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침묵을 먼저 깬 건 안젤리카였다.
“상태창에는 이렇게 떠요. 특성 버프 ‘마지막 불꽃’은 #힘숨찐 키워드 제한 해제 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생각으로 AI와 대화 중인지 시선으로 허공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제할 수 있는지 물었더니, #힘숨찐 키워드는 ‘힘을 드러내야만 하는 사건’ 획득 시, 자동 해제됩니다.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실례하겠습니다.”
마침 주문한 음료와 음식이 나왔다.
나는 테이블이 가득 채워지고 종업원이 떠나는 것을 확인한 뒤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지금은 불의 이능을 쓸 수 없다는 거네요.”
“네. 아마도 불의 이능이 제 특성 버프 ‘마지막 불꽃’ 같거든요.”
안젤리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크림 수플레를 한 포크 큼직하게 떠먹었다.
그녀는 금세 행복한 표정이 되어 눈을 가늘게 떴다.
“너무 맛있네요.”
나는 캐러멜 시럽이 뿌려진 마카롱 접시도 그녀 쪽으로 밀었다.
“이것도 먹어요.”
나는 안젤리카가 충분히 당분을 섭취하는 걸 보며 때를 기다렸다.
지금 안젤리카는 녹스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
그녀가 녹스의 정체를 알면 불안하게 지낼까 봐 대책이 생기면 알려 주려 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다.
녹스 그 미친놈의 실체를 당장 알려야 했다.
안젤리카가 협조할 마음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녀를 죽인다고 했는데, 키워드 제한이 있는 걸 보니 잘못하면 안젤리카가 절벽 엔딩을 칠 수도 있었다.
시스템, 이 자식. 뉴비들한테 텃세라도 부리는 건가? 안젤리카 영애 난이도 무슨 일이냐고!
빙의하자마자 #사패남주한테 낚여서 동거를 시작하고, 키워드 제약에 걸려서 버프도 못 쓰고.
나는 행복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먹는 안젤리카를 짠하게 바라봤다.
시스템의 행패가 남일 같지 않아 공감됐기 때문이다.
“하.”
나는 새나온 한숨을 얼른 삼켰다.
괜찮아. 위험해지면 뭐, 전개 수정해 주면 되잖아. 국서도 사면시켰는데.
그래, 우리가 도와주면 되지.
모든 접시가 반쯤 비워졌을 때, 나는 용기 내 입을 열었다.
“영애, 녹스 있잖아요.”
“녹스요? 왜요?”
안젤리카는 녹스 얘기가 나오자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는 눈을 반짝였다. 심지어 볼도 붉혔다.
‘……설마.’
나는 싸한 기운을 느꼈다.
“영애, 혹시 녹스 좋아해요?”
그녀는 입을 달싹이다 옆에 있던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시선을 피했다.
좋아하나 보네.
나도 모르게 테이블을 쳤다.
“녹스 그놈은 절대 안 돼요!”
“헉! 그렇지만 완벽한 제 취향인데……!”
“취향이 문제가 아니고…… 어?”
이거 어디서 들어 본 말인데.
나는 기시감을 느끼며 머뭇거렸다. 그 틈에 안젤리카가 빠른 속도로 말했다.
“저는 살면서 그런 완벽한 가슴과 어깨는 처음 봤어요.”
안젤리카는 뺨이 뜨거운지 손등으로 꾹 누르다 손부채질을 했다.
“제 이상형이 흉부 큰 남자거든요. 녹스는 완벽한 제 이상형이에요.”
“남자는 흉부.”라는 이상한 말을 덧붙이며 안젤리카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설문 조사 문항을 다시 떠올려 봤다.
설문 조사는 MBTI 수준의 정확한 인간상 측정 도구였다.
어쩜 이렇게 덕질에 진심인 사람들을 알차게 긁어모았는지.
나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 다시 차분히 말을 정리했다.
“영애, 녹스는 ‘불의 이능’을 이용해 겨울국을 재건하려고 하고 있어요. 아니, 재건이 끝이 아니죠. 전 대륙을 통일할 거대한 야망을 품고 있다고요.”
달그락.
안젤리카가 손에 힘을 주었는지 유리잔이 테이블과 마찰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제 입가를 가리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 그 몸에 야망캐라니. 사람 미치게 하네요.”
또 이상한 말을 한다.
안젤리카는 혼잣말하며 도리질을 했다.
“그 흉부에 그 미모에 그 나사 풀린 눈에, 세계 정복 야망까지……. 안 되겠어요. 저 집에 가면 바로 녹스를 남주로 선택해야겠어요.”
“아니 영애, 잠깐만요!”
이상한 쪽으로 자극받았는지 안젤리카가 의욕을 불태웠다.
“그놈은 사이코패스라고요! 영애가 불의 이능을 쓰지 않으면 영애를 죽인다고 했어요.”
충격을 받았는지 안젤리카가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산홋빛 입술을 달싹이다 천천히 물었다.
“절 죽인다고요? 왜요?”
“저도 모르겠어요. 굳이 죽일 필요까지 있나 싶은데. 하긴 제가 사패의 심리를 이해하면 여기 없었겠죠.”
감옥에 있겠죠.
잠시 안젤리카가 입을 다물었다.
고민하는 것 같았다.
