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08화 (109/208)

108화.

봄국의 평화로운 에즈히나 카페 거리.

나는 오늘도 봄국 영애들을 만나 태블릿을 빌려 커뮤니티 글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은 붉은 머리 영애와 파란 머리 영애가 맞장구를 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요즘 내가 커뮤니티에 들어온 건지 웹소설 플랫폼에 접속한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다들 헤비 독자라 그런지 필력이 아주.”

순위 발표 이후, 다들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정리하려 노력했지만 이미 공동체에는 미묘한 금이 간 뒤였다.

뭐랄까.

다들 플레이에 진심이 됐달까?

게시글 제목을 훑던 나는 턱을 괬다.

남주 교환권 사용 후기와 남주 교환권 사용 방법을 문의하는 글이 자주 보인다. 특히 ‘남주 교환권이 필요한 이유’를 호소하는 글이 많이 올라왔다.

첫 중간 평가가 발표된 날, 라리사가 여론에 따라 필요한 유저에게 아이템을 기부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영애들은 라리사에게 아이템을 받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하소연이 소설이라고 믿었다.

아무리 막장 라지만 이게 진짜일 리 없다.

하지만 아직 뉴비인 안젤리카는 동공을 떨며 경악했다.

“나, 나, 나, 남주가 하녀랑 바람을 피웠대요! 그것도 아들의 여자친구인 하녀랑요!”

“영애, 팁 글 읽으라니까 또 그런 거 보고 있어요?”

아리나가 혀를 차자 안젤리카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조회수가 높길래 궁금해서요…….”

시에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선택된 남주는 다른 여자를 쳐다보지 않아요.”

“정말요?”

“네. 슬롯에 담긴 남주는 다른 유저의 슬롯에 추가되면 양다리를 걸칠 수 있지만, 선택된 남주는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아요.”

안젤리카는 안도한 얼굴로 다시 태블릿 피시를 보았다.

“다행이에요! 저는 이 영애님이 너무 불쌍하셔서…….”

“이해해요. 저는 룰을 아는데도 흠칫했다니까요.”

남주 등급이 랭킹을 올리는 절대적인 요소다 보니, 많은 영애가 남주 탐색에 열을 올리고 또 선택한 남주를 바꾸기 위해 안달했다.

이런 모습을 계속 보고 있으니 점차 순위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다.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냐.

어차피 20억 주는데 대체 뭐 하러 에너지를 낭비하는 거야.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오랜만에 커뮤니티 팁 글들을 읽었다.

‘팁 글이 많이 줄었네.’

전에는 매일 1~2개씩 올라왔는데, 일주일째 새로운 팁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전체 게시판을 탐색하던 나는 몰아치는 영애들의 소설을 넘기다 조회수가 높은 글을 발견했다.

제목: 혹시 모델 아드리안 가브리엘 아시는 분? [132]

평범한 제목인데 이상하게 댓글이 많았다.

읽어 보니, 본 셰밍의 주인 리안 영애가 올린 글이었다.

나는 글을 읽다 태블릿을 돌려 다른 영애들에게 보여 주었다.

“영애들 혹시 이 글 보셨어요? 실제 모델이랑 닮은 남주가 있나 봐요.”

“아, 그거 리안 영애가 올린 글 말하는 거죠?”

“네, 맞아요.”

다른 영애들은 이미 이 글을 읽은 모양인지 놀라지 않았다.

“리안 영애가 말한 모델이 누군진 모르는데, 리안 영애 말로는 완전 똑같이 생겼대요.”

푸른 머리 영애의 말에 나는 리안 영애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예전에 리안이 내 방에 왔을 때, 그녀가 내 이름에 관해 물으면서 좋아하는 모델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었다.

‘그 모델 말씀하시나 본데.’

나는 다시 그녀의 글을 읽었다.

리안 영애는 굉장히 혼란스러워했다. 자신이 잘못 본 건지 정말 남주가 모델 아드리안을 닮은 건지 확인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드리안은 한국에서 유명한 모델이 아니다 보니 아드리안의 얼굴을 아는 영애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한숨 소리가 들렸다.

