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03화 (104/208)

103화.

프리마돈나가 상황을 정리했다.

“다들 진정하시고. 이제 카운트다운 할까요?”

그녀의 말에 워치를 확인했다.

벌써 11시 58분이었다.

프리마돈나는 낭랑한 목소리로 안내했다.

“손 높이 들고 화면을 켜 주세요!”

어둑한 정원에 반딧불이 떼가 나타난 것처럼 수십 개의 작은 빛이 반짝였다.

손목에 감긴 워치의 불빛이었다.

유저들은 고개를 높이 들고 밤하늘과 워치 화면을 동시에 바라봤다.

정원이 고요해졌다.

나도 숫자를 응시하며 느리게 넘어가는 시간을 읽었다.

상태창 시간이 23:59:50이 되었을 때, 프리마돈나가 노래하듯 나긋하게 말했다.

“이제 십 초 남았네요.”

그녀가 말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다.

“시작할게요. 오!”

수많은 목소리가 그녀를 따라 함께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사!”

나도 목소리를 얹으며 사라져 가는 숫자를 읊었다.

“삼!”

“이!”

“일!”

길게 늘어진 소리가 함성과 어지럽게 뒤섞였다.

“해피 뉴 이어! 새해에도 잘 부탁드려요!”

프리마돈나가 기쁜 목소리로 새해 인사를 하자 다들 함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우리의 목소리는 곧 폭죽 소리에 파묻혔다.

팡, 파방, 팡!

은하수를 감싼 성운 위로 채도 높은 빛이 얽혀 들었다.

방금 짜낸 오렌지 과즙처럼 선명한 주황색 불꽃이 어둠 위로 산뜻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와……!”

“예쁘다.”

기쁨 어린 탄성과 숨을 삼키는 소리가 섞였다.

나는 넋을 놓고 감색 도화지에 그려진 불꽃을 감상하다 마녀 영애에게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저것도 영애가 하신 거예요?”

마녀 영애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긍정이었다.

“감사합니다. 너무 예뻐요.”

나만을 위해서 준비한 불꽃놀이가 아닌데도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냥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하늘을 가르는 파열음과 함께 가슴속에서 터졌다.

수많은 사람과 함께 새로운 시간의 첫 장을 넘기는 기분이 벅찼다.

낯선 유대감이었다.

같은 세상에서, 같은 시간을 살고 또 비슷한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과의 연대.

같은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즐거운 감정에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나는 감상에 빠지다 흠칫하고는 고개를 털어 냈다.

아, 술 적당히 먹어야지.

그래도 입가에 걸린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유는 설명하기 힘들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분위기에 취한 거라고 하자.

페스티벌 특유의 에너지와 봄밤의 청량한 날씨가 사람을 들뜨게 한 거다.

나는 생전 처음 느끼는 낯설고 간지러운 감정을 밀어내며 차츰 이성을 되찾았다.

그런데 그때, 팡파르 소리가 들려왔다.

파바바바방.

그리고 웅성거림이 시작됐다.

눈앞에 상태창이 켜졌기 때문이다.

[축하합니다! 의 모든 유저의 타임라인이 시작됐습니다.]

시스템의 공지였다.

[모든 유저의 [기] 스테이지 공략이 확인되어, 중간 평가를 시작합니다.]

[평가에 따라 유저에게 리워드와 페널티 지급을 실시합니다.]

리워드와 페널티?

저게 무슨 소리야.

나만 당황하는 게 아니었다.

영애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숲까지 흘러왔다.

“웬 리워드?”

“페널티는 또 뭐야?”

화자를 알 수 없는 목소리에서 기대감과 두려움이 희미하게 묻어났다.

그러나 시스템은 우리의 혼란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제 공지를 이어 갔다.

[1차 중간 평가는 [기] 스테이지를 기준으로 랭킹을 선정했으며, 최종 랭킹과 다를 수 있습니다.]

