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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12화 (113/208)

112화.

녹스가 갑자기 나타난 게 놀랍지는 않았다.

안젤리카가 봄국 레이디들을 만난다고 자주 밖에 나오니, 언젠가 얼굴을 비칠 거라 생각했다.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마음과 별개로 그에게 안젤리카는 중요한 존재였으니.

나는 테이블에 앉은 영애들을 쳐다봤다.

트리비아나 공작부인, 시에나.

현 봄국 황실기사단장 여동생, 아리나.

중부의 자금을 움직이는 거대 상단의 딸, 푸른 머리 영애.

겨울국 협회장이 홀로 상대하기엔 벅찬 구성의 여인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의 비밀 병기, 안젤리카와 친해지고 있으니 불안했을 거다.

녹스는 봄국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그를 아는 여주는 많지 않았다.

시에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녹스가 겨울국 협회장인 걸 모르는 듯했다.

아리나가 이쪽으로 오는 녹스를 보고는 흠칫했다.

“뭐지? 저 남주 왜 저를 보고 웃는 거죠?”

“……미쳤다. 미친 가슴.”

푸른 머리 영애가 탄식하며 입을 가렸다.

그리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녹스가 금세 이쪽에 도착한 탓이다.

그는 넉살 좋게 웃으며 시에나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아, 트리비아나 공작부인도 계셨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이네요. 협회장님.”

시에나는 늘 그랬듯 순식간에 우아한 귀부인을 연기하며 손을 건넸다.

녹스가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다시 빙긋 웃으며 안젤리카와 나를 쳐다봤다.

“안젤리카 양이 이틀에 한 번꼴로 데이지 양을 만나러 간다길래 궁금해서 미행해 봤습니다.”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농담입니다. 우연히 지나가다 보고 반가워서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농담은 무슨. 미행했잖아 너.

나는 아니꼬운 눈으로 녹스를 보다 안젤리카를 쳐다봤다.

안젤리카는 두 손으로 태블릿 피시를 가린 채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현대 기기가 다른 캐릭터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

“네! 공작님 안녕하세요! 밖에서 뵈니 더 반갑네요! 이제 인사하셨으니까 가 보셔도 되겠어요!”

그리고 과장된 톤으로 어색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시에나와 아리나, 푸른 머리 영애는 안젤리카를 보다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가장 플레이 기간이 긴 시에나가 수습을 시도했다.

“그러고 보니 녹스 경, 드리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반갑네요.”

시에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녹스의 시선을 끌어왔다.

“트리비아나 공작이 그러더군요. 겨울국 협회와 봄국의 비과세 협정이 올해부터 만료됐는데, 협회에서 아무런 말이 없다고요.”

녹스가 눈에 띄게 당황하다 금세 웃음으로 감정을 지워 냈다.

“하하, 봄국 신년 정무 회의에는 꼭 참석하겠습니다.”

“잘됐네요. 트리비아나 공작도 참석한다던데, 제가 집에 가서 전해 드리죠. 신년제가 2월 16일에 끝나죠? 그즈음에 시간 되시나요?”

녹스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제가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그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는 도망쳤다.

나는 시에나의 뒤로 빠르게 사라지는 녹스의 뒷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역시, 기업(?) 잡는 데는 공권력이 최고구나.

그때 아리나가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아니, 잠깐만요. 안젤리카 영애. 저 사람이 협회장이에요?”

“아, 네. 저 남주가 녹스예요.”

그 대답에 푸른 머리 영애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비명을 질렀다.

“미쳤다! 아리나 영애 봤죠? 나 봄국에서 저런 흉부 처음 봤어요!”

“내 말이요! 안젤리카 영애 뭐 해요! 얼른 선택 안 하고!”

두 영애가 답답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젤리카를 다그쳤다.

안젤리카는 움찔했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녹스는 절대 선택 안 할 거예요.”

“아니 설마 안젤리카 영애도 인성 파예요?”

“말세다 말세. 인성보다 외모죠. 외모가 개연성이에요!”

“저런 흉부가 흔한 줄 알아요? 당장 선택해요! 내가 남주 선택만 안 했어도 녹스는 오늘 내가 선택했어요!”

아리나가 답답한지 제 가슴을 쾅쾅 쳤다.

안젤리카의 동공이 흔들렸다.

취향 남주와 그녀의 도덕 선이 충돌하는 듯했다.

안젤리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하세요. 휴, 흉부는 중요하지 않아요!”

“무슨 소리예요! 남자는 흉부가 전부예요!”

“저 가슴팍에 안겨 볼 수 있다면, 나는 당장 내일 로그아웃 해도 좋아요!”

아리나와 푸른 머리 영애가 안타까워 죽겠다는 듯 포효했다.

“아, 안 돼요! 녹스는 데이지 영애의 부모님을 죽인 놈이란 말이에요! 인간쓰레기예요!”

안젤리카는 사탄을 몰아내듯 소리치며 손을 내저었다.

숙연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리나와 푸른 머리 영애의 시선이 내게 다가왔다.

