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04화 (105/208)

104화.

내가 하위 30위라고?

나는 현실을 부정하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곧 분노가 몰아쳤다.

너희 나 메인 스토리에 끌고 가서 겨울산 등반시키고, 납치 시도도 하고, 흑막한테 노예 계약도 시켰으면서…… 하위 30위를 줬다고?

그때 AI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1차 중간 점검은 [기] 스테이지 기준입니다. 유저의 [기]는 겨울산 등반까지 반영됩니다.]

나는 내 [기]를 반추했다.

데뷔탕트에 갔다가, 탐사대로 끌려갔다가, 겨울산에서 사무 노동과 등산을 했다.

‘……노잼이네.’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캐릭터 롤도.

검사와 성인 그리고 지식인의 비중은 매우 큰 차이가 났다.

지식인은 진실을 밝힐 때 한 번 등장해 사이다를 안길 뿐, 웬만하면 전쟁도 안 따라갔다.

결말도 그랬다.

평화를 가져온 검사와 마법사가 명예를 누릴 때, 지식인은 소박하게 고향에 돌아가서 첫사랑과 사랑을 하니까.

아무리 시리즈가 흥행해도 캐릭터 이름조차 기억 못 하는 사람도 있으니 내가 이 세계관에서 얼마나 존재감이 없을지 알 만했다.

나는 빠르게 자아 성찰을 끝내고 반짝이는 시스템 창을 쳐다봤다.

[유저의 순위를 확인하시겠습니까?]

그래도 70위권이겠거니, 안일한 생각으로 수긍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성적표가 눈앞에 펼쳐졌다.

[유저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의 순위는 94위입니다.]

94등?

살면서 백분위 50% 아래로 내려가는 성적을 받아 본 적이 없던지라 94%의 백분위는 충격적이었다.

내가 하위권인 걸 떠나서 94라는 숫자가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설마, 시스템 버그율 94%라고 놀렸다고 94위를 준 걸까?

오죽하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머리가 음모론을 구상했다.

“영애, 무슨 일 있어요?”

마녀 영애가 내게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앞에 있던 음료를 마셨다.

“그럼 이제 내려갈까요? 영애가 가져온 이능의 부산물도 배부해야죠.”

“아, 아. 네 얼른 내려가요.”

나는 멍해진 정신을 붙잡고 마녀 영애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도무지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가 94위라니!’

***

아무리 대한민국이 경쟁 사회라 한들 하위 94% 아래에 랭크되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6%의 희박한 확률을 뚫고 얻은 등수니까.

마차에서 내린 나는 협회 창틀에 앉아 있는 새를 쳐다봤다.

94등 여주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불쾌한지 새가 푸드덕거리며 날아갔다.

‘94등 여주 처음 보냐고.’

사소한 자극에 열등감이 폭발한다.

그만큼 94등의 충격이 컸다.

나는 울적한 마음을 누르며 삼시 세끼를 겨우 챙겨 먹고, 적당하게 놀러 다니고, 겨울국 재건 협회에도 자주 방문해 안젤리카를 가르쳤다.

언뜻 잘 지낸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비통하게 지냈다.

[…….]

AI는 내 정신건강을 걱정하는지 요즘 부쩍 저렇게 노이즈를 보내며 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됐어. 너희 다 한통속이잖아.

나는 울적한 마음을 삼키며 협회 홀을 가로질러 교육실로 향했다.

달칵.

“일찍 오셨네요!”

먼저 온 안젤리카가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네. 잘 지냈어요?”

나는 안젤리카에게 인사하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헤헤, 이제 녹스가 저희를 믿나 봐요. 영애랑 둘만 있게 두는 걸 보면.”

“우리가 그동안 신뢰를 잘 줬죠. 그리고 본인도 많이 바쁘니까.”

순위 공개로 마음의 상처는 받았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일에 충실했다.

