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나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자기애 넘치는 이미지를 치워 냈다.
“아, 아뇨. 그, 취향이 비슷하다는 뜻이었어요. 마성의 매력을 가진 남주들 얘기하다가 친해졌거든요.”
“의외네요. 황제 영애가 남주 얘기하는 거 못 봤는데. 친한 영애들이랑은 남주 얘기를 하시는구나.”
잠들 새도 없이 일하는 워커홀릭 황제를 어떤 후궁의 처소에 들까 고민하는 문란한 황제로 왜곡한 기분이다.
디아나 미안해요.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우리는 저택에 도착했다.
입구에 영애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백금처럼 반짝이는 은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붙은 드레스는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인어의 비늘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옅은 하늘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길게 묶었는데, 그 단순한 헤어스타일이 완벽한 두상을 돋보이게 했다.
그런데 그녀의 귀에 하얀 마석이 박혀 있었다.
인이어인가?
그야말로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는 디바의 모습 그 자체였다.
“바바라!”
마녀 영애는 그녀와 친한 모양인지 바로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입체적인 선을 자랑하던 그녀의 옆모습이 천천히 정면으로 바뀌었다.
물빛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움찔했다.
완벽한 아이돌상.
덕질을 부르는 이상 속 몽환적인 비주얼이었다.
“이쪽은 봄국에서 오신 데이지 영애. 이능의 부산물 나눔 하신다고 글 올렸던 분이셔.”
“아, 나도 그거 신청했는데! 반가워요.”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바로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나중에 필요하시면 연락해 주세요. 저한테 이능의 부산물이 많이 있거든요.”
왜인지 나는 아까부터 계속 화훼농가 대표가 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러다 또 이상한 말을 할 것 같아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말씀이라도 감사해요.”
프리마돈나는 웃다가 뭔가 잘못됐는지 귀에 꽂은 마석을 다시 고쳐 끼웠다.
근데 현대 물품은 필터링 있다고 하지 않았나?
마석이라서 괜찮은 건가?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프리마돈나 영애에게 물었다.
“영애, 혹시 귀에 꽂으신 마석은 인이어인가요?”
그녀의 눈이 커졌다.
“……영애 이게 보이세요?”
마녀 영애도 놀란 듯 물었다.
“혹시 영애도 설문 조사 10점 줬어요?”
애초에 많은 관심을 받던 두 영애가 목소리를 갑자기 키운 탓에 주변의 이목이 쏠렸다.
나는 내게 몰린 시선이 부담스러워 당황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몰입감 항목 전부 10점 줬어요.”
그러자 주변에서 크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몰입감 항목 10점 준 영애시래.”
“대박이다. 로또 맞으셨네.”
“여름국은 가 보셨을까? 부럽다.”
대화 소리가 겹쳐지며 웅성거림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프리마돈나 영애가 내 손을 움켜쥐었다.
“저희도 10점 줬어요!”
“여름국 가 보셨어요? 거기서 현대 한식 먹을 수 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공감 요소에 마녀 영애와 프리마돈나 영애가 신나서 여름국 여행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그들도 적잖이 한식에 진심이었다.
나도 여름국에서 먹은 한식을 자랑했다. 그러자 두 영애는 말없이 손을 들어 내게 하이파이프를 권했다.
짝. 짝.
손을 맞대자 프리마돈나 영애가 웃으며 제 귀에 꽂힌 하얀 마석을 만지작거렸다.
“어쨌든. 이건 얘가 만들어 준 마석 인이어예요.”
“저희 둘은 10점이라, 이런 장비를 만드는 게 가능하거든요.”
마녀 영애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떼창이 너무 커서 자꾸 음을 놓치게 되더라고요. 확성 마법으로 인이어를 제작할 수 있는지 물었는데, 이 친구 손재주가 좋아서 가능했죠.”
나는 능숙하게 제 하얀 인이어 마석을 만지는 프리마돈나를 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영애 현생에서 공연일 하셨나요? 어떻게 인이어를 만들 생각을 하셨어요?”
나처럼 평생 인이어를 착용해 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 할 발상이었다.
