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어쨌든 온실로 옮겨 준다니.
나야 좋지.
나는 냉큼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그래,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옮겨 두라고 할 테니 그동안 쉬고 있어.”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비에른은 제 용건을 마치고는 방을 나갔다.
나는 그가 나가자마자 드레스로 다가갔다.
“리안 영애 정말 금손이시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데이지 꽃이 어깨부터 가슴까지 사선으로 촘촘히 박혀 있다. 호기심에 손이 멋대로 드레스를 쓰다듬었다.
수백 장의 가느다란 꽃잎이 칫솔처럼 손가락을 간질였다.
쓰다듬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이걸 가지고 바느질을 했다니. 역시 #직업물 #능력여주.
다른 옷들도 마찬가지였다.
손가락 마디만 한 꽃이 달린 물망초 드레스도, 백일홍으로 물든 치맛단도 섬세한 작업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는 리안이 보낸 옷들을 보며 확신했다. 그녀는 곧 돌아올 거라는 걸.
많은 유저가 리안이 로그아웃을 했을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나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손으로 하는 버프가 있어서 아는데, 작업물은 버프가 있다고 뚝딱 나오는 게 아니었다.
본인의 의지가 있어야 했다.
손을 움직이는 건 내 의지니까.
나는 마차에서 스케치를 그리던 리안을 떠올렸다. 그 반짝거리던 기쁨은 진짜였다.
그런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날 리 없다.
좋아하는 일을 실컷 할 수 있으니 리안 영애는 로그아웃 하지 않았을 거다.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면 돌아오겠지.
나는 리안이 남긴 작품을 보다 침대로 걸어가 풀썩 누웠다.
늘어진 오후 햇살이 휘장 위에서 반짝였다.
바람에 살랑이는 하얀 천을 보며 나는 씁쓸함을 삼켰다.
어쨌든 시스템은 성공했다. 이게 랭킹 게임이라는 걸 모두에게 확실히 새겨 줬으니.
중간 평가 이후, 느슨했던 공동체에 긴장감이 생겼다.
페널티라고 여겼던 커뮤니티 차단이 행운처럼 느껴진다.
아이템을 구걸하고, 남주를 빼앗는 그 난리를 계속 보고 있었다면 나도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다.
그날 이후 유대를 우선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제 생각을 감쳐 왔던 유저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노을처럼 천천히 어둠에 뒤덮이는 것이 아니라, 전등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빛과 어둠이 자리를 바꾸는 것처럼 찰나였다.
마치 트렌드가 바뀌듯 한순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흐름이 바뀌면 조용히 외면받던 것들이 힘을 얻게 된다.
생각이든 취향이든.
한때는 착한 여주가 인기였으나, 어느 순간 악녀 여주가 메인 가판대를 차지하게 되는 것처럼.
시스템은 그걸 아는 것 같았다.
경쟁을 자극해 분위기를 바꾸니 경쟁을 원하던 유저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긴 이게 말이 되지.
100명이 모였는데 다양한 사람이 있어야 정상이잖아. 연대가 불편한 사람도 있었을 거야.
울적하네. 나는 서로 으쌰으쌰 놀던 분위기가 좋았는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한번 갈라진 틈이 다시 메꿔질지 모르겠다.
나는 낮에 시에나의 태블릿에서 봤던 커뮤니티 글들을 떠올렸다. 라리사의 아이템을 받으려 적은 영애들의 사연. 90%는 자작이겠지만.
그리고 순위에 대한 푸념.
AI는 유저를 평가한 후 자체 리뷰를 공개했는데, 그 기준이 좀 묘했다.
나는 내가 94위라 내 평가만 이상한 줄 알았다. 그런데 35위 영애가 올린 글을 읽어 보니 그녀에게 내려진 AI 평가도 가혹했다. 자체 평가로 멘탈이 털린 영애들이 많았다.
내 평가는 푸념 글을 올린 영애들에 비하면 유한 편이었다.
[AI 1] 별점 0점
여주가 제 힘으로 하는 것도 없고 계속 남주랑 주변인들한테 민폐 끼치는 거 별로.
능력 있는 여주들도 많은데 굳이 이 여주의 이야기를 봐야 하나 싶네요. 여주가 무능해서 고구마만 먹다 하차합니다.
[AI 2] 별점 10점
♥울 폐하가 멱살 잡고 하드캐리♥ 여름국 황제님 나오실 때마다 별점 박았더니 10점 됐네요!
이쁘고귀엽고섹시하고멋지고 혼자 다 하는 여름국 폐하 분량 늘려주세요♥♥♥♥♥♥
[AI 3] 별점 0점
인물이 많아서 정신 사나움.
에피도 중구난방.
나는 원앤온리 좋아하는데 여주가 너무 문란함.
[AI 4] 별점 0점
남주가 너무 안 나와요. 이럴 거면 로판이 아니라 판타지로 가야 할 거 같은데. 그래도 남주랑 서사를 쌓으면 개선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전개를 지켜볼게요.
[AI 5] 별점 0점
불호예요. 이유가 너무 많은데 앞에 유저들 리뷰 길게 쓰느라 지쳐서 생략합니다. 어쨌든 불호임. 암튼 불호임.
10점 준 AI 2의 평가가 제일 이해가 안 갔다. 악개냐고요.
저 AI 덕에 100등이 아니라 94등이라도 한 거 같긴 한데, 리뷰가 뭔가 이상했다.
그나저나 이 AI들은 어디에서 리뷰 작성하는 방법을 배운 걸까.
