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00화 (101/208)

100화.

밤 9시. 나는 창밖으로 비에른의 방에 불이 꺼지는 걸 확인했다.

‘좋아. 잠들었어.’

새벽형 인간인 비에른은 취침시간이 빠른 편이었다.

나는 이능의 부산물 200송이를 눌리지 않게 잘 묶고, 품에 안았다. 그리고 바로 눈을 감고 스크롤을 찢었다.

찌익.

물풍선이 터지듯 시끌벅적한 소음이 귓가를 덮쳐 왔다.

웃음 가득한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뜨자 숲속 정경이 시야에 담겼다.

화려한 꽃으로 뒤덮인 둔덕.

그 사이를 흐르는 작은 개천.

반딧불이처럼 하늘을 떠다니는 동그란 등불과 그 빛을 따라 색채를 바꾸는 나뭇잎들.

“또 오셨다!”

개천에 발을 담그고 대화를 나누던 유저 둘이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눈인사를 하다 시선을 틀었다. 그러자 궁전 같은 대리석 저택과 낙원 같은 숲이 눈에 담겼다.

높은 저택을 감싸 안은 고목들이 모든 소음을 흡수한다.

저택 자체도 거대한데 숲을 정원 삼아 그런지 프리마돈나의 집은 꼭 산속에 격리된 성 같았다.

프리마돈나는 노래 연습을 핑계 삼아 산속에 홀로 저택을 지어 살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저택과 숲을 한눈에 담고 싶어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툭.

“아야.”

둔탁한 통각에 뒤를 돌아보니 나무가 있었다. 기둥을 따라 고개를 들자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나무와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시야에 담겼다.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도.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건 반딧불이가 아니었다. 작은 유리알 안에 담긴 정육면체 모양의 마석이었다.

나는 홀린 듯 눈앞에 다가온 유리 등불을 바라봤다.

그러다 호기심에 허공에 뜬 유리 등불로 손을 뻗어 봤다.

“조심해요.”

옆에서 들린 경고에 황급히 손을 내렸다. 그러자 누군가 장난치듯 웃으며 말했다.

“비싼 마석이에요. 부서지면 저 울 거예요.”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에게 시선이 닿기도 전에, 바로 옆에 떠 있던 마석과 그 안에 새겨진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저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떨리는 동공을 움직여 다시 목소리 주인을 찾았다.

두툼한 나뭇가지 위에 놓인 작은 오두막에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구불거리는 적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는 허공에 흩어진 등불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고갯짓을 따라 등불이 천천히 조도를 높이며 숲을 환히 비추었다.

설마 저분이 마녀 영애신가?

프리마돈나의 안방 공연은 풀 파티 컨셉인지 개천에서 풍덩거리는 물소리와 까르르 웃는 영애들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나는 그 발랄한 소음 위로 조심스럽게 내 목소리를 얹었다.

“호, 혹시 마녀 영애님이세요?”

마석처럼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가 내게 고정되는 순간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녀는 대존예였다.

주술인지 타투인지 목부터 새겨진 문신이 손끝까지 내려와 있는데, 그것마저 힙해 보였다.

마녀 영애가 장난스레 웃으며 난간으로 다가와 내게 손을 건넸다.

“맞아요.”

나는 얼른 손을 들어 악수했다. 그리고 빠르게 내 소개를 했다.

“저는 봄국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라고 하고요. 타임라인 시작한 지는 두 달 조금 넘었고, 지금 이에테르 공작가에서 지내고 있어요.”

“아, 무료 나눔 글 올린 영애시죠? 저도 신청했었는데.”

나는 순간 내 품에 있는 200송이를 모두 건넬 뻔했다.

건넬 뻔이 뭐야? 뭘 망설여. 얼른 다 드리자.

안 돼. 정신 차려! 다른 사람들한테 종류도 골라서 신청받았잖아.

나는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고 손에 힘을 주었다.

“저는 보라색 장미 신청했는데, 좀 이따 잘 챙겨 주세요.”

“그럼요! 저 다른 이능의 부산물도 있는데 혹시 좋아하는 꽃 있으세요? 제가 집에 가서 다시 가져올게요.”

“하하, 마음만 받을게요. 곧 있으면 공연 시작하는데 시간 낭비하시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아아…… 마, 마음을 받아 주신다네, 어쩌지? 그냥 날 드리면 되는 건가?

아 제발, 주접 멈춰!

나는 솟아오르는 주접을 꾹 누르고 차분히 마녀 영애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런데 그녀의 복식이 특이했다.

그녀는 딱 달라붙는 바지와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탑을 입고 있었다.

보수적인 중세‧근대와 맞지 않는 옷차림.

사회에서 떨어져 사시는 모양이다.

마녀 영애가 웃으며 다시 정원으로 시선을 틀었다.

“이 정도면 괜찮죠?”

나는 무대 디자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일단 찬양했다.

“너무 완벽해요. 태어나서 이런 무대는 처음 봐요.”

“고마워요.”

마녀 영애가 훌쩍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같이 들어가죠. 바바라한테 인사시켜 줄게요.”

“바바라 영애는 누구예요?”

“이 파티 주최자요.”

마녀 영애가 피식 웃으며 저택을 고갯짓했다.

“프리마돈나 영애 이름이에요.”

***

나는 마녀 영애와 함께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풀밭에는 음료를 마시는 사람도 있고, 바 테이블에 서서 음식을 정리하는 유저도 있었다.

대충 세 보아도 수십 명이다.

