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이건 윤리적으로 잘못된 일이니 게임을 신고해야 한다고 한참 말을 쏟아 냈다.
그리고 그런 남주를 보고 설레는 자신이 끔찍하다고 반성하는 말도 덧붙였다. 또 만나게 될까 봐 겁이 난다는 말도.
그러나 솔직히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은 적지 못했다.
유저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 나 잠깐 상상했는데 최애가 내 남주라니…… 심장 터질 거 같아ㅠㅠㅠㅠㅠ
┗ 영애 고민 이해돼 ㅠ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 얼굴 따다 캐릭터 만드는 건 범죄지; 내가 영애 최애 얼굴 몰라서 뭐라 말은 못 하겠는데 진짜 똑같이 생긴 거면 나가자마자 신고해 ㄷ ㄷ
┗ 와 이거 고민된다. 양심이냐 욕망이냐
┗ 선생님 우린 인간이에요! 양심을 버리지 마세요! ㅠㅁㅠ
┗ 아니 영애가 최애랑 게임에서 썸 좀 탄다고 누가 고소해? 경찰에 신고해? 그냥 즐겨ㅋㅋㅋ
┗ 근데 정말 그 남주가 아드리안이라는 모델인 건 맞아? 영애 플레이한 지 얼마나 됐어? 몇 년 지나서 최애 얼굴 까먹은 거 아닐까?? 기억이 미화됐거나?
┗ 맞아 나도 가끔 내 남주를 볼 때면 현생 최애의 웃음이 떠오른다우…… 취향이 소나무라 웃는 게 이쁜 남주를 포기 못 했지 후후
‘아니. 내가 그 얼굴을 기억 못 할 리 없어.’
리안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시간이 흐르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결정을 내린 리안은 평온한 마음으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잊고, 신경 쓰지 말자.’
딸랑.
그때, 매장에서 들려온 소리에 리안은 노트북을 덮고 매장으로 나왔다. 그리고 손님을 확인한 순간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쇼윈도에 진열해 둔 샘플 의상을 보던 남주가 뒤돌아 리안을 보고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중간에 나가길래 걱정돼서요.”
그리고 살짝 눈을 찌푸리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아픈 건 아닌가 보네요.”
리안이 어떤 마음을 먹었건 간에 남주는 또 멋대로 그녀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리안은 아찔한 정신을 붙잡았다.
설레면 안 돼.
절대 안 돼. 제발.
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덜어 내고 예의 바르게 답했다.
“제가 일이 많아서요.”
손님이다. 그냥 손님이야.
리안은 며칠 전 딸의 옷을 맞추러 온 남자의 얼굴을 남주 위로 겹쳐 보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옷을 맞추러 오셨나요?”
그는 어제와 다른 말투에 조금 당황했는지 짙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당황은 잠시였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남자 옷도 제작하신다면.”
리안은 입술 안쪽 살을 깨물었다.
미치겠네. 사람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그는 어제 리안이 한 말을 되돌려주며, 제 옷을 만들어 달라고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남성복은 제작하지 않기로 했어요.”
남주는 의아한지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는 제작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뜨끔한 리안은 시선을 피하고 중얼중얼 변명을 쏟아 냈다.
“아무래도 제가 시간이 없어서…… 다음에 작업해 보려고요. 어제도 밤새 주문 들어온 옷을 만드느라고 시간이…….”
조용한 남주가 이상해서 힐긋 시선을 든 리안은 기겁했다. 남주가 테이블에 올려 둔 가죽 스크랩북을 보고 있었다.
“아, 안 돼요!”
리안은 황급히 달려가 스크랩북을 닫았다.
남주가 피식 웃었다.
“밤새 옷을 만드셨다더니, 정말 많이 그려 두셨군요.”
“아니에요! 밤새 그린 거 아니에요!”
남주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눈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저희는 어제 처음 봤는데 어떻게 제 그림을 이렇게 많이 그려 두실 수 있죠?”
리안의 입이 벌어졌다.
윤리에 가까워지려 욕망을 밀어내고 있는데, 외려 스토커 취급을 받게 생겼다.
리안은 얼른 연필을 쥐고 새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저는 원래 손이 빨라요. 몇 분이면 이런 그림을 뽑아낼 수 있어요.”
‘AI! 특성 버프 ‘금손에 빠른 손’ 켜 줘요!’
[특성 버프 ‘금손에 빠른 손’ ON]
버프가 발현된 덕에 리안은 순식간에 시안을 완성했다. 지금 남주의 착장 그대로였다.
“보, 보세요! 금세 그리죠?”
“레이디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만 이건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리안이 건넨 스케치를 바라봤다.
진심 어린 칭찬에 리안은 당황해 목덜미를 긁적였다.
“아, 아뇨. 뭐. 별거 아니에요.”
남주는 그런 리안을 흘긋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는 종이를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내려 두며 물었다.
“제가 모델은 해 본 적이 없는데. 뭐부터 하면 되나요?”
“예? 아니에요. 안 하셔도 되는데…….”
그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얼결에 뒤로 물러선 리안의 허리가 테이블에 닿았다.