“어차피 필터링 될 거 같아서 자세히 말은 못 하지만, 인이어 쓰는 일을 하긴 했어요.”
생긋 웃는 얼굴을 보니 나는 그녀의 현생 직업을 알 것 같았다.
저 상큼한 눈웃음.
과즙상으로 유명한 모 여자 아이돌이 떠오른 탓이다.
에이, 아니겠지.
아이돌이 무슨 웹소설을 읽어.
……설마, 읽으려나?
나는 머릿속에 차오른 의문을 치웠다.
그때 한 영애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바바라, 시간 다 됐어요. 이제 무대 가야죠.”
벌써 공연 시작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데이지 영애, 만나서 반가웠어요.”
나는 무대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프리마돈나가 무대로 올라가자 정원에 흩어져 있던 영애들이 소리를 지르며 무대 앞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 씁쓸한 숨을 삼켰다.
안젤리카 영애는 못 오는 건가?
나는 무대 앞으로 가려다 메시지를 먼저 확인했다.
‘담당자님, 안젤리카에게 온 메시지 있나요?’
[‘안젤리카 니에베 아우로라’에게 수신된 메시지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안젤리카는 오늘 못 오는 모양이다.
‘아쉽네.’
안젤리카는 나보다도 더 소심했다. 동생 눈치를 많이 봐서 노트북을 쓰지 못했고, 동생이 잠들면 태블릿 피시로 이불 속에서 몰래 커뮤니티 팁을 읽는 게 전부였다.
나는 그녀가 좀 걱정됐다.
이 AI 메시지 연동권도 사실 그녀가 내게 준 선물이었다.
며칠 전에 광고 감상을 포함한 캐시 적립법을 알려 줬는데, 그녀는 캐시를 얻자마자 내게 선물을 보냈다.
안젤리카 약간 호구 타입이란 말이지.
나는 안젤리카에게 묘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녀가 적응할 때까지 잘 보살펴 줘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책임감이었다.
아직 내 앞가림도 잘 못하면서.
“영애, 일단 꽃은 여기 내려 두고 우리도 공연 보러 가죠.”
양동이를 가져온 마녀 영애가 그 안에 짐을 내려 둘 것을 권했다.
“아, 감사합니다.”
나는 안고 있던 꽃들을 양동이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마녀 영애가 기지개를 켜며 내게 물었다.
“저는 조명 때문에 오두막에서 봐야 하는데, 영애도 그쪽에서 같이 볼래요?”
무대를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마녀 영애의 옆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웃으며 무대 맞은편 나무를 고갯짓했다.
“가요. 우리는 저 위에서 놉시다.”
마녀 영애는 프리마돈나 영애를 도와 계속 연말 파티를 진행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무대를 다루는 솜씨가 아주 능숙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조명을 세팅하고, 무대 양측에 자리한 귀족 영애들의 연주가 잘 들리도록 확성 마법의 크기를 적당하게 조절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마녀 영애가 오두막 안에서 바구니를 가져왔다. 그녀는 난간 앞에 털썩 앉더니 바구니 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녀가 꺼낸 건 담요였다.
“이거 덮어요. 밤에는 좀 쌀쌀하더라고요.”
“감사합니다.”
담요를 덮는 새 마녀 영애가 투명한 유리잔 두 개와 긴 호리병도 하나 꺼냈다.
“에일도 한 잔 마시고요.”
“와, 이건 언제 챙겨 오셨어요?”
그녀는 말없이 빙긋 웃으며 핑거 푸드를 담은 접시까지 꺼냈다.
나는 감동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영애는 완벽하신 분이군요.”
그녀가 웃다 뜬금없이 물었다.
“데이지 영애는 무슨 색깔을 제일 좋아하세요?”
“저요? 다 좋아하는데…….”
“그래도 골라 봐요.”
“음…….”
나는 고민하다 정면을 바라봤다.
선선한 밤바람을 타고 프리마돈나의 목소리가 정원으로 흘러왔다.
“올해는 제가 어떤 노래를 첫 곡으로 준비했는지 아세요?”