사실이긴 한데 안젤리카가 끔찍한 비극을 알리듯 괴롭게 소리쳐서 뉘앙스가 왜곡됐다.

‘빙의 전 설정이에요.’라고 말하기에는 타이밍이 늦어 버렸다.

나는 머뭇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안젤리카가 저 미친 남주를 선택하지 않고 #힐링물 남주와 안전한 [결]을 완성할 수 있다면 이 오해를 기꺼이 받을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정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녹스는 제 부모님의 원수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목을 가다듬은 아리나가 갑자기 팔짱을 끼고, 푸른 머리 영애가 입을 달싹였다.

“사, 사실 흉부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어요.”

“네. 이 정도였죠? 아, 이 정도였나? 기억도 잘 안 나는 거 보니까 인상이 흐릿한 남주네요. 별로예요.”

“그럼요. 남주는 가슴보다 인성이죠.”

“안젤리카 영애의 안목은 참 안목이에요.”

둘은 태도를 바꾸고 안젤리카의 선택을 지지했다.

***

집에 돌아온 나는 지친 몸을 끌고 복도를 걸었다.

자기 전에 목욕이나 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상태창이 켜졌다.

[※설정 오류 감지※]

설정 오류?

눈을 가늘게 뜨는데, 상태창 문구가 바뀌었다.

[슬롯 중복률(2인 이상 유저의 슬롯에 담긴 남주 수/전체 남주 수)이 50%를 초과했습니다!]

이제 유저들이 남의 슬롯에 있건 없건 신경 쓰지 않고 남주를 추가한다는 건 알았지만, 공지까지 뜰 줄은 몰랐다.

벌써 절반이나 슬롯 중복 남주가 됐다니.

[#순정남 키워드 수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문란남 키워드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수가 줄어든다는 거 보니 #순정남은 여러 유저의 슬롯에 담기면 키워드가 사라지도록 설정되어 있었나 보다.

그리고 #문란남은 늘어난 양다리 남주들 때문에 정체성을 위협받고 있는 듯하다.

하긴, 여덟 다리를 걸치는 #순정남 사이에서 조신하게 양다리만 걸치는 #문란남이라니 이거 완전 설정 오류지.

납득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꼬였네 꼬였어. 시스템 자식들 욕심내다가 설정 완전 꼬여 버렸나 봐.’

시스템은 계속 공지를 이어 갔다.

[지금부터 슬롯 중복을 금지합니다. 현재 슬롯에 담긴 남주는 타 유저의 슬롯에 새로 추가할 수 없습니다.]

[※예외사항※ #문란남 키워드를 보유한 남주는 슬롯 중복이 허용됩니다.]

제 할 말을 마친 상태창이 팟 사라졌다.

시스템의 세계관 관리 기능이 신기했다.

얘네 스스로 설정 오류를 감지하고 수정까지 하네.

그러나 관심은 길어지지 못했다.

나는 슬롯 추가에 크게 관심이 없던지라 공지가 남 얘기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새 내 방이 있는 층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내 방문 앞에서 있는 비에른을 발견했다.

그는 매우 수척해 보였다.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며 비에른이 경고했다.

“되도록 밖에 나가지 않는 게 좋겠다, 데이지. 사람들이 이상해졌어. 웬 여인들이 날씨를 묻다가 갑자기 달려들더구나.”

나는 그 여인들이 내 지인 같다고 말하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분간은 밖에 나갈 일이 없을 것 같아요.”

비에른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다 날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그래. 황태자가 보낸 쓰레기 때문에 네 방이 좁아졌다고 하레네가 걱정하길래 다시 보러 왔는데, 괜찮니?”

쓰레기라니. 알렉스 섭섭하겠네.

하지만 나는 토를 다는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요. 전 괜찮아요. 오라버니도 그때 보셨잖아요. 그렇게 불편하지 않아요. 게다가 최근에는 주변 사람들한테 나눠 줘서 공간이 좀 생겼거든요.”

나는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방에 처음 보는 마네킹 4개가 있었다. 생화를 붙여 만든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이었다.

비에른이 한숨을 쉬었다.

“이게 하레네가 말한 드레스군.”

“네?”

“본 셰밍에서 옷을 보냈는데 네 방에 놓을 곳이 없어 보인다고 걱정했거든. 왜 그랬는지 알겠군.”

“아, 네.”

나는 드레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내 표현력이 부족해서 아쉬울 만큼 너무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와 보길 잘했어. 하레네 말이 과장이 아니었네. 방에 들어가기도 힘들잖아.”

내가 드레스에 넋이 나가 있는 동안 비에른은 조심조심 걸어 마네킹 사이를 지나갔다.

마네킹 4개가 공간을 차지하니 확실히 처음 이능의 부산물이 방을 채웠을 때보다도 방이 좁아 보였다.

비에른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제가 졌다는 듯 말했다.

“이능의 부산물은 오늘 내로 온실에 옮겨 두마.”

“이능의 부산물이 공작저에 뿌리 내리면 불태우실 거라고 했잖아요?”

“이능의 부산물은 뿌리를 내리지 못해. 비유였어.”

나도 농담이었어.

그러나 비에른은 농담이 통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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