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11화 (112/208)

111화.

리안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을 바꿨다.

돼.

안 돼.

“아, 미치겠네.”

그녀는 계속 커뮤니티에 상담 글을 올렸다.

그녀가 적은 아드리안의 묘사를 보며 그의 얼굴을 궁금해하는 영애도 있었고, 소설 같다며 ‘빙의했더니 남주가 최애였다?’라는 제목을 붙이고 놀리는 영애도 있었다.

확실한 건 모두 그녀의 고민을 즐기고 있었다.

리안의 고민 글은 매일 최고 조회수를 경신하며 인기를 끌었다.

로맨스 소설을 보듯 그녀의 고민을 듣는 영애들에게 리안은 사정했다. 제발 제 고민을 진지하게 여겨 달라고. 그제야 영애들은 같이 도덕적 딜레마를 고민해 줬다.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 최애가 눈앞에 있는데 뭘 망설여? 슬롯 갈겨!

┗ 근데 이거 감질 난다… 그 어떤 금단의 작품보다도 영애 글 읽을 때 가슴이 뛰어… 영애가 겪는 도덕적 갈등 대박… 내가 갈등하는 거 같아

┗ 인정인정ㅋㅋ 영애 죄책감 전달력 무엇입니까ㅠㅠ

┗ 근데 그 남주 말이야. 남주인 건 맞아? 엑스트라일 수도 있잖아 ㅇㅅㅇ

┗ 그러네? 운명 어쩌고 하는 대사 보면 항마력이 남주 같긴 한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ㅇㅇ

┗ 영애 일단 슬롯이라도 추가해봐! 이 고민은 나중에 다시 하자

리안은 커뮤니티를 보다 노트북을 덮었다. 그녀는 답답한 숨을 쉬다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테이블에 늘어놓은 남성복 시안이 눈에 들어왔다.

“미치겠네.”

아니, 미칠 게 뭐 있어?

이건 고민 자체가 웃긴 거야.

누가 날 그려서 게임 캐릭터로 만들었다고 생각해 봐. 끔찍하잖아. 절대 안 되는 일이라고! 이런 걸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인성 최악이야.

결심한 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케치를 전부 쓸어 담은 그녀는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이게 맞았다.

시스템이 어떻게 그녀의 머릿속을 훔쳐본 건지, 아니면 정말 우연인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는 의지가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알고리즘으로 돌아가는 이 게임 세상에 운명 같은 건 없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 같은 건 없는 거다.

옷도 버리려 마네킹으로 다가간 리안은 걸음을 멈췄다.

스케치 그대로 나온 옷이 다부진 결심을 모두 무너뜨렸다.

이건 리안의 꿈이었다.

‘같이 [결]까지 함께할 수 있다면, 사랑하지 않아도, 그러니까 성애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옷을 만들어 주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야말로 그녀가 꿈꾸던 이야기.

리안이 원하던 [결]이었다.

로맨스보다 꿈에 의미를 두는.

꿈속에서 내 꿈을 이루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현생에서 아드리안이 그녀의 옷을 입어 줄지, 그녀가 결국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확실하게 그녀가 만든 첫 남성복을 아드리안에게 입혀 볼 수 있었다.

사람마다 사회적 성공의 기준이 다르지만, 그것은 리안의 성공의 기준이자 인생의 목표였다.

“하.”

리안에게는 너무나 큰 유혹이었다.

그러나 결국, 리안은 결정을 내렸다.

남주를 거절하기로.

다만 옷은 선물하기로.

선물하고 딱 거기서 끝내기로 했다.

‘이 이상은 욕심이야.’

고민이 길어진 탓에 약속 시각에 10분 정도 늦긴 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그런데 힘겹게 고민을 끝낸 보람도 없이 남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왜 안 오시지?”

리안은 다리가 아파 종아리를 주물렀다.

댕.

그때 정각을 알리는 시계탑 종소리가 울렸다.