오프닝 인사를 하는 프리마돈나와 그 앞에 선 영애들이 한눈에 담겼다.
그리고 그 위로 쏟아질 듯 별이 가득한 밤하늘도.
특이하게도 이곳의 밤하늘은 얼룩덜룩했다.
별 사이로 안개처럼 퍼진 성운 때문이었다.
나는 그 오렌지 빛 성운을 보다 마녀 영애를 돌아봤다.
“주황색이요.”
“알았어요.”
그녀는 잔을 내려 두며 답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무대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현악기 연주가 슬며시 어둠 속으로 파고들었다.
실바람처럼 고막을 간질이던 연주 소리가 점점 커지고, 맑은 피아노 음이 봄비처럼 그 위로 톡톡 떨어졌다.
그때, 공중을 떠다니던 등불이 하나둘 밝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영애가 하신 거예요?”
마녀 영애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첫 곡은 베타 테스트가 시작된 당시에 가장 유행하던 드라마의 주제곡이었다.
예고편과 함께 경쾌하게 흘러나오던 주제곡이 머릿속을 두드렸다. 그 반동에 가라앉아 있던 현생의 추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들 괜히 그 드라마의 명대사를 중얼거리거나, 여주와 남주의 별명을 불러 보며 까르르 웃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로판 세상으로 분리된 유저들이 다시 제 현생 세계로 몰입하고 있었다.
가벼운 연주가 끝나자 바로 피아노의 독주가 시작됐다.
느리고 무거운 연주였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쓸쓸하고 고요한 음이 간간이 침묵이 메웠다.
프리마돈나는 마이크처럼 마석 막대를 잡고 위태로운 피아노 연주 위로 제 목소리를 얹었다.
인사를 건네듯 고막을 파고든 가사에 심장이 뛰었다.
또 그 드라마의 배경음악이었다.
없던 첫사랑을 만들어 기억을 조작해 주는 슬픈 노래가 프리마돈나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아직 남주 선택도 못 했는데 이별부터 한 기분이네.
진한 현생의 그리움이 판타지 세계의 정원에 내려앉는다.
그걸 느끼는 건 나뿐이 아닌지 후렴구를 따라 부르는 영애들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감정 차오를 땐 술이죠. 더 마셔요.”
마녀 영애는 이런 뉴비의 태도도 익숙한지 대놓고 웃으며 내 술잔을 쉴 새 없이 채워 주었다.
3분 남짓한 시간 동안 에일을 몇 잔이나 비우고 말았다.
빠르게 마신 탓인지 금세 취기가 올랐다.
근데 좀 이상했다.
“오프닝 곡을 발라드로 시작해도 되나요?”
“일부러 저러더라고요. 대중적인 발라드 골라서 울린 다음에 시작해요.”
“왜요?”
마녀 영애가 어깨를 으쓱했다.
“플레이 기간이 긴 유저들이 많다 보니, 플레이 존마다 분리된 느낌이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무대 앞에 선 영애들이 묘하게 무리를 나누고 있었다.
동양 로판 비주얼의 영애들과 중세 서양 로판의 영애들. 또 지금 입어도 크게 위화감이 없어 보이는 옷을 착장한 근대 로판의 영애들도 끼리끼리 뭉쳐 있었다.
“드라마 OST는 들으면 영상이 머릿속에 딱 떠오르잖아요. 이렇게 오프닝을 하면 다들 5분 만에 현생 자의식을 되찾더라고요.”
마녀 영애의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공연 시작 전까지만 해도 가든파티처럼 영애들이 무리 지어 놀았는데, 지금은 다들 같은 가사를 읊으며 파도타기를 하고 있었다.
천천히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프리마돈나의 목소리도 빛을 따라 사라졌다.
오직 짙은 여운만이 무대에 남았다.
어둠에 눈이 익을 때쯤 사방에 설치된 마석에서 확성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등불이 밝아지며 무대를 하얗게 비추었다. 무대 위에는 옷을 비슷하게 입은 네 명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들의 뒷모습이 비장해 보였다.
나는 흐린 눈으로 무대를 보다 마녀 영애에게 물었다.
“뭐예요, 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