“리안 영애 안타까워서 어떡해요.”

“그러니까요.”

나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 시에나를 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안 영애한테 무슨 일이 있나요?”

시에나가 쓰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 두었다.

그리고 커뮤를 뒤집은 리안 영애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

리안은 현생에서도 유명 패션 브랜드에 재직하던 디자이너였다.

그녀는 특이한 소재에 관심이 많아 현생에서도 꽃으로 의류 제작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워낙 수분이 많은 소재다 보니 쉽게 뭉개지고 변형되어 머릿속으로 구상한 디자인을 표현할 수 없었다.

‘이 꿈을 판타지 세계에서 이룰 줄이야.’

8개의 마네킹에 드레스를 가봉한 그녀는 작업실로 화병을 하나씩 가져왔다.

오늘은 리안의 위시리스트 중 하나, 생화 드레스를 만드는 날이었다.

리안은 울컥한 마음을 추스르고 붉은 장미를 한 송이 꺼내 들었다.

꽃받침에 바늘을 찌른 리안은 검은 드레스 위로 꽃을 심었다.

[특성 버프 ‘금손에 빠른 손’ ON]

버프가 켜지자 금세 붉은 물결이 드레스를 뒤덮었다. 그녀는 넥라인부터 골반까지 사선으로 장미를 촘촘히 꿰맸다.

리안은 원목 작업대에 올려 둔 스케치를 들어 드레스와 비교했다.

그리고 직감했다.

‘이번 컬렉션도 대박이다.’

현생에서는 취향을 포기하고 잘 팔리는 옷을 만들려 노력했는데, 빙의한 덕분에 자아실현을 하고 있다.

‘이게 현생이면 좋겠네.’

리안은 피식 웃으며 스케치를 내려 두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다음 작업해야지.

리안은 잠시 쉴 겸 커피를 사러 나가기 위해 작업대를 정리했다.

본 셰밍에 들어오는 주문이 많다 보니 작업대에는 늘 스케치가 가득했다.

모두 여성의 옷이었다.

한쪽으로 작업물을 대충 밀어낸 그녀는 열쇠를 챙겨 가게를 나왔다.

강변을 걸으며 리안은 사람들을 살펴봤다. 봄기운 가득한 거리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그만큼 옷도 다양했다.

신분을 나타내는 화려한 착장. 노동에 최적화된 편안한 차림. 기사의 서열을 과시하는 제복과 훈장.

현생 못지않게 중세의 남성복도 다채롭고 화려했다.

커피를 받은 리안은 그들을 골똘히 관찰하며 돌아왔다.

‘……남성복도 만들어 볼까?’

아니야. 됐어.

그녀는 빠르게 생각을 치워 냈다.

현생의 리안에게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걸고 만든 첫 남성복은 그녀의 최애, 아드리안 가브리엘에게 입히겠다고 다짐했다.

아드리안은 세계적인 톱 모델은 아니지만,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완벽한 외모와 특유의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매력적인 모델이었다.

게다가 본업 존잘.

그는 어떤 옷을 입어도 아드리안화 하는 천재였다.

리안은 진심으로 그를 존경했다.

모니터, 노트북, 핸드폰, 다이어리, 노트, 포스터. 리안은 모든 곳에 아드리안을 걸어 두고 꿈을 키웠다.

오죽하면 이 플랫폼 설문 조사에서 원하는 이름을 적으라고 했을 때 바로 아드리안의 애칭인 리안을 적었을까.

현생의 마음을 떠올린 리안은 차분히 제 욕심을 버렸다.

‘아무리 게임 속 세상이라지만 안 돼. 내 브랜드의 첫 남성복은 아드리안에게 입힐 거야.’

작업실로 돌아온 리안은 다짐을 되새기기 위해 서랍에서 가죽 스크랩북을 꺼냈다.

그 안에는 ‘금손의 디테일’ 특성 버프로 그린 아드리안의 초상화가 담겨 있었다.

