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나는 간단히 묵례하고는 안부를 물었다.
“잘 지내셨어요?”
“글쎄. 잘 지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못 지냈다는 말을 돌려 말한 엘런은 매끈히 넘긴 머리칼을 습관처럼 손으로 쓸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그냥 일이 많았지.”
“아.”
워커홀릭.
남주의 숙명 때문에 피곤했나 보군.
어쩔 수 없지 그건.
나는 내가 도와줄 수 없는 영역임을 깨닫고 깨끗이 물러났다.
“그나저나 회의에 참석하신 줄 알았는데, 공작님은 여름국에 가지 않으셨나 봐요?”
내가 봄국으로 돌아온 날, 일검의 참전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디아나는 알렉스와 협의해 출병 일정을 조율하는 회의를 잡았다.
봄국 대표는 엘런이니까 당연히 그 일정 회의에 참석했을 줄 알았는데.
어제 받은 알렉스의 편지에 아직도 회의 중이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던지라, 엘런이 봄국에 있는 게 이상했다.
엘런은 아, 소리를 내며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회의는 어제 끝냈지. 신년제 이후에 출병하기로 했어. 최대한 동요를 막으려면 조용히 떠나야 하는데, 신년제에 각국 수장이 없으면 불안해할 테니.”
“신년제는 2월 중순쯤이었죠?”
“그러게. 이제 2달도 안 남았군.”
그는 한숨을 쉬듯 말했다.
“잘돼야 할 텐데.”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잘될 거예요.”
메인 남주와 여주가 출전하는데 당연히 해피 엔딩이지. 아마 그럴 거다.
그런데 그때, 흠흠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트니 안젤리카가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
엘런의 시선도 그제야 안젤리카를 향했다.
나는 얼른 그녀를 소개했다.
“공작님, 이쪽은 레이디 안젤리카예요.”
‘……겨울국 황족이라고 말해도 되나?’
엘런은 믿을 만한 사람이긴 하지만, 아직 안젤리카의 신분을 밝히면 안 될 것 같았다. 안젤리카의 전개가 어떻게 튈지 모르니까.
게다가 뉴비시잖아. 수습도 버거우실 거야.
나는 망설이다 덧붙였다.
“제 친구예요. 남부에서 지낼 때 가장 가까운 사이였어요.”
그러자 엘런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얼굴로 안젤리카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레이디 데이지의 친우라. 반갑군.”
내가 소개도 하지 않았는데 엘런이 먼저 말문을 열어서 당황했다.
나는 서둘러 그를 소개했다.
“안젤리카, 이쪽은 엘런 카이엘드 공작님이에요.”
“아, 아! 네네!”
넋 놓고 있던 안젤리카는 당황해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어 올리며 배꼽 인사를 했다.
그러나 입을 달싹일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중세 귀족에게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러는 것 같았다.
‘……정말 남 일 같지 않아.’
꼭 나를 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분위기를 수습하며 엘런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공작님, 은행에는 무슨 일이세요? 업무 있으셨던 거 아니에요?”
엘런은 그제야 은행에 온 목적을 깨달았다는 듯 제 짙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업무는 아니고.”
엘런이 무서운 말을 꺼냈다.
“카이엘드가 성을 교묘하게 따라 한 이가 있는데, 그 사칭범이 오늘 은행에 다녀갔다기에 확인차 들렀어.”
나는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물었다.
“사칭범이요?”
엘런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이가 아니야. 몇 년 동안 입금만 받고 찾아가질 않더군. 그 거액을 말이지.”
“바빠서 그런 거 아닐까요? 거액이 입금될 정도면 열심히 사느라 바쁘신 분이겠죠.”
엘런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규정상 그러면 안 되지만, 거래 내역을 조회해 봤더니 마족 금서 제목을 암호로 입금을 받아 왔더군. 겨울국 재건 협회에서 입금한 흔적도 있고.”
“…….”
“겨울국 재건 협회의 차명계좌일 가능성이 커.”
아니야, 그거 아니야.
나는 해명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모른 척 화제를 돌렸다.
“공작님도 그렇고 알렉스 전하도 그렇고. 겨울국 재건 협회장이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잡아넣으면 되는 일인데 왜 협회장 자리에 그냥 두시는 거예요?”
“위험은 눈에 보이지 않을 때보다 눈에 보일 때 관리하기 편하니까.”