타임라인을 시작한 유저 대부분이 참석한 것 같았다.

그런데 바 테이블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영애, 저도 한 잔 주세요.”

“쓰읍, 안 돼요. 영애는 미성년자잖아요.”

“캐릭터만 그렇죠. 저는 성인이에요!”

“아우, 빙의 여주가 어디서 현생 민증을 들이밀어요. 얌전히 주스나 마셔요.”

바 테이블 앞에서 까치발을 들고 격하게 항의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실루엣.

어디서 많이 본 뒷모습이다.

“……라리사 영애?”

그때, 구름처럼 몽실거리는 은발을 올려 묶은 아이가 뒤를 돌았다.

“뉴비 영애!”

눈이 마주치자 라리사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라리사 영애, 조심해요!”

작은 발로 도도도 달려오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여 나도 모르게 몸을 낮추고 그녀를 향해 따라 달려갔다.

와락.

품에 폭 안긴 황녀 영애가 내 팔에 뺨을 비볐다.

“언제 왔어요오오오. 탐사대 끌려가서 걱정 많았는데, 잘 지냈어요?”

역시, 녹슬지 않은 조련 실력.

방금까지 술을 내놓으라고 땡깡 부리던 황녀 영애는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며 애교를 부렸다.

“전 잘 지냈어요. 영애는요?”

“저도 잘 지냈죠!”

라리사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히죽 웃었다.

“영애,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에에요오.”

그녀는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며 귀를 빌려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몸을 굽히자 그녀가 찰싹 달라붙어 속삭였다.

“저기 술 한 잔만 가져다주세요.”

슬쩍 시선을 드니 귓속말을 들은 마녀 영애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리사 영애, 그건 안 될 거 같아요. 영애 몸은 아이니까 신체에 큰 영향을 줄 거 같거든요.”

“아, 나 진짜 괜찮다니까요! 페스티벌에서 맥주 한 잔도 못 하게 하는 게 말이 돼요?”

정말 속상한지 황녀 영애가 발을 동동 굴렀다.

화를 내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분노를 담기엔 껍데기가 너무 귀여웠다.

토실토실한 뺨을 흔들며 울먹거리는데 심장이 아팠다.

“으윽!”

라리사는 온몸으로 ‘내가 바로 힐링물 여주!’라고 호소하듯 힐링 페로몬을 뿌려 댔다.

지나가던 영애들도 홀린 듯 걸음을 멈추고 입을 틀어막았다.

“아악, 귀여워!”

“오구오구 영애 발 다치겠어요.”

혹시라도 라리사가 기분 나빠할까 걱정하는데, 그녀는 오동통한 볼을 씰룩이더니 괜히 쿵 발을 더 굴렀다. 마치 팬서비스라도 하듯이.

“꺄아아아.”

저쪽 영애들도 리액션으로 화답했다.

나는 흐린 눈으로 라리사를 보다 물었다.

“……영애, 뭐 하시는 거예요?”

“귀엽다잖아요. 귀여운 건 같이 보고 즐겨야죠.”

그녀는 공익을 위해 대외활동을 하는 황족처럼 사명감 넘치게 제 귀여움을 세상에 알렸다.

역시, 황녀.

만인을 대하는 자세가 남다르다.

나는 이상한 생각을 하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것도 조련인가 봐!’

솜사탕 같은 뽀송뽀송한 외모에 홀려 괴이한 논리에 세뇌될 뻔했다.

나는 웃음을 참고 있는 마녀 영애를 보고는 슬쩍 한 발 빼며 물러섰다.

“영애, 저는 프리마돈나 영애한테 인사 좀 하고 올게요. 재밌게 놀고 계세요.”

“응, 알겠어요. 또 봐요.”

라리사는 도도하게 손을 흔들고 다시 바 테이블로 달려갔다. 물론 이번에도 그녀는 술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정말 많은 유저가 모였구나.

나는 라리사의 뒷모습을 보다 씁쓸하게 웃음을 삼켰다.

모든 유저가 참석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디아나는 신년사 준비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고, 아이시스도 신도들과 새해 기도를 해야 해서 오지 못했다.

오랜만에 얼굴 보고 싶었는데.

“괜찮아요? 표정이 안 좋아 보이네요.”

“아, 저랑 친한 영애들이 있는데 그분들은 일 때문에 못 왔거든요. 그게 좀 아쉬워서요.”

“혹시 황제 영애랑 성녀 영애예요?”

“어떻게 아셨어요?”

뭐지, 마녀라 독심술 버프라도 있으신 건가?

당황하는 나를 보며 마녀 영애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본업 때문에 못 오는 영애들은 흔치 않으니까요.”

마녀 영애는 바 테이블을 지나며 에일 두 잔을 들었다. 그리고 내게 한 잔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대단하네요. 다들 친해지고 싶어 하는 영애들인데 타임라인 두 달 만에 친해지시고. 세 분 국적도 다르잖아요.”

진심으로 놀라웠는지 그녀의 눈동자에 흥미가 가득했다.

순간 뿌듯함이 차올라 나도 모르게 마왕의 정보 때문에 친해졌다고 말했다.

“저희가 ‘마성의 매력’을 공유하다 보니 친해졌어요.”

오만하게 기운 입술 사이로 나르시시즘 가득한 대사가 튀어나왔다.

여기에 X 같은 필터링이 있다는 걸 깜빡했다.

“하하, 네. 세 분이 매력적이시긴 하죠.”

마녀 영애가 조용히 내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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