중세 제복과 예복, 더블릿 셔츠와 튜닉을 걸친 차림.

아드리안을 떠올릴 때면 디자인이 마구 떠올랐다.

스케치를 보고 있으니 또 손끝에 창작 욕구가 뻗친다.

결심은 더 확고해졌다.

‘첫 남성복은 무조건 아드리안에게 조공한다!’

그녀는 게임에서 나가면 20억을 타고 바로 아드리안을 위한 옷을 제작할 생각이었다.

완벽한 아드리안의 취향의 옷을 만들어서 선물할 거야.

“지금은 일하자, 일.”

리안은 콧노래를 부르며 물망초 바구니를 가져와 하늘색 가봉 드레스 앞에 두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탑 아래로 하늘색 시폰이 풍성하게 떨어지는 벨 드레스였다. 리안은 마치 꽃다발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물망초를 탑에 세심히 붙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쏴아아아아.

리안은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밤거리 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

리안은 작업대에 올려 둔 등불을 쳐다봤다. 불의 이능 부산물로 만든 등불이었다.

저것 때문에 노을이 사라진 줄도 몰랐다.

원래는 생명의 이능 부산물을 사려고 모은 돈이었지만, 운 좋게 착한 영애를 만나 무료로 생명의 이능 부산물을 구한 덕분에 그 돈으로 불의 이능 부산물을 샀다.

가격은 사악했지만, 전등을 켠 것처럼 편리하게 실내를 밝힐 수 있어서 좋았다.

꺼진 초를 관리할 필요가 없으니 작업에 집중하기도 좋고. 지금처럼.

“요즘 일이 잘 풀리네.”

리안은 웃으며 이만 작업을 마무리할 생각으로 마네킹과 화병을 정리했다.

그리고 매장으로 나와 초를 하나씩 껐다.

쇼윈도 위에 걸린 미니 샹들리에 초도 끄기 위해 사다리에 올랐다. 마지막 초를 끄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매장으로 들어왔다.

딸랑.

가게 앞 가로등 빛에 의지하는 어두운 실내라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큰 키나 실루엣은 그가 남주라고 말하고 있었다.

문 닫기 직전, 가게로 들어온 비에 젖은 남주라니.

다른 영애들이라면 이 상황을 운명이라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리안은 감흥이 없었다.

퇴근 시간이 늦어질까 문제라는 생각만 들 뿐.

리안에게는 이미 종교에 가까운 뮤즈가 있기 때문일까?

로판 세상에 들어왔음에도 그녀는 남주에게 관심이 없었다.

‘옷 만드는 게 더 재밌는걸.’

가끔 시간 나면 아드리안 옷도 스케치하고.

리안은 이 게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취향 키워드를 반영하면 뭐 해. 판>로 선호 독자를 무시했는데.’

무조건 남주를 골라야 한다니 취향의 영역이 너무 좁았다.

리안은 속으로 불만을 곱씹다 불 꺼진 초를 다시 꽂아 두고 사다리를 내려왔다.

“죄송하지만 영업이 끝나서요.”

한 걸음 한 걸음 남자에게 다가가던 리안은 기시감을 느꼈다.

잘생긴 귀와 목선이 드러나는 단정한 검은 머리.

역삼각형처럼 넓은 어깨 끝에서 가는 허리로 떨어지는 가파른 사선.

익숙한 윤곽이었다.

‘아, 내가 오늘 아드리안 그림을 너무 오래 봤나 봐.’

어둑한 시야와 아드리안 금단 현상의 콜라보라 여기며 리안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런데 그때, 옷의 물기를 털던 남주가 고개를 들었다.

리안은 심장이 멎는 기분을 느꼈다.

순간 가게 앞 가로등 불빛이 모두 남주에게 달라붙은 줄 알았다. 세심히 세공된 다이아몬드처럼 젖은 얼굴이 제게 쏟아진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남자는 미안한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요. 잠시만 비를 피해도 될까요?”

아드리안.

그는 분명 아드리안 가브리엘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