그는 덧붙였다.
“그리고 3국에 퍼진 난민을 관리하기엔 각국의 부담이 크니, 책임져 줄 사람도 필요해. 같은 국가 사람이니 어쨌든 그가 적임자야.”
아무래도 각국 수장들은 난민을 수용한 게 부담스러운 듯했다. 특히나 자국 안에서 관리하는 게.
나서서 챙기면 자국민이 불만을 느끼고, 잘못하면 차별을 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으니.
그런 걸 생각하면 뒤에서 겨울국 재건 협회를 통해 각국의 난민에게 공지를 내리고 관리하는 게 더 편하긴 했다.
한마디로 정치적인 이유였다.
골치 아픈 책임은 피하고 싶다는 거겠지.
아직 봄국과 가을국은 중년 황제가 굳건히 황좌를 지키고 있다 보니, 보수적으로 사회 문제를 처리하는 모양이었다.
위험은 최대한 회피하고, 책임은 남에게 위임하는 거로.
엘런은 그들의 처세에 동의하지 않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쨌든 위험한 자가 황도로 들어온 것 같으니 조심해.”
나는 몸을 테이블 안으로 바짝 붙여 무릎에 올려 둔 계약서를 숨겼다.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런은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입매를 시원하게 늘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흘깃 은행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다 그에게 은근한 축객령을 내렸다.
“바쁘실 텐데 제가 공작님 시간을 너무 뺏고 있네요.”
엘런은 은행 앞에 선 사람들을 보고는 잠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데이지.”
“네.”
“다음 달쯤 시간을 내줄 수 있을까?”
“무슨 일 있으세요?”
“응. 그대에게 할 말이 있거든.”
그냥 지금 말하면 될 걸 왜 굳이 티저를 날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잘난 얼굴에 담긴 속뜻을 알아낼 수 없었다.
뭐 나한테 나쁜 짓 할 남주는 아니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기대하고 있어.”
“……뭘 기대해요?”
“그대가 바라는 말을 할 예정이니.”
얘가 이렇게 나오니 불안해졌다.
표정 관리가 힘들어지는 찰나, 엘런이 걸음을 뗐다.
“그럼 한 해 마무리 잘하고, 새해에 보지.”
“예, 들어가세요.”
겨우 놈을 보내고 나니 안젤리카가 바로 물어왔다.
“세상에! 엘런 공작이 데이지가 선택한 남주인가요?”
“아니에요!”
펄쩍 뛰며 부정하자 안젤리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저 같으면 얼른 선택할 거 같은데요!”
“영애, 얼굴에 속지 마세요. 저 친구한테 적용된 키워드는 #착각계랍니다.”
그러자 안젤리나가 손뼉을 쳤다.
“저 #착각계 좋아하는데!”
“저도 빙의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착각계는 볼 때나 재밌지 내가 당할 때는 최악의 키워드더라고요.”
나는 한숨을 쉬며 테이블 위에 있던 종을 흔들었다.
“어쨌든 우리 빨리 여길 벗어나야겠어요. 이만 일어나요.”
엘런이 ‘마나 데이 카이헬드’를 찾아 여기로 다시 올지 모른다.
나는 테이블 위에 금화 하나를 올리고 서류를 챙겼다.
“헉! 이러지 마세요! 제가 계산할게요!”
“아니에요. 제가 살게요.”
“안 돼요! 알려 주신 게 얼마나 많은데 이건 제가 사야죠!”
그녀는 잽싸게 주머니를 열어 금화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두고는 내 금화를 다시 내 앞에 두었다.
“저 한 달에 품위 유지비로 5골드나 받아요!”
나는 그녀가 내민 금화를 보다 말을 삼켰다.
내 한 달 품위 유지비는 10골드.
게다가 방금 계좌에 5천만 골드가 있는 걸 확인했다.
뉴비에게 얻어먹으려니 양심이 정말로 심각하게 아팠다.
하지만 눈을 반짝이고 있는 안젤리카를 보니 차마 됐다고 넣어 두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존심 상할 거 같은데.’
나는 다른 방식으로 돈을 메꿔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잘 먹었어요.”
“헤헤, 아니에요!”
“그럼 바로 본 셰밍부터 갈까요?”
“네! 양장사 여주님도 빨리 만나 뵙고 싶어요.”
안젤리카의 볼에 깊은 우물이 파였다.
