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06화 (107/208)

106화.

녹스는 안젤리카의 사교 활동에 바로 동의했다.

심지어 안젤리카의 심리 안정에도 좋을 것 같다며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어지간히도 내가 부담스러웠나 보다.

고백도 안 했는데 차인 기분.

이겨서 기쁜데, 좀 묘하다.

어쨌든 잘된 거지. 깊게 생각하지 말자.

오늘 나는 드디어 안젤리카를 데리고 봄국 영애들과 자주 오는 카페에 왔다.

카페 안에는 먼저 온 봄국 유저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안젤리카를 소개했고 안젤리카와 봄국 영애들은 인사를 나눴다.

“아,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뉴비 영애!”

“저 영애 프리마돈나 공연 때 봤는데! 그때 영애 너무 귀여웠어요.”

까르르 웃으며 봄국 영애들이 안젤리카를 환영했다.

안젤리카는 염려와 달리 빠르게 적응했다.

그녀들은 서로의 키워드와 전개 정보를 교환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호로록 차가운 커피를 마시는데, 갑자기 대화 주제가 바뀌었는지 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무슨 유저의 행복이 전부야.”

아리나가 피식 웃으며 괜히 하늘을 노려봤다. 동의하듯 붉은 머리 영애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근데 리워드는 그렇다 쳐도 페널티는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푸른 머리 영애도 혀를 찼다.

“이건 명백한 봄국 차별이에요. 여기 있는 유저 7명 중에서 2명이나 하위 30위인 게 말이 돼요?”

시스템 평가에 다들 불만인 듯하다.

그녀들은 30위권 안인데도 랭킹 공개가 불편한 듯했다.

‘네가 뭔데 우리를 평가해? 기준이 뭐냐고!’, 이런 느낌이랄까.

게다가.

“확실히 형평성에 문제가 있어요. 늦게 온 사람일수록 [기] 스테이지가 재미없을 수밖에 없잖아요. 재미없는 에피를 빼고 싶어도 글자 수가 모자라니까.”

안젤리카의 말에 의하면 그녀에게 15만 자 글자 수를 채웠다는 알람이 뜨기 무섭게 1차 중간 평가 순위가 공개됐다고 한다.

아마 안젤리카가 마지막으로 타임라인을 시작한 영애인 거 같고, 시스템은 그녀가 스테이지 승격 조건인 [기]를 완성하자마자 순위를 평가한 듯했다.

“심지어 페널티가 커뮤니티 차단이라니. 뉴비한테 불리한 룰을 만들었으면서, 뉴비에게 치명적인 페널티를 주잖아요. 가뜩이나 정보가 부족한데 어떻게 적응하라고!”

“전 괜찮아요.”

안젤리카는 손사래를 치며 그들을 달랬다.

“어차피 저는 동생이랑 같은 방을 써서 현대 기기 사용하기도 눈치 보였거든요. 대신 화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안젤리카는 진심인 듯 말했지만, 듣는 영애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초기 적응에 커뮤니티 정보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데요. 하, 그래요.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서 뭐 하겠어요.”

아리나는 짠한 표정으로 안젤리카를 쳐다봤다.

이번 평가가 악랄한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야말로 정보의 빈익빈 부익부.

정보 격차가 벌어지는 만큼 늦게 타임라인을 시작한 유저의 플레이가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때, 푸른 머리 영애가 손뼉을 치며 가방을 뒤적였다.

“저 오늘 태블릿 가져왔는데. 안젤리카 영애, 제 걸로 팁 글 읽으세요.”

푸른 머리 영애가 태블릿을 꺼내 안젤리카에게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아리나도 내게 태블릿 피시를 내밀었다.

“저도 가져왔는데 데이지 영애는 제 걸로 읽어요.”

시스템이 계급을 나눴는데도 그들은 보란 듯이 제 권리를 우리에게 나눠 줬다.

나는 울컥한 마음을 누르며 태블릿을 받았다.

“흑, 영애들 제가 잘할게요.”

“그럼 영애가 카페 쏘는 거예요?”

“네! 더 시키세요! 골든벨 흔들겠습니다!”

영애들은 장난이었는지 웃기만 할 뿐 주문하지 않았다.

아니, 나 이제 돈도 많은데!

나는 알아서 모두의 음료를 새로 주문하고 천천히 커뮤니티 글을 읽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안젤리카와 내가 게시물 읽기에 집중하자 시에나가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이렇게 만나서 보여 주면 되겠어요.”

“그래요. 이 김에 정기 모임 일자를 정하죠.”

그들은 순식간에 모임 일정을 짰다.

나는 뭉클한 마음으로 그녀들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 표정을 오해한 시에나가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래도 상황이 뉴비 영애들한테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에요. 100명의 타임라인이 시작됐다는 건 이제 모두가 [결]을 칠 수 있다는 뜻 같거든요.”

“이제 모두가 [결]을 칠 수 있다고요? [결]은 원래 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남주한테 시나리오가 내장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안젤리카가 눈을 깜빡이며 묻자 아리나가 설명해 주었다.

“그동안은 남주를 선택하고 [전]을 시작해도 [결] 스테이지로 넘어가지 못했거든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결]이 동시에 끝나야 해서 다른 여주들을 기다리는 거 아니냐고 했는데, 그 추측이 맞나 봐요.”

옆에 있던 푸른 머리 영애가 거들었다.

“마지막 영애가 [결]을 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 같다는 뜻이죠.”

시에나는 다시 웃으며 나와 안젤리카를 번갈아 쳐다봤다.

“좋은 거예요. [전] 스테이지를 7년이나 진행한 영애들도 있는데, 뉴비 영애들은 남주만 선택하면 금방 [결]로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요. 플레이 기간에 비해 20억을 빨리 타니까 가성비가 좋잖아요.”