밤 10시였다.

공원 관리인이 광장 문을 닫는다며 사람들에게 나가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리안은 손에 든 옷가방을 고쳐 들고 걸음을 뗐다.

남주는 끝내 오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 생각을 하자 리안의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사고라도 난 건 아니겠지?

아드리안이 다치는 상상을 하니 불안함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리안에게 아드리안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다. 제 꿈에 취해 그의 권리를 침해할까 두려워할 정도로.

‘아니야, 사정이 있었겠지.’

리안은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집을 향해 걸었다.

다리를 건너던 리안은 가로등 앞에서 입을 맞추고 있는 커플을 보고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처음엔 제가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떨리는 고개를 들어 다시 커플의 얼굴을 확인했다.

남자는 아드리안이었다. 입술을 뗀 그가 제 연인을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으로.

분홍빛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는 그를 보고 따라 웃으며 손가락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지난달에 리안의 가게에서 옷을 맞춘 여자였다.

리안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심해요!”

그때, 뒤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온 자전거가 리안의 옆을 지나쳤다.

그 소리에 커플의 시선이 리안에게로 흘러왔다.

남주는 리안을 보는 순간 생각났다는 듯 탄식했다.

“아. 리안. 우리 오늘 만나기로 했었죠.”

리안은 남주를 보던 시선을 틀어 여자를 바라봤다.

그러자 여자가 입술을 깨물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귓속말하듯 손을 들어 뺨에 붙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리안은 충격을 받은 눈으로 여자를 바라봤다.

남주가 다른 여자와 입을 맞춰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손목에 스마트 워치가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

“실화예요?”

“제발, 아니라고 해 주세요.”

이제야 그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안젤리카와 나는 동시에 질문을 쏟아부었다.

“영애들 커뮤니티 차단된 거 이제야 확 와닿네요. 지난주에 리안 영애 남주 훔친 영애 때문에 커뮤니티 난리였어요!”

시에나가 착잡한 얼굴로 태블릿 피시를 쳐다봤다.

“리안 영애는 이 글만 남기고 커뮤니티를 탈퇴했죠.”

나는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듣도 보도 못한 남주 스틸 사건이 벌어졌다.

심지어 그 영애는 자신의 잘못이 뭔지도 몰랐다.

『제가 그 남주를 선택한 건 맞는데요. 어차피 리안 영애는 선택할 생각도 없던 남주잖아요? 제가 왜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 영애 인성 무슨 일이야;; 리안 영애는 실존하는 사람을 캐릭터로 만든 게 잘못된 거라 생각해서 포기한 거잖아요. 리안 영애 고민글 다 읽었으면서 이런 선택을 하면 어떡해요!

┗ 글쓴이: 그거야 리안 영애 주장이죠; 실제로 존재하는 남자인지 아닌지 저희가 어떻게 알아요?

┗ 와ㅏㅏㅏㅏㅏ 완전체다… 이 영애는 찐이야 ㄷㄷㄷㄷ

┗ 영애 대체 누구임? 그렇게 당당하면 신상 좀 까봐요 ㅇㅇ

┗ 리안 영애 보살… 나같으면 신상 까고 커뮤 탈퇴했을 텐데ㅡㅡ

남주를 뺏은 영애는 오히려 다른 유저들의 비난을 답답해했다.

┗ 글쓴이: 내가 리안 영애글 보고 궁금해서 그 장소 간 거 맞고, 먼저 갔다가 남주 보고 마음에 들어서 선택한 것도 맞아요. 저도 이 부분은 리안 영애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해요.

그치만 제가 그 남주를 선택한 게 불륜은 아니죠; 이건 게임이에요 영애들;

어떤 남주를 선택할지는 내 자유라고요. 내가 남의 인벤토리에서 물건 뺏어온 것도 아니고, 사기 쳐서 영애랑 남주 이간질해서 뺏은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나요?

