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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09화 (110/208)

109화.

리안은 남주의 발치에 고인 물웅덩이를 보고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네! 수, 수건 빌려드릴게요. 잠시만요.”

리안은 허둥지둥 뒤돌아 안으로 달려갔다.

쾅.

“윽.”

불을 다 꺼둔 상태로 달리는 바람에 테이블에 다리를 부딪쳤다.

“괜찮으세요?”

남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으며 다가오자 리안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괘, 괜찮아요.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허둥지둥 작업실을 가로질러 2층으로 올라갔다.

이미 돈은 차고 넘치게 벌었지만, 리안은 여전히 2층 다락방에서 지냈다.

옷을 만드는 게 너무 좋아서 빨리 작업실에 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2층 다락으로 올라간 리안은 가장 최근에 산 빳빳한 수건을 들고 내려왔다.

남주는 얌전히 쇼윈도 옆에 서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솨아아아아.

고요한 봄밤. 청량한 빗소리만 그 정적을 메꿨다.

리안은 제 발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 빨리 다가갈 수 없었다.

몇 걸음 떼지 않았는데, 벽에 기대 창밖을 보던 남주가 고개를 돌렸다.

남주의 얼굴은 젖은 밤거리 같았다.

어두운 그림자와 주황빛 윤광.

습한 가로등 빛에 물든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다.

‘진짜, 아드리안이야.’

리안은 이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넋을 놓은 채 수건을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남주는 환하게 웃으며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았다.

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급히 시선을 내린 리안의 눈에 축축이 젖은 남주의 옷이 들어왔다.

‘남성복 좀 미리 만들어 둘걸.’

쏟아진 비에 남주는 쫄딱 젖어 있었다. 그러나 가게에는 여성복뿐이라 갈아입을 옷을 줄 수가 없었다.

아드리안을 위해 디자인해 둔 옷이 얼마나 많은데, 눈앞에 두고도 주지 못한다니.

하지만 누가 이럴 줄 알았을까?

빙의했는데 현생 최애가 여기 있을 줄이야!

리안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던 남주는 리안의 표정을 오해하고는 미안한 듯 눈꼬리를 내렸다.

“저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가시는 건 아니시죠?”

리안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전 어차피 가게에서 지내거든요. 아, 차 한잔 드릴까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이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죠.”

남주는 웃으며 입구 협탁에 수건을 개어 올려 두었다.

그는 다시 벽에 툭 머리를 기대고 쓰게 웃었다.

“저 다리로 마차가 데리러 오기로 했는데 비가 와서 그런지 늦어지네요.”

“곧 오겠죠. 여기서 펴, 편히 기다리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침묵이 시작됐다.

어색한 공기를 다시 빗소리가 메우기 시작했다.

모든 오감이 소리에 집중된 것처럼 숨소리조차 크게 느껴져 리안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리안은 불을 켜둘 걸 후회했다.

그런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와 달리 남주는 차분했다.

그는 동요 없이 밤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리안은 남주의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리는 제법 운치가 있었다.

검은 팔레트에 짓이긴 주황색 물감처럼 젖은 바닥에 가로등 불빛이 번져 있다.

평온한 빗소리를 들으며 리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다리기 지루하지 않으세요?”

남주는 대답 대신 완벽한 입매를 부드럽게 휘어 보였다.

리안은 긍정이라 여기고 주먹을 꽉 쥔 채 용기를 냈다.

“오신 김에 옷이라도 하나 맞추시겠어요?”

남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살짝 미간을 찡그린 채 웃었다.

“음…… 여기 옷은 비싸다고 들었는데요.”

강매로 오해한 그가 돌려 거절했다.

기겁한 리안은 입을 뻐끔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그냥 지어 드릴게요!”

남주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

“그 제가 음…… 아, 남성복도 제작해 보려고 준비하는데 샘플! 맞아요! 샘플이라서 돈을 받고 팔 수가 없어요!”

“아.”

남주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성에 누가 될까 함부로 팔 수 없다는 뜻이군요.”

명성이라니.

본 셰밍이 요즘 대륙에서 잘나가긴 하지만 어쩐지 부끄러웠다.

본업을 잘해 입덕한 최애에게 본업을 칭찬받는 기분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주체가 안 될 만큼 머리끝까지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리안은 아랫입술을 한 번 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첫 남성복을 입어 주시면…… 영광일 것 같아요.”

말을 뱉자마자 깨달았다.

저 남주는 오늘 나를 처음 봤는데.

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손등으로 양쪽 뺨을 식히며 얼른 말을 덧붙였다.

“딱, 오늘 남성복을 제작하려고 마음을 먹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모델을 부탁할 남자분이 없어서요. 뭔가 운명처럼 이렇게 오셔서…… 꼭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아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수습이 되지 않았다.

리안은 울기 직전의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추적이는 빗소리 위로 웃음소리가 얹혔다.

“레이디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만.”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고개를 드니 다리 위에 마차 하나가 서 있었다. 남주를 찾아온 그 마차인 듯했다.

리안을 돌아본 남주가 미소를 지었다.

“제가 그런 귀중한 기회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는 고개를 숙여 묵례하고는 문을 열었다.