어쨌든 이 AI들이 매기는 순위에 목숨 걸 필요가 없어 보였다.
특히 AI 3번의 ‘문란함’의 기준을 보라.
어떻게 내가 문란할 수 있단 말인가.
현생에 나가면 내 19금 소설 구매 내역을 보여 주고 저 AI 3의 ‘문란함’에 대한 기준을 올바르게 세워 주고 싶었다.
어쨌든.
영애들은 AI의 평가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특히 플레이 기간이 길수록 상처를 크게 받았다.
그녀들을 보며 왜 빙의물 소설 끝자락에서 객관적이던 여주들이 감정 소모를 크게 하는지 깨달았다.
현생을 잊으려 읽던 가상의 세계가 제 현생이 되니까. 이곳이 현생이 되어 상처를 받기 시작하는 거다.
왜 [결] 빨리 치는 뉴비가 부럽다는 건지 알 것 같네.
“에고.”
나는 과몰입을 밀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전쟁 끝나면 바로 남주 선택하자. 엘런이든 알렉스든…….
“그 둘이 최선이냐 진짜.”
나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내 슬롯에는 #힐링물 남주가 없는 거냐고.
이제 와서 슬롯에 안 담긴 남주를 찾는 건 힘들 것 같은데.
나는 시선을 틀어 침대 옆 협탁을 쳐다봤다.
힐링물 남주는 아니지만, 같이 있으면 힐링 되는 남주가 슬롯에 있긴 했다.
이 세계 남주가 아니라 문제지.
나는 물끄러미 협탁 서랍을 보다 발을 뻗었다.
차가운 금속 손잡이가 발끝에 걸렸다.
고민하던 나는 손잡이를 끌어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어두운 원목 서랍 안에 곱게 접힌 하얀 로브가 모습을 드러냈다.
탁.
나는 바로 다시 서랍을 닫았다.
선택할 자신도 없으면서 미련이 남았다.
[결]을 완성하고 나면 자동으로 로그아웃 된다고 한다.
로그아웃 하면 영원히 요한을 만날 수 없게 될 거다.
먼 미래에 AI가 목 놓아 홍보하던 시즌 2가 나오면, 그때는 그 게임에서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겠지만 날 기억하지는 못하겠지.
이건 베타 테스트니 내 플레이 기록이 세이브 될 리가 없다.
나는 가만히 서랍을 응시했다.
드르륵.
그리고 다시 서랍을 열었다.
설원처럼 깨끗한 로브 위로 봄 햇살이 내려앉는다.
나는 햇살이 들어온 창밖을 바라봤다.
‘담당자님, 마족 지대에서도 스크롤을 쓸 수 있는 거 맞죠? 이동 스크롤은 버그 없는 거 맞죠?’
[마족 지대 내에서는 오류 없이 사용 가능합니다.]
‘확실해요? 제가 마족 지대에서 물건 몇 개 가져왔었는데 마족의 이능이라 그런지 사계국으로 오니까 사라지더라고요. 이동 스크롤은 가져가서 사용할 수 있는 거 맞죠?’
[사계국에는 마족 지대 데이터가 없기 때문에 시전자가 직접 사계국에서 이능을 발현하여 전체 코드를 입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족 지대에는 사계국 데이터가 이관되어 있어 직접 발현이 아닌 간접 발현(이동 스크롤 등의 마도구 사용) 명령어 적용만으로도 코드가 자동 완성됩니다.]
이과 멈춰…….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마족 지대에서는 이동 스크롤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 같다.
나는 몇 번이나 다시 물어 이동 스크롤 사용이 가능하다는 확답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짐을 챙겼다.
요하네스의 로브와 이동 스크롤 10장. 의사소통을 위한 노트와 펜.
이대로 로그아웃을 하면 평생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다.
안 그럴 가능성이 크지만, 내가 다시 간다고 했으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50년 동안 플레이를 한 유저도 있다 보니 마족 지대 캐릭터의 기억이 언제 리셋 될지 가늠할 수 없었다.
혹시 100년 넘게 날 기다릴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슬롯에 담겨 있으니 모를 일이다.
슬롯에 담기면 감정이 시작된다고 하니까.
다들 남주 선택에 심혈을 기울이는데, 나는 남주 선택을 고민할 때마다 자꾸만 내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그리고 오늘, 결국 마족 지대로 가기로 결심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밤이 됐을 때 따뜻한 옷을 꺼내 입고 창가에 섰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제발 문제만 생기지 말아라.’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설사 경계에 갇힌다고 해도 계속 움직이면 언젠가 빠져나올 수 있을 거고, 경계를 넘자마자 스크롤로 요한의 방에 가면 되니까 마물을 만날 위험도 없을 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테이블에 여름국 황제 폐하를 뵈러 몰래 다녀온다는 쪽지를 남겨 두었다. 마족 지대에 간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비에른이 이 편지를 발견하기 전에 돌아오는 게 최선이지만.
제발 해뜨기 전에 돌아왔으면 좋겠다.
덤덤한 척 스스로를 세뇌하고 있지만, 솔직히 무서웠다.
경계에서 얼마나 시간을 쓰게 될지 알 수 없어서.
하지만 가야 한다. 시간을 쓰면 경계는 언젠가 빠져나올 수 있지만, 완결이 나면 요하네스는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대단한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그 사소한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는 건 더 이상했다.
나는 후드 모자를 뒤집어쓴 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손에 힘을 주자 달빛에 물든 종이가 천천히 찢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