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K-POP은 군무가 생명이잖아요.”
마녀 영애는 불빛을 초록색으로 바꾸며 대답했다.
“이제 군무가 시작될 거예요.”
그녀가 웃으며 덧붙였다.
갑자기 등불이 움직이더니 초록빛으로 선을 만들었다.
……뭐야, 레이저 효과인가?
쿵쿵쿵쿵.
그 말을 증명하듯 격한 타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빠른 박자에 맞추어 현란한 군무가 시작됐다.
어색하면 숙연해질 만한데, 영애들은 황립 발레단 출신이기라도 한 모양인지 유연함을 무기 삼아 화려하게 춤 선을 그려 냈다.
나는 신기해서 그들을 넋 놓고 보다가 물었다.
“아니…… 저 영애들은 뭐 하는 분들이세요?”
“제일 왼쪽에 있는 분은 가을국 수석 발레리나 영애시고, 두 번째 있는 분은 여름국 수인 영애고…….”
“키스카 영애도 여기 왔어요?”
“수인 영애도 알아요?”
알죠! 알다마다요.
나는 내가 생각보다 바쁜 전개를 펼쳐 왔음을 깨달았다.
아는 인물이 꽤 많았다.
화려한 무대를 보고 있으니 문득 플랫폼에 호기심이 들었다.
대체 설문 조사 문항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을 쓴 걸까.
설문 조사, 그것은 MBTI보다 더 뛰어난 캐릭터 분석력을 자랑했다.
‘……영애들, 왜 이렇게 본인 캐릭터에 진심인 거예요.’
어떤 심리학자가 그 문항을 만든 건지 궁금해졌다.
쿵쿵 심장을 울리는 음악을 들으며 다시 마녀 영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조명을 다루던 마녀 영애가 나를 힐긋 쳐다봤다.
“왜요?”
“근데 저 레이저 효과는 몰입감 페널티를 안 받나요?”
“네, 무대 조명은 생각보다 역사가 오래돼서 그런지 페널티가 없더라고요.”
“확성 마법도 뭔가 음……. 몰입감 페널티를 받을 거 같은데.”
“확성 마법은 이미 언급된 로판 작품이 많아서 플랫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대요.”
“인이어가 나온 로판은 없었나요?”
“그런가 봐요. 생각해 보면 제가 본 로판에서도 없었어요.”
하긴, 나도 못 본 것 같긴 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K-로판에는 현생 문화를 반영한 설정이 꽤 많았다. 마석으로 조명과 소리를 다루는 건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무대 위에서 군무를 펼치는 영애들과 앞에서 졸도 직전으로 소리를 지르는 영애들을 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K-POP 부르는 로판은 못 본 거 같은데, 이것도 괜찮은 거예요?”
“전자음을 내는 것도 아니고 크게 보면 오페라나 뮤지컬이니까 괜찮은가 봐요. 전 본 적 없는데 빙의 여주가 현생 문화를 소개하는 로판도 은근 있었다더라고요.”
전자음이 들어가는 대신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배경으로 공연을 해서 괜찮은 모양이다.
“뭐, 시스템의 기준을 우리가 알 수 있나요.”
마녀 영애는 사실 자신도 필터링의 기준을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나저나 데이지 영애는 플레이한 지 정확히 얼마나 된 거예요?”
마녀 영애는 에일을 마시며 내게 몸을 틀었다.
“아, 저는 2개월하고 2주 정도 됐어요.”
마녀 영애는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나도 궁금한 게 있던지라 그녀에게 물었다.
“영애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요.”
“전 이름이 없어요.”
“네?”
이름이 왜 없어?
놀라 눈을 깜빡이자 마녀 영애가 피식 웃었다.
“이름 적기 싫어서 설문 조사 때 공란으로 뒀더니 정말 이름 없는 캐릭터로 배정됐어요.”
“에이, 설마요.”
“정말이에요. 저는 이름 칸에도 작은따옴표 두 개 사이에 공백만 떠요.”
“왜 이름을 안 쓰셨어요?”
“만약에 누군가가 될 수 있다면,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캐릭터가 되고 싶어서 이름을 안 썼어요.”
