진 나는 바로 몸을 떼어 내고 작별 인사를 했다.
“잘 지내요.”
이번에는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무거운 발을 들어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바닥에서 바람이 일었다.
늘 나를 차별하던 시스템이 오늘은 무슨 일인지 계속 호의적으로 나온다.
고작 한 걸음 물러섰을 뿐인데, 나는 경계에 들어섰다.
하얀 눈보라에 뒤덮이듯 시야가 뒤틀렸다. 심지어 이번에도 떨어지는 감각이 없었다.
도톰한 눈이 발아래로 차오르는 감각만 느리게 전해져 올 뿐.
너무 빨리 경계를 벗어난 탓에 요한의 인사는 듣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나는 이미 다리 위에 서 있었다.
어두운 잿빛으로 물든 하늘에서 하얀 눈이 펑펑 쏟아졌다.
겨울국은 아직도 밤이었다.
텅 빈 다리를 보던 나는 기이한 상실감에 혼자 입을 달싹였다.
‘……과몰입 미쳤나 봐.’
이 기분 나쁜 공허함을 털어 내려 노력했지만, 털어지지 않았다.
다리 난간을 쓸며 흘러온 겨울바람이 몸을 스쳤다.
후드가 뒤로 넘어가자 목덜미 빈틈으로 한기가 고였다.
나는 머리에 쌓이는 눈을 털며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눈이 쌓이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요한이 사계국 남주면 좋았겠다고.
CH9. 조작
이에테르가의 유리 온실에는 각양각색의 꽃이 가득했다.
내가 로맨스 판타지 세상에 실존하는 귀부인이었다면, 매일 사람들을 초대해 자랑할 만큼 예쁜 화원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풍경 앞에 있는데도 나는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니?”
기대한 반응이 아닌지 비에른이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물었다.
“너무 예뻐서 말이 안 나오네요.”
웃어 주고 싶은데 얼굴 근육이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 비에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진작 옮길 걸 그랬어.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지.”
“아니에요. 오라버니만큼 감정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분이 어디 계시다고요.”
비에른은 입매를 길게 늘이며 고개를 높이 들었다. 유리 천창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그에게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는 천장에 닿을 듯 높게 솟은 나무를 보며 말했다.
“생색내려는 건 아닌데 황실 정원사를 직접 데려와 조경을 다듬었어. 너도 이제 손님을 초대할 일이 많을 테니.”
그는 회색 돌로 조각된 조형물을 가리키며 내게 시선을 틀었다.
“온실에는 방음 마석도 설치해 두었으니, 바깥으로 이야기가 새지 않을 거다.”
그는 천사 같은 얼굴로 착한 마음을 전했다. 이럴 때면 이곳이 게임이라는 걸 깨닫는다.
‘세상에 이런 오빠가 어디 있어.’
비에른은 내 #힐링물 키워드를 책임져 주는 유일한 남주였다.
비록 내 슬롯에 있지는 않지만 그에게 #힐링물 키워드가 내장되어 있는지 가족으로 엮였을 뿐인데도 그는 내게 따뜻한 기운을 전해 주었다.
역시 봄국이 최고다.
날씨도 따뜻하고 평화로운 봄국.
좋은 플레이 존에 배정받아 놓고 왜 우울해하는데. 이건 기만이야.
작별 인사를 하고 오면 더 빨리 단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울적해졌다.
그때, 따스한 공기 속으로 비에른의 차가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올해는 3국이 함께 신년제를 진행한다더라. 아무래도 마왕 토벌을 앞두고 있으니 제국민을 다독일 필요가 있겠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관심 없는 말을 한 귀로 흘리는데 그가 물었다.
“가을국에서 신년제를 주관한다는데, 우리도 가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