남주는 애초에 리안이 목적이 아니었는지, 리안의 옆을 스쳐 스크랩북을 움켜쥐었다.
그는 천천히 스크랩북을 가져와 펼치며 웃었다.
“그러기엔 아깝잖아요. 이렇게 많이 그려 두셨는데.”
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바쁘시면 다음에 다시 올까요? 전 시간 많으니 편한 시간을 알려 주십시오.”
또 온다니!
자주 보면 정들 거고, 그러면 이 알량한 양심은 무력하게 사라질 게 뻔했다.
아, 안 돼! 절대 안 돼!
눈을 질끈 감은 리안은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또 오실 필요 없으세요. 치수만 재면 되니까 금방 끝나요.”
치수만 재고 바로 보내자.
어제의 망언을 오늘 수습하고 잘라 낼 생각이었다.
리안은 고개를 숙인 채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서랍을 열었다.
그래서 남주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줄자를 쥐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남주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청회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리안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미치도록 긴장됐다.
그녀는 아드리안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시선을 발끝으로 떨궜다.
“다, 다리…… 길이부터 잴게요.”
다행히 얼굴을 보지 않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머리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몸은 충실하게 업무를 기억했다.
리안은 테이블에 올려 둔 노트에 꼼꼼히 수치를 기재하며 계속 남주의 신체 치수를 쟀다.
그녀의 손과 눈은 사심 없이 일에 집중했다.
촤악.
남주의 등 뒤에서 어깨 길이를 재던 리안은 놀랐다.
‘상상했던 치수랑 똑같아…….’
가끔 리안은 아드리안의 화보를 보며 그의 신체 치수를 상상해 봤다.
아드리안은 애초에 어깨가 넓기도 하지만, 등 근육과 날개뼈가 도드라져 어깨선을 더 길게 잡아야 하는 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재킷의 어깨가 붕 떠서 둔해 보일 수 있었다.
이 남주는 딱, 그녀가 생각한 아드리안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상체 근육량에 비해 적은 승모근 때문에 깃을 더 높게 잡을 수 있는 것마저 똑같다.
‘혹시 시스템이 내 기억을 읽을 수 있는 걸까?’
기억을 들여다본 시스템이 아드리안을 제 앞에 데려다 놓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피해 의식이야. 내 기억을 엿봐서 뭐 해? 내가 취향의 남주를 만난다고 해서 이 게임에 무슨 이득이 있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시스템이 굳이 제 취향의 남주를 만들어 눈앞에 대령할 이유가 없었다.
다행일까. 터무니없는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미뤄 왔던 가슴둘레 치수를 재야 했기 때문이다.
“저…… 팔 좀…….”
남주는 자연스럽게 팔을 들었다.
리안이 남주의 치수를 대충 재지 못하는 이유는 이거였다.
양복사의 손길이 익숙한 태도.
남주는 귀족가 혹은 부유한 집안의 자제 같았다.
리안은 그가 벗어 둔 재킷을 흘깃 쳐다봤다. 현생에서 본 최고급 원단이 떠올랐다. 상의만 해도 거의 천만 원에 달하는 230수 원단.
대충하면 이 어설픈 마음을 들킬지도 모른다.
집중해서 가슴둘레를 재는데 남주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어제 계속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리안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남주는 그녀가 아닌 정면을 보고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리안은 들리지 않는 척 다시 고개를 내리고 남주의 가슴 앞에서 두 줄을 맞댔다. 그러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다시 찾아가 볼까 고민했는데, 분위기에 취했던 거라면 실례일 것 같아서 마음을 접었어요.”
“…….”
“그런데 같이 공연을 보러 간 친구들이 그쪽 얘기를 하더군요. 그쪽이 남성복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제가 계속 그쪽 생각을 하는 건지, 그쪽을 생각하도록 상황이 흘러가는 건지 헷갈렸습니다.”
리안은 줄자를 거뒀다.
“그런데 눈앞에 당신이 나타났죠.”
그 말에 움찔했지만, 리안은 시선을 피하듯 늘어진 줄자를 둘둘 말며 바닥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는 불편해하는 리안을 존중해 거기서 말을 멈추었다.
리안은 바로 테이블로 돌아가 남주의 가슴둘레 수치를 적었다.
하지만 손이 떨려서 숫자가 자꾸만 일그러졌다.
남주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재킷을 입는지 옷감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 건조한 소리 위로 남자가 다시 제 목소리를 얹었다.
“신의 뜻으로 정해진 일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결국 일어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걸 운명이라고 하고요.”
그리고 물었다.
“우리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지 않습니까?”
리안은 천천히 뒤를 돌아 남주를 바라봤다.
남주는 햇살처럼 맑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저는 우리가 만난 게 운명 같거든요.”
***
리안은 마네킹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결국, 만들고 말았어.’
옷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안 돼. 지금 남주를 아드리안으로 생각한다는 거잖아!
리안은 도덕적 딜레마를 겪으며 괴로워했다.
그 와중에 남주의 옷은 역대급으로 잘 나와서 더 미칠 것 같았다.
그날, 남주는 리안에게 만남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약속을 남겼다.
“주말 저녁 8시에 광장에서 만나요. 오지 않으시면 그걸 대답으로 생각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