뭔가 철학적인 거 같은데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취향 존중하자.
극도의 자유를 선호하실 수도 있지. 이름 없는 게 대수인가. 저 얼굴에, 저 마법에, 저 힙스러움을 다 가졌는데, 이름 정도야.
나는 혼자 끄덕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지금은 자유롭게 사시는 거 같은데 전개는 마음에 드세요?”
마녀 영애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고민하다 답했다.
“캐릭터는 만족스러운데 게임 자체는 모르겠어요.”
“왜요?”
“전개가 너무 느려서요.”
마녀 영애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말했다.
“남주를 선택하면 1년 안에 [결]로 갈 줄 알았는데, 3년째 [전]을 하고 있거든요.”
“……3년째요?”
“네, 어쩌면 [결]은 다 같이 치는 건가 싶어요. 듣기로 아직 [결]을 친 영애는 없다더라고요.”
그래도 그녀는 금세 아쉬움을 털어 냈다.
“그렇지만 캐릭터나 세계관은 좋아서 마음에 들어요.”
마녀 영애는 크래커 하나를 입에 넣으며 물었다.
“데이지 영애는 지금 어디까지 끝냈어요?”
“저는 얼마 전에 [승] 글자 수를 다 채웠어요.”
“곧 남주 선택하시겠네요.”
“그래야죠.”
“천천히 해요. [전]만 몇 년 할 수도 있거든요. 나처럼.”
마녀 영애는 내 잔이 빈 걸 확인하고는 다시 맥주를 채워 줬다.
나는 조용히 술을 마셨다.
그리고 마녀 영애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공연을 즐겼다.
수풀을 헤친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머리칼을 간질였다.
봄바람은 환희 가득한 인간의 소음을 밀어내며 적당히 숲의 소리를 얹었다.
시선을 조금 더 높이 들자, 나뭇잎으로 어설프게 오려 낸 밤하늘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비에 젖은 수채화처럼 주황빛 성운이 번진 하늘.
“예쁘네.”
나도 모르게 흘린 감탄사에 마녀 영애가 웃었다.
“그러게요. 오늘 하늘이 예쁘네요.”
적당히 맞춰 주는 대답이었으나 나는 따뜻함을 느꼈다.
순간, 출처를 알 수 없는 만족감이 시야와 머릿속을 동시에 뒤덮었다.
분위기에 취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기분 좋은 미소가 입꼬리에 걸렸다.
다시 시선을 내리자 응원봉처럼 꽃을 흔들고 있는 영애들이 보였다.
“어, 저거?”
내가 양동이에 담아 둔 꽃을 들고 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녀들은 양심 있게 한 송이씩 가져왔다.
“다음엔 조명 대신 응원봉을 만들어 볼까 봐요. 재밌네요.”
마녀 영애는 장미를 흔드는 영애들을 보며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공연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내 머리끝에 걸려 있던 성운이 무대 위로 옮겨 갔을 때쯤, 프리마돈나의 목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곧 잔잔하게 속삭이던 미성이 마침표를 찍었다.
마지막 곡이 끝나자 정원에 깊은 여운이 감돌았다.
짝짝짝.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오며 누군가 프리마돈나를 애타게 불렀다.
‘날 가져라’, ‘남주 선택하지 마라’라는 이상한 말이 들렸지만, 그녀는 프로답게 못 들은 척 미소를 지었다.
마녀 영애는 프리마돈나가 일어서는 걸 보고 다시 불을 켰다.
하얗게 타오르는 빛이 금세 정원을 밝혔다.
프리마돈나가 바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와, 저 딱 카운트다운 10분 전에 공연 마쳤어요. 이제 이것도 3년 차라고 각이 딱딱 맞네요.”
그녀는 너스레를 떨며 행사를 진행했다.
그녀는 반짝거리는 얼굴로 웃으며 올 한 해 있었던 이야기들을 늘어놓은 후 커뮤니티의 수고를 치하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우리 황제 영애의 전개 수정이 생각나네요.”