“#직업물여주라니 커리어우먼 그 자체! 너무 멋진 분이에요. 저 심장이 빨리 뛰어요.”
앞으로 만날 여주를 상상하며, 감격한 그녀의 모습을 보니 내가 괜히 뿌듯해진다.
나는 그녀와 함께 다시 마차를 타고 리안 영애의 의상실로 향했다.
***
본 셰밍의 주인 리안도 안젤리카가 뉴비라 신경이 쓰였는지 적극적으로 그녀의 옷을 디자인해 주었다.
게다가 1골드라는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무려 드레스를 5벌이나 보내 준다고 약속했다.
“물가가 정말 저렴하네요. 옷 다섯 벌에 1골드도 안 하다니.”
안젤리카는 놀랐는지 마차에 타자마자 내게 속삭였다.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빙긋 웃었다.
마차가 움직이자 안젤리카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는 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입을 벌렸다.
“와, 저 강변 좀 보세요. 노을이 너무 예뻐요!”
잔뜩 긴장했으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훑는 안젤리카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인류애가 이런 걸까?’
나를 챙겨 줬던 유저들의 마음도 이랬을 거라 생각하자, 뿌듯함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한 감정이 차올랐다.
마차는 금세 녹스의 저택에 도착했다.
안젤리카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오늘 너무 감사했어요. 저희 조만간 또 봐요.”
“그래요.”
나는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다 이동 스크롤을 건드렸다.
“아, 맞다.”
나는 스크롤 세 장 중 두 장을 꺼내 안젤리카에게 건넸다.
“이건 이동 스크롤인데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하고 찢으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어요.”
“이동 스크롤이요?”
안젤리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주황색 종이를 쳐다봤다.
“네, 챙겨 두세요. 그리고 혹시 12월 31일에 시간 있어요?”
“그럼요. 없어도 시간을 내야죠!”
왜인지 안젤리카는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다른 건 아니고 연말에 프리마돈나 영애가 집에 유저들을 초대해서 연말 공연을 하거든요.”
“연말 공연이라니! 새해 카운트다운도 하고 그런 건가요?”
“네, 밤에 정원에 모여서 공연을 한대요. 저도 처음 가는 거라 잘 모르지만, 작년에 촬영한 공연 영상 보니까 재밌어 보이더라고요.”
“아아, 저 또 가슴이 뛰어요.”
나는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 안젤리카의 모습이 웃겨서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프리마돈나 영애한테는 제가 가면서 메시지 보내 볼게요. 아마 와도 된다고 할 거예요.”
“네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답장 오면 위치 알려 줄 테니까 그 스크롤로 오면 될 거예요. 저도 외박 핑계 생각 안 나서 밤에 자는 척 몰래 다녀올 생각이거든요.”
“아…… 저는 동생이랑 같은 방을 써서 몰래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안젤리카가 울적하게 말했다.
나는 순간 못된 생각을 했다.
가을국 #명의여주에게 ‘줄리엣 풀’을 빌려와 동생을 잠재울까 하는 생각.
“음, 동생을 잘 설득하면 오히려 외박한 걸 걸렸을 때 녹스에게 알리바이를 대 주지 않을까요?”
“흐음. 근데 동생이 제게 집착하는 타입이라 오히려 절 욕할 거 같긴 하지만…… 한번 설득해 볼게요.”
“네, 되도록 잘 설득해 보세요. 타임라인 시작한 영애들 대부분이 참석하거든요. 저보다 오래 타임라인을 진행한 분들이라 더 좋은 정보를 많이 주실 거예요.”
그런데 안젤리카는 진지한 얼굴로 내 말을 부정했다.
“아니에요. 저한텐 데이지 영애가 최고예요.”
나는 움찔했다.
맹목적인 믿음이 당황스러웠다.
“아, 부담 갖지 마세요! 부담 드리려는 건 아니었고…… 저는 그냥.”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손을 만지작거렸다.
“아, 아뇨. 부담이라뇨. 그럴 리가요.”
나는 얼른 웃으며 표정을 풀었다.
“어쨌든 프리마돈나 영애 집에서 봤으면 좋겠어요.”
“네! 꼭 갈게요!”
안젤리카는 손을 흔들며 문으로 걸음을 틀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살짝 묵례하고 마차 문을 닫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제 뉴비가 아니구나 하는 아쉬움과 뿌듯함이 교차했다.
CH8. 중간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