이 글은 곧 논쟁으로 변질되었다.

┗ 저 영애가 잘못됐기는 한데 솔직히 이 김에 남주 선택에 대해 말 얹자면, 남주가 마음에 들면 빨리 선택해야지… 본인이 선택 안 하다가 뺏겼다고 그러는 거 좀 오버 같음

┗ 22 나도 영애 말에 동의. 리안 영애 일이랑 별개로 여기 사람들 남주 선택이 게임이라는 자각이 없어. 아무리 우리가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라고 해도 남주 선택은 게임 승급 전인데… 무슨 승급전을 의리로 해 ㅠ

대화는 남주 선택에 대한 논쟁으로 흘렀다.

┗ 그동안 그냥 조용히 있었는데 슬롯 먼저 담았다고 내 남주라고 주장하는 것도 오바야; 파밍에 찜이 어딨어? 먼저 가져가는 유저 거지~

┗ 아니 이건 다르지;; 헌터물도 아니고 미연시인데……

┗ 미연시도 원하는 남주 집중 관리 안 하면 안 이어져요~^^

아리나 영애가 태블릿 피시 댓글을 보여 주며 혀를 찼다.

“어쨌든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영애들도 썸타는 남주 있으면 빨리 선택해요.”

“맞아요. 곧 야생의 경쟁이 시작될 거 같아요.”

푸른 머리 영애도 조심스럽게 우리를 부추겼다.

나는 내 슬롯 남주들을 생각해 봤다.

엘런과 알렉스.

“음…….”

전혀 걱정되지 않는군.

북부 출신 모솔 엘런이 영애들의 플러팅을 눈치챌 거 같지 않고, 알렉스는 어떤 영애실지 모르지만 슬롯에 추가하시려면 목숨을 한 번은 거셔야 할 거다.

본의 아니게 분실 위험이 없는 남주를 슬롯에 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실해도 되는데.

마지막으로 요한은…… 분실 위험은커녕 선택의 기회조차 없는 남주였다.

요새는 좀 잊고 지냈는데 괜히 또 마음이 씁쓸해지려 한다.

그때, 안젤리카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나중에 선택할 남주가 없게 되는 건 아니겠죠?”

“음. 아닐 거예요. 워낙 남주 수가 많아서. 하지만 등급이 높은 남주가 남을지는 모르겠네요. 아이템 가진 유저들이 선택하고 무르고 반복하면서 A급 남주들을 쏙쏙 골라 가더라고요.”

푸른 머리 영애가 뺨을 긁적였다.

그러자 안젤리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는 영애들 만나러 나올 때 빼고는 공작저 안에만 있어서 남주를 찾을 수가 없는데…… 어쩌죠?”

“아, 영애 겨울국 공작 집에서 지낸다고 했죠? 그 공작 선택하면 안 돼요?”

아리나가 묻자 안젤리카가 인상을 와락 썼다.

“녹스는 절대 안 돼요!”

“왜요?”

안젤리카는 입술을 달싹이다 나를 쳐다봤다.

‘왜 날 보지? 아…….’

안젤리카는 녹스가 내 부모님을 죽였다는 사실에 아직도 화가 난 것 같았다.

빙의 전에 일어난 일이라 슬프지도 않은데 안젤리카는 내 가정사를 말하는 게 꺼려지는지 눈치를 봤다.

그런데 그때였다.

끼이익.

봄 햇살이 쏟아지는 평화로운 테라스로 어둠의 기운이 다가왔다. 카페 앞에 멈춘 마차에서 익숙한 남자가 내린 것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녹스였다.

그는 오늘도 크라바트를 매지 않고 단추를 세 개나 푼 셔츠 차림이었다.

대충 느슨하게 내려 묶은 장발이 따사로운 햇볕에 옅은 갈색으로 반짝였다.

봄국 패치가 완료된 겨울국 남주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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