그녀는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저 여러분 덕분에 인류애 풀 충전했잖아요. 현생 나가서도 그 따뜻한 집단 지성의 역사는 잊지 못할 거예요.”
“아악! 그런 말 하지 마!”
“영애, 못 나가요!”
“로그아웃 압수!”
누가 장난으로 크게 소리를 지르자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나는 따라 웃다가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안젤리카 영애도 왔으면 좋았을걸. 영애도 이 훈훈한 분위기를 봐야 하는데.
아쉬움에 절로 눈썹이 휘어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내년에도 저희 다 같이…… 어머!”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프리마돈나의 옆에서 공간이 작게 일그러지더니 한 여자가 나타난 거다.
“우윽.”
그녀는 바닥에 엎드린 채 헛구역질을 했다. 긴 머리칼로 바닥을 쓸던 그녀가 정신을 차린 듯 비틀비틀 일어났다.
안젤리카였다.
‘아, 스크롤 쓸 때 눈 감으라는 말을 안 해 줬구나.’
미안함에 미간이 일그러졌다.
안젤리카는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는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수십 명의 관중을 발견하고는 바짝 얼어붙었다.
안젤리카가 삐걱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프리마돈나 영애가 서 있었다.
안젤리카는 현실을 파악하듯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죄, 죄송해요! 제가 타임라인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스크롤 사용이 처음이라. 아아, 무대를 망쳐서 죄송합니다! 여기로 떨어질 줄 몰라서……. 정말 죄송해요!”
꾸벅 허리를 숙여 대는 그녀를 보며 모두 속으로 생각했다.
‘응. 뉴비구나.’
인자하게 풀어진 뒷모습이 딱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새였다.
“괜찮아! 괜찮아!”
관중석에서 영애들이 그녀를 위로하듯 한마음 한뜻으로 괜찮아 응원을 시작했다.
토끼처럼 바짝 긴장한 안젤리카는 부끄러운지 입술 콱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직관하는 프리마돈나 영애는 웃음 참기 챌린지 중이었다.
“뉴비 영애가 참 투명하네요.”
이쪽도 마찬가지다. 마녀 영애도 입술을 말아 물고 웃음을 참았다.
프리마돈나는 금세 여론을 파악하고 안젤리카에게 마석을 건넸다.
“영애, 처음 뵙는데 소개 좀 해주세요.”
안젤리카는 흠칫했지만, 저를 향한 뜨거운 눈길을 외면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긴 마석을 손에 쥐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며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3주 전에 타임라인 시작한…….”
“뉴비네!”
“영애~ 영애 키워드는 뭐예요?”
누군가 질문하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힘숨찐…….”
이번에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오오오오오~ 힘숨찐~!’하는 함성이 밀려왔다. 그리고 유저들은 장난치듯 책 제목을 던졌다.
“잠자는 그녀의 코털을 건드리지 마세요!”
“착하게 사는 건 쉽지 않아!”
“이번 생은 편하게 살겠습니다!”
안젤리카는 진지한 눈으로 질문자마다 고개를 저어 주며 성실하게 답했다.
본인은 몰랐겠지만, 청초한 외관과 어우러진 어리숙한 태도가 고인물 유저의 가학성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어렵다아아아! 힌트! 명대사 하나만 던져 줘요!”
누군가 묻자 안젤리카가 결심했는지 마석 마이크를 움켜쥐고는 비장하게 입을 벌렸다.
“이, 이건 마지막 기회예요.”
순간 정원이 고요해졌다.
뭐랄까.
민망함을 누르며 차분히 대사를 읊은 것 같은데, 닳고 닳은 고인 물의 눈에는…….
“꺄아아아아!”
“귀여워어어어어!”
“영애 남주 싸움 잘합니꽈아아아!”
귀여움 그 자체.
갑작스러운 고함 폭격에 안젤리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혼절 직전의 모습이었지만 영애들은 호락호락하게 안젤리카를 놔주지 않았다.
“뉴비 영애 존예예요!”
“청순가련!”
“내 호적 메이트랑 결혼해! 새언니가 되어 줘요!”
모두가 하나 된 순간.
고인물들은 뉴비 놀리기에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