물론, 할 일을 안 하면 녹스에게 죽을 수도 있으니 열심히 한 거지만.

시스템. 아무리 생각해도 내 적은 저놈이다.

하드 플레이로 신체적 위협을 가하더니 이제는 멘탈을 털고 있다.

그때, 안젤리카가 히죽 웃으며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상자를 열었다.

“오늘 녹스가 이걸 주고 갔어요.”

그 안에는 가죽 커버가 씌워진 책이 하나 있었다.

안젤리카가 신난 목소리로 커버를 열고 내게 보여 줬다.

“삽화가 아주 예술이죠? 역시 로판은 삽화예요.”

“그 삽화는 이 삽화가 아니지 않나요?”

그녀는 모든 상황을 웹소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 안젤리카는 99등을 했는데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순위 그거 먹는 거예요?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는 반응이었다.

멘탈이 좋은 건지 아니면 아직 캐릭터에 동화되지 않아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부러웠다.

나는 신경 쓰기 싫어서 괜히 더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있는데.

최근 2주 동안 나는 녹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틀에 한 번꼴로 협회에 찾아왔다.

녹스를 만나 안젤리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를 교육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또 앞으로 필요한 서적에 대해 논의도 했다.

‘뭔가 학부모 상담 같았지.’

어쨌든 녹스는 바쁜 놈이었고,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일정을 방해하며 열정적인 선생님 역할에 충실했다.

협회장의 집무실에서 안젤리카에게 책을 읽어 주고, 교재 명목으로 구하기 힘든 고서를 구해 달라고 조르니 그는 아예 나를 격리하듯 이렇게 교육실을 만들어 줬다.

교육실로 우릴 쫓아낸 뒤로 한 두 번은 예의상 얼굴을 비추더니 이제는 아예 오지 않았다.

심리 조종의 기본 스킬.

밀당.

역시, 밀당은 어디서나 통한다.

내게 집착하던 녹스를 내가 몇 배 더 집착하며 쪼아 대니 그가 슬슬 내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나는 책을 펼치며 피식 웃었다.

상대적으로 인쇄술이 덜 발전한 중세 세계관 봄국. 이곳의 책은 귀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림책이라니. 사용된 염료 값만 해도 어마어마할 텐데 녹스는 생색도 안 내고 내가 부탁한 책을 학생 편에 보냈다.

녹스가 나를 얼마나 만나기 귀찮아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좋아. 이제 학부모 참관은 끝났다.

나는 뿌듯한 미소를 입에 머금고 책을 폈다.

“영애, 이건 겨울국 마지막 황제가 봄국으로 가져왔다는 책이에요.”

“오오, 제 할아버지가 가져온 거네요?”

“그렇죠.”

나는 AI에게 이 세계관에서 가장 구하기 힘든 책이 무엇인지 물었다. 겨울국이나 마족 지대와 관련된 서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녹스에게 힘든 퀘스트를 주어 괴롭힐 생각으로 한 말이지 필요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리고 AI는 겨울국 마지막 황제가 가져왔다는 저 일기가 가장 구하기 힘든 서적이라고 알려 줬다.

봄국 황실의 비밀 금고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녹스는 단 3일 만에 저걸 구해 왔다.

나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봄국 황실에도 녹스가 제 사람을 깔아 둔 모양이네.

겨울국 협회의 네트워크가 슬슬 궁금해진다.

응. 궁금함 끝.

여기까지 고민했으면 충분해.

흑막의 계획을 알아봤자 94위 여주가 뭘 할 수 있겠어?

나는 호기심을 버리고 다음엔 어떻게 녹스를 괴롭힐지 고민하며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종이가 좀 이상했다.

“재질이 두툼한 건 줄 알았는데 풀칠을 해 둔 거네요?”

드로잉 북처럼 두꺼운 종이인 줄 알았더니 얇은 양피지에 풀을 발라 두세 겹으로 겹친 종이였다.