“레이디의 첫 남성복을 받을 행운의 주인공을 질투하며 오늘을 기억하겠습니다. 부디 평온한 밤 되시길.”

남자는 말을 마치고 빗속으로 사라졌다.

리안은 멀어지는 남주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협탁에 있던 수건을 집었다.

아직 남아 있는 물기가 방금 있던 일이 현실임을 차갑게 일깨워 줬다.

***

하루가 지나니 정신이 들었다.

‘잘못 본 거야.’

리안은 어젯밤의 흑역사를 잊기 위해 아침부터 더 열정적으로 작업에 집중했다.

하얀 가봉 드레스 앞에 선 리안은 데이지 화병을 가져와 작업을 시작했다.

하얀색이고 또 꽃잎이 작고 많아 가장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머리를 비우기 딱이었다.

오늘은 이걸로 작업을 시작하자.

드레스의 어깨부터 가슴선까지 꽃을 달며 집중하는데 메시지가 왔다.

[바바라: 영애! 저 큰일 났어요. 혹시 지금 도와주실 수 있나요?]

프리마돈나 영애였다.

지난달에 공연 의상을 제작해 주었는데, 그게 문제가 생겼나 싶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역시나 그녀가 수선을 부탁했다.

어깨끈이 잘려서 입을 수가 없는데 혹시 지금 오페라 하우스로 와 줄 수 있냐는 거였다.

이번 주는 컬렉션 작업에 집중하려고 휴업 공지를 올려 둔 터라 시간을 유동적으로 쓸 수 있었다.

리안은 수선 도구를 챙겨 바로 오페라 하우스로 갔다.

수선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버프를 받으니 5분 만에 끝났다.

“영애, 덕분에 살았어요.”

“아니에요. 별거 아닌걸요.”

“온 김에 공연이나 보고 가요.”

바바라는 미안해하며 공연 관리자를 부르더니 티켓을 뺏어 왔다.

“아뇨. 저 괜찮은데…….”

그러자 바바라가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벌렸다.

“영애…… 내 공연 보기 싫은 거예요? 제 공연이 그렇게 재미가 없어요? 그동안 의리로 와 줬던 거예요?”

갑작스러운 물음표 공격에 당황한 리안은 얼결에 티켓을 받았다.

자리는 무대 측면의 2층 박스석이었다. 프라이빗 룸이라 몰래 돌아가면 걸릴 자리였다.

‘……보고 가야겠네.’

대기실을 나온 리안은 한숨을 삼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난간 밖으로 보이는 무대를 구경했다.

화려하게 꾸민 무대가 잠시 시선을 끌었으나, 곧 그녀의 눈은 자석처럼 관람석에 앉은 사람들을 향해 움직였다.

리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디자인이 겹칠 만도 한데, 수백 명의 옷이 모두 제각각이다.

재밌는 관람이 될 것 같았다. 공연 말고도 볼 게 많으니까.

1층 관객을 보던 리안의 시선이 2층 맞은편 박스석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리안은 움찔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도 물을 마시다 눈을 가늘게 뜨며 물잔을 내려 두었다.

어제 가게를 찾아왔던 남주가 앉아 있었다.

밝은 곳에서 보니 더 확실하다.

남주는 정말 아드리안이었다.

남자는 뭐가 웃긴지 쾌활하게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무대 불이 꺼지고 문을 닫는다는 안내가 들려왔다.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남주는 빙긋 웃더니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곧 공연이 시작됐다.

현악기 소리가 천천히 제 음량을 높이며 홀을 채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안은 맞은편 남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리안은 시선을 돌리려 노력했지만, 저도 모르게 자꾸만 맞은편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무대에서 흘러나온 빛이 은은히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계속 그를 보고 있으니 아드리안과 다른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목부터 어깨로 이어지는 타투가 없었다.

깨끗한 목덜미를 덮은 셔츠 깃은 날이 제대로 서 있다. 평소 스포티한 옷을 즐겨 입는 아드리안의 취향과 달랐다. 물론 가끔 슈트 화보를 찍기도 했지만. 특유의 날티가 보이지 않아 낯설었다.

‘피어싱도 없어.’

귓바퀴도 깨끗했다.

크라바트까지 맨 정석적인 차림을 보면 취향도 아드리안과 다른 것 같다.

그치만 햇살이 쏟아지는 듯한 그 쾌활한 성격은 비슷해 보였다.

다리를 꼰 채 의자에 몸을 기대고 공연을 보던 남주가 문득 이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리안은 놀라 움찔했다.

그러자 남주가 웃으며 장난스럽게 눈동자를 굴리다 문가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한 번 흔들었다.

쉬는 시간에 밖에서 보자는 뜻 같았다.

긴장한 리안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박스석을 도망치듯 나왔다.

매장으로 돌아온 리안은 바로 작업실로 가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상담 글을 올렸다.

고해성사하는 마음이었다.

이건 안 되는 일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을 본 따 캐릭터로 만들다니.

그것도 미연시 게임에서.

이건 인권 침해야.

리안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가감 없이 글로 풀어냈다.

제목: 현생 최애랑 똑같이 생긴 남주가 있다면 어떨 거 같아?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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