생각 정리가 끝났는지 안젤리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커뮤에서 보니까 슬롯에 넣으면 남주가 여주를 좋아하게 된다고 하던데, 제가 녹스를 슬롯에 넣으면 안 죽지 않을까요?”
“그렇죠. 하지만 영애, 잘 생각해 봐요. 그런 위험한 놈이 영애를 좋다고 따라다니는 거라고요. #집착 #감금 #강압적관계가 세트로 따라올지 몰라요.”
그녀를 말리기 위해 한 말인데, 안젤리카는 또 뺨을 붉혔다.
타인의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마족 지대 남주를 선택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이시스가 이런 기분으로 날 봤던 걸까.
요한을 떠올리니 또 이해가 가기도 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물론 남주 선택은 영애의 마음이니까 제가 강요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그놈은 정말로 위험한 놈이에요. 제 부모님이 녹스한테서 절 보호하려고 하니까 저희 부모님을 죽였거든요.”
“네?!”
여태껏 내 말에 흔들리지 않던 안젤리카가 경악했다.
“데, 데이지의 부모님을 죽였다고요?”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괘, 괜찮은 거예요? 어떡해요…… 세상에.”
“아니, 제가 타임라인 시작하기 전에 돌아가신 거라 괜찮아요. 그냥 녹스가 그만큼 인정사정없는 사패라는 걸 알려 주고 싶었어요.”
“네, 이해했어요. 절대 녹스는 선택하지 않을게요.”
“……네?”
안젤리카는 다시 새하얀 제 피부를 되찾았다. 그녀는 차분한 얼굴로 단호하게 끄덕였다.
“친구의 원수는 제 원수죠. 그건 #혐관이라고 할 수 없어요. 취향에도 도덕 선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혐관이 취향이셨구나.
안젤리카는 또 한 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녹스 아웃. 영애 말대로 다른 남주를 찾아볼게요.”
안젤리카는 언제 흉부를 찾아 울부짖었느냐는 듯이 싸늘한 말투로 녹스를 잘라 냈다.
“…….”
나는 입을 벙긋거리다 다물었다.
뭐가 됐든 다행이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여긴 남주가 많으니까 안젤리카 취향의 남주를 금방 찾으실 거예요.”
“맞아요.”
안젤리카는 다시 거리로 시선을 틀며 미소를 지었다.
“눈만 돌리면 아름다운 분들이 가득하신걸요.”
“그렇죠.”
나는 그녀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름 놓은 탓일까.
급격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취향이라.
내가 이런 조언을 해도 되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민망함에 나는 계약서 표지를 손끝으로 긁었다.
‘요하네스는 잘 지내려나.’
비공개 지역의 캐릭터라 그런지 사계국에는 요하네스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커뮤니티에도 없고 AI 데이터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밀어 두었던 생각이 또 금세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답답한 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안젤리카보다 오래 게임을 했으면서 그녀보다도 게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안 될 취향은 바로 버려야 하는 데 미련 무슨 일이야.
마족 지대는 말 그대로 이계 아니냐고.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잖아? 세계관 내에서도, 데이터 속에서도.
우연한 버그 사고일 뿐인데, 나는 웃기게도 나만의 특별한 서사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했다.
그런 내게 아이시스는 웹소설 다독으로 인한 과몰입 증후군이라며 얼른 망상을 끊어 내라고 충고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요한을 남주 선택 후보에서 밀어냈는데, 안젤리카를 보고 있으니 또 생각이 났다.
미련인가, 이게.
나는 한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가지가지 하네.
네가 무슨 진짜 여주냐고.
미련, 아련, 비련은 버려!
AI의 조언에 의하면, 천상계 필력이 아닌 이상 저 3련 요소를 집어넣으면 오글거리는 전개로 저평가를 받을 수 있으니 생각을 조심하라고 했다.
AI의 필력은 천상계가 아니라는 자기 객관화된 정보까지 덧붙이면서 말이다.
가뜩이나 지금 내 전개 노잼각인데, 3련 요소를 넣을 수는 없다.
나는 뺨을 짝짝 쳤다.
정신 차리자!
되찾은 #돈지랄 키워드에 집중하자고.
그때, 안젤리카가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저, 저 방금 엄청난 남주를 본 거 같아요.”
엄청난 남주?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카이엘드 은행 앞에서 직원의 인사를 받고 있는 한 남주를 발견했다.
올블랙의 착장.
완벽한 핏을 자랑하는 긴 기럭지.
조각상처럼 매끈한 얼굴선.
디자이너님이 손목을 갈아 창조한 비주얼의 남주였다.
그러나 이제 익숙해져서 감흥이 일지 않는 남주기도 했다.
엘런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기 카이엘드 은행이었지.
출병을 앞두고 있다 보니 자금을 점검하려고 온 모양이다.
은행으로 들어가려던 엘런이 저를 보는 집요한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으로 흘깃 시선을 틀었다.
붉은 눈동자가 이쪽으로 오는 순간 안젤리카 영애가 딸꾹질을 했다.
그러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헉, 저 남주 이쪽으로 오는데요?”
“인사하려고 오는 거 같아요. 아는 남주거든요.”
“아는 분이세요?!”
다리가 긴 남주답게 엘런은 금세 이쪽에 도착했다.
엘런은 안젤리카와 나를 번갈아 보고는 입매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오랜만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