뭐야. 왜?

이제 이런 쓸데없는 설정이 나오면 불안해진다.

안젤리카가 환하게 웃으며 종이를 쓸었다.

“제 생각에는 풀이 아니라 회반죽 같아요. 석고 반죽에 그림을 그리는 화법이 있거든요. 여긴 중세니까 아무래도 그런 설정을 따른 게 아닌가 싶어요.”

“황제한테 남는 게 석고벽일 텐데 왜 굳이 양피지에 석고를 발라서 그림책을 만들었을까요?”

“벽에 그리면 사람들이 보니까 작게 그려서 숨겨 두려고?”

“그럼 그냥 종이에 다른 도구로 그리면 되잖아요?”

“오래 보관해야 해서 그랬던 걸까요?”

물음표 살인마가 된 내 질문에 안젤리카는 짜증을 내기는커녕 진지하게 같이 고민을 해 줬다.

뭐가 됐든 좀 수상하네.

황제에게 예술혼이 불타는 군주라는 설정이라도 있던 걸까?

‘그래도 그렇지 전쟁 중에 왜 그림을 그려?’

겨울국 마지막 황제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이능을 타고난 황족이었다고 했다.

호전적인 그는 거의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고, 그 삶을 즐겼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계속된 승전 덕분에 자신감을 얻은 건지 호기롭게 3국의 지원 없이 홀로 군사를 이끌고 마왕에 맞서기도 했다.

뭐, 결국에는 여동생을 마왕에게 넘기고 목숨만 겨우 구했지만.

하여튼 그런 전쟁광이 그림에 취미를 붙였다니.

인간은 참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림을 보는데 알람이 들렸다.

[해당 고서는 마족 지대의 물건입니다. 정보를 서치 하시겠습니까?]

엥?

마족 지대의 책?

뭐야, 이거 황제가 마족 지대에서 훔쳐 온 거야?

나는 AI의 조언대로 버프를 켰다.

[특성 버프 ‘마족 정보 검색’ ON]

‘<겨울국 마지막 황제의 일기장>에 대해서 알려 줘.’

[정보 서치 중.]

[실패했습니다.]

[해당 검색어에 해당하는 정보가 없습니다.]

[‘겨울국 황녀의 일기’를 자동 검색어로 추천합니다.]

마치 검색어 오류를 지적해 주는 검색 엔진처럼 버프가 자연스럽게 책 이름을 수정했다.

……뭐야, 이건 또.

일단 궁금하니 정보는 읽고 생각하자.

‘응. 겨울국 황녀의 일기로 검색해줘.’

[죄송합니다. ‘겨울국 황녀의 일기’는 시즌 2에 오픈될 정보로 현재 열람이 불가합니다.]

“아, 이놈의 시즌 2.”

상태창을 노려보며 분노하자 안젤리카가 움찔했다.

“시즌 2요?”

“네. 시즌 2를 만드는 모양인데, 뭘 물어보면 맨날 시즌 2의 내용이라고 대답을 피해요.”

“아하, 그럼 이 책이 시즌 2에 나오는 아이템 같은 거예요?”

“그런가 봐요. 중요한 물건 같기는 하네요.”

근데 이상하네?

이거 내가 AI 담당자님한테 구하기 힘든 겨울국 책이 뭔지 물어봐서 구한 거잖아.

‘겨울국 마지막 황제의 일기장’이라고 이름까지 알려 줬는데, 왜 갑자기 이름이 바뀌어?

[그 비밀은 시즌 2에서 밝혀집니다.]

[궁금하다면, 지금 시즌 2를 사전 예약해 보세요!]

이 자식 또 영업하는 거 봐.

나는 틈새 광고를 무시하고 그림이나 살폈다.

뻣뻣하게 굳은 종이 위로 예쁜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그리고 바로 옆 장에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 가 아니라 남자네?

남자는 반나체 차림이라 상반신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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