중간 평가와 순위.

이 미친 게임이 기어코 성적표를 공개하겠다는 뜻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상위 30위 유저에게는 리워드를, 하위 30위 유저에게는 페널티를 지급하며, 중간 순위 40명의 유저는 리워드와 페널티 없이 그대로 플레이를 이어 갑니다.]

[상위 30위 리워드: 10만 캐시]

[하위 30위 페널티: 커뮤니티 차단]

[※ 1차 중간 평가 기념으로 품절된 아이템이 모두 재입고되었습니다. 재입고 수량은 각 50개! 지금 바로 상점에 방문해 보세요.]

시스템은 리워드와 페널티를 소개하고는 알차게 경쟁까지 부추겼다.

10만 캐시를 받는 영애들은 30명.

입고된 아이템은 각 50개.

언뜻 수량이 넉넉해 보이지만, 아니었다.

아이템은 상위 레어템일수록 수요가 몰리는 경향이 있었다.

내 기억으로 제일 비싼 아이템인 남주 교환권의 가격은 1만 캐시였다.

만약 내가 10만 캐시를 받는다면, 나는 당연히 비싼 남주 교환권부터 구매할 거다.

캐시는 유저 사이에서 교환될 수 없지만, 아이템은 교환될 수 있었다.

아이템은 희소할수록 나중에 다른 유저와 교환할 때 유리하니 지금 딱히 필요한 아이템이 없다면 입고된 김에 가장 수요가 높은 아이템을 고르는 게 좋았다.

그러니 기껏 보상을 받았어도 상점에 늦게 들어가면 원하는 아이템을 구매하지 못할 게 뻔했다.

그때 갑자기 숨을 들이켜는 격한 소음이 들렸다.

“헉!”

“나, 난가?”

“상점 열어 주세요!”

상위 30위 영애들에게 개인 알람으로 포상이 지급된 듯했다.

영애들은 어디 가서 상점에 접속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바로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었다.

어떤 영애는 얼마나 급한지 AI를 육성으로 불렀다.

나와 마녀 영애는 오두막 난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마녀 영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상점 들어가신 영애들 30명 넘는 거 같은데요?”

“평가 전에 캐시 쌓아 둔 영애들도 이 기회에 상점에 들어갔나 봐요.”

아쉬워하는 영애들이 보이고 어떤 영애는 주변을 돌아보며 교환 제안을 하고 있었다.

“아! 하나 남았었는데!”

“혹시 남주 교환권 사신 영애 있어요? 저랑 아이템 교환하실 분?”

순식간에 레어 아이템이 품절된 듯했다.

과열된 분위기가 조금 무서웠다. 그런데 나와 달리 마녀 영애는 차분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런 일이 또 있었나요?”

“네, 가을국 이벤트랑 비슷하네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가을국 이벤트도 5명한테 로또처럼 캐시를 지급하고 아이템을 채워 놓거든요.”

그녀가 씁쓸히 미소를 지었다.

“주변에 캐릭터가 있는데도 저렇게 아수라장이 되죠.”

마녀 영애의 시선이 내게로 흘러왔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내 어깨를 쓸었다.

“순위에 너무 목메지 말아요. 스트레스받으니까.”

“영애는 아이템 욕심 안 나세요?”

“글쎄요. 저는 딱히 남주를 바꾸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이템은 복잡해서 싫어요.”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애초에 빨리 [결]을 치고 싶었다고 말했다.

마녀 영애를 보니 시에나가 생각났다.

경쟁에 초연하던 그녀는 내게 S급 남주가 누군지 발설하지 말라고 부탁했었다.

이 모습을 보니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갔다.

아늑하다고 여겼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경직됐다.

그래, 이거 랭킹 게임이지.

알고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울적했다.

밤바람이 괜히 차게 느껴져서 나는 담요를 더 끌어 올렸다.

그런데 무대에 또 난장이 일었다.