그때, 시에나가 게시물 하나를 보여 줬다.

“보세요. 영애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니까요.”

[결]의 시기를 예상하는 게시글이었다.

댓글 반응을 보니 다들 늦게 들어온 사람이 부럽다고 말하고 있었다.

┗ 3개월 미만 뉴비 영애들 최고의 가성비 서사 인정합니다ㅠ

┗ 맞아, 현생 그리워할 틈도 없이 20억 타는 거잖아

┗ ㅇㅈ 스토리 빡세게 쌓은 영애들은 번아웃도 겪는데 울 뉴비들은 캐릭터에 동화되기도 전에 나가네

그때, 한 단어가 눈을 사로잡았다.

번아웃이라.

디아나와 아이시스가 생각났다.

그녀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순위를 물어봤는데 디아나와 아이시스는 3위 8위, 10위권 내 상위권이었다.

나는 잠시 그녀들의 일상을 떠올려 봤다.

연말 공연에 오지 못할 정도로 캐릭터 본업에 매여 지내던 그들의 삶.

법안도 만들고, 새벽에 일어나 기도도 하는데 그분들에 비하면 나는…… 그치, 너무 날로 먹었어.

내 삶을 반성하며 워치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흠칫했다.

벌써 오후 2시였다.

비록 내게 본업은 없지만, 스케줄은 있었다.

본업 빽빽한 남주들과 엮인 죄로 하사받은 업보였다.

새해에 얘기 좀 하자더니, 엘런이 이에테르가 저택으로 정식 초대장을 보냈다.

이름 걸고 초대를 하는 걸 보니 좀 겁이 났다.

‘……혹시 차명계좌 걸린 건가.’

걸렸다고 해도 여긴 금융 실명제법이 없으니까 큰일 나지는 않겠지? 슬롯에 담긴 엘런이 나한테 나쁜 짓을 할 리도 없고 말이야.

슬롯에 일찍 담아 두길 잘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오늘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볼게요.”

“3시에 엘런 공작이랑 약속 있다고 했었죠. 얼른 들어가요.”

“네, 다음에 또 봐요.”

나는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왔다.

마차를 타고 바로 카이엘드가 황도 저택으로 가는데 뭔가 이상했다. 오늘따라 황도가 한가했다.

그 덕에 카이엘드가의 황도 저택에 일찍 도착하고 말았다.

“도착했습니다. 레이디.”

시계를 보니 20분 만에 도착했다.

초대 시간보다 일찍 방문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마부에게 근처를 한 바퀴 돌고 오자 말하려 했는데 덜컹, 높은 철문이 열렸다.

문지기가 이에테르가의 문장을 확인하고 바로 문을 연 모양이었다.

내가 뭐라 말을 할 새도 없이 마부가 저택 안으로 마차를 몰았다.

나는 마차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거 응접실에서 30분 동안 눈이라도 붙이고 있어야겠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게 좀 찜찜하긴 했지만, 나는 늦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여기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불안한 촉은 괜히 오는 게 아니었다.

***

“……공작님, 전 밖에서 기다려도 되는데요.”

‘기다리고 싶은데요.’라는 뜻을 담아 말하는데 엘런이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아니, 내가 안 괜찮다고.

엘런의 집무실 안. 나는 교장실에 최후 면담을 온 학생처럼 그의 집무실 책상 앞에 뻘쭘하게 앉아 있다.

집사가 일찍 도착한 나를 응접실이 아닌 공작의 집무실로 안내했기 때문이다.

엘런은 가주답게 일에 파묻혀 지내는 모양인지 책상에 서류가 가득했다.

흘깃 시선을 든 엘런이 나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내 생각이 짧았어. 거의 2주 동안 보지 못했으니 그대에겐 참기 어려웠을 텐데.”

그리고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쓰게 웃었다.

“그래도 30분이나 일찍 올 줄은 몰랐어. 물론, 그대의 마음을 미리 헤아리지 못한 내 불찰이지. 금방 처리할 테니 기다리는 동안 편하게 보고 있어.”

엘런은 제 앞쪽에 쌓인 높다란 서류 뭉치를 한 손으로 밀었다.

제 얼굴을 좀 더 편하게 감상하라는 뜻이었다.

떫은 눈으로 쳐다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오만한 미소까지 머금었다.

이 자식 또 시작이네.

서류에 집중하는 엘런을 보고 있으니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단순히 착각질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94위가 된 게 이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내가 노잼인 것도 문제지만, 주변 캐릭터도 문제였다.

남주들이 개연성을 집어던지고 멋대로 캐붕을 했으니까 내 성적이 이 모양인 거다!

엘런과 라리사 아버님(직업: 봄국 황제)이 내 [기] 스테이지에서 벌인 캐릭터 붕괴는 역대급이었다.

내가 독자여도 탈주할 미개연성 그 자체.

얼마 전, 꼴찌에 가까운 성적표를 받은지라 나는 예민한 상태였다.

누구라도 탓하고 싶었는데 마침 앞에 [기]를 망친 놈이 있으니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집요한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 엘런이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갑자기 뒤돌아 손을 뻗었다.

촤악.

뒤쪽 창의 커튼을 친 엘런이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미안. 역광이면 잘 안 보일 텐데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어.”

“……제가 졌어요.”

“음? 무슨 소리야?”

나는 답답한 숨을 길게 내쉬고 그냥 본론을 들이밀었다.

“아니에요. 그나저나 왜 부르신 거예요?”

30분을 기다려 주다가는 책상에 올라가서 엘런의 멱살을 잡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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