조그만 아이가 낑낑거리며 무대에 매달린 것이다.

프리마돈나가 손을 잡아 올려 주자 아이가 무대의 한가운데에 섰다.

라리사였다.

그녀가 손을 뻗자 프리마돈나가 얼결에 마석을 건네주었다.

라리사는 침착한 얼굴로 허리를 한 번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티켓팅, 아니 구매에 실패해서 상심했을 영애들에게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라리사는 상태창을 켰는지 허공을 보며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남주 교환권 5개, 30분 회귀권 5개, 남주 시점 전개권 5개…….”

그녀는 마치 경매사처럼 담담히 아이템명을 읊었다. 그러고는 비장한 얼굴로 덧붙였다.

“제가 쓸었습니다.”

무슨 말이야, 저게?

옆에서 마녀 영애가 혀를 찼다.

“저 황녀 영애, 여전히 손이 빠르시네.”

“라리사 영애가 손이 빨라요?”

“네, 돈도 많고 손도 빠르고. 황녀 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요.”

“돈도 많으세요?”

“아, 모르시는구나. 라리사 영애 버프가 사기잖아요.”

대부분의 영애가 사기 버프를 가진지라, 마녀 영애가 저렇게 말하니 호기심이 일었다.

“아빠랑 오빠를 유저나 캐릭터한테 소개해 주면 500캐시씩 들어온대요. ‘우리 아빠랑 결혼해 쥬오’였나. 이름이 좀 이상한 버프였는데.”

“…….”

더 이상 버프 박탈감을 느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대한 공허함에 잠식됐다.

황녀 영애를 향한 시스템의 편애에 눈이 흐려졌다.

나도 편애받고 싶어.

제발 한 번만 받아 보고 싶어!

부질없는 소원을 빌며 라리사의 말을 들었다.

“30분 회귀권 하나만 사려고 했는데 실수로 장바구니에 담아 뒀던 아이템을 일괄 구매하고 말았네요. 사과하는 마음으로 공익을 위해 아이템을 기부하겠습니다. 커뮤니티에 아이템이 필요한 사정을 공유해 주시면, 여론에 따라 아이템이 꼭 필요해 보이는 영애에게 아이템을 전달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일었다.

그리고 격한 반응이 쏟아졌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역시 황녀다!”

“황녀님을 국회로!”

“그건 안 되죠! 의회제 정착하면 황권 약해지는데!”

“아, 죄송합니다. 제가 정치 서사는 스킵하고 보는 타입이라.”

뭔가 이상한 말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순식간에 날 선 분위기가 사라지고 콘서트 분위기가 살아났다.

“라리사! 라리사!”

라리사는 의젓하게 환호를 받다가 대중이 원하는 것을 바로 캐치했다.

“제가 또 뭐 드릴 건 없고, 올라온 김에 춤이나 추고 가겠습니다.”

그녀는 한 동영상 플랫폼에서 유행했던 춤을 췄다. 빙의 전에 여러 연예인이 따라 한 걸 봐서 아는데, 그녀는 춤을 추는 게 아니었다.

그냥 4등신의 앙증맞은 신체로 30초간 씰룩거리는 거였다.

제 외모를 믿고 몸을 막 쓰는 게 괘씸한데도 웃음이 터졌다.

으으, 자존심 상해.

“라리사 영애도 방송하던 사람이었을 거 같아요.”

“저도 그 생각 했어요.”

마녀 영애와 나는 이어지는 공연을 구경했다. 영애들 몇 명이 무대로 올라와 갑자기 댄스 배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왜 여주들이 개그 욕심을 내는지 모르겠으나 다행히 분위기는 좋아졌다.

그런데 겨우 따뜻해진 분위기 속으로 시스템이 또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유저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는 하위 30위에 랭크되었습니다.]

개인 알람이었다.

[지금부터 커뮤니티 접근이 차단됩니다.]

[유저의 상세 순위를 확인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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