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설명을 듣던 안젤리카가 큰 눈을 깜빡이다 물었다.
“……그게 가능한가요?”
“저도 놀랐어요. 우리나라 IT 기술 수준이 이 정도일 줄이야.”
나는 감탄하는 안젤리카에게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근데 노트북이랑 태블릿 피시도 받지 않았어요? 그거는 어디에다 두셨어요?”
“아, 저 동생이랑 한 방에서 같이 지내서 그 애가 볼까 봐 숨겨 놨거든요. 계속 붙어 있어서 아직 못 열어 봤고요.”
“현대 기기는 유저들만 볼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사용하세요.”
“그, 그거 정말일까요? 제 AI 담당자님도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노트북을 여니까 동생이 왜 허공에서 손을 놀리냐고, 너 드디어 미쳤냐고 묻더라고요.”
그녀는 타임라인 시작 타이밍이 안 좋았다. 하필, 녹스가 자매를 찾은 시점에 타임라인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감시가 심하니 선뜻 현대 기기를 만지기 힘들었겠지.
녹스의 집으로 오는 동안은 겨울국 사람들 속에 있었고, 녹스의 집에서는 동생과 함께 방을 써서 홀로 있을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미친 사람으로 보일까 봐 AI 대화도 몇 번 못 했어요. 저도 모르게 자꾸 혼잣말이 튀어나와서…….”
그래서 입을 꾹 닫고 지냈다고 말하는데, 아무래도 이것 때문에 녹스에게 심리 상태가 위태롭다는 오해를 받은 듯했다.
“일단 집에 가면 노트북 켜고 커뮤니티에 가입하세요. 거기에 온갖 팁들이 있거든요. 태블릿으로 로그인 하고 동생 몰래 정독하시고요.”
“네네!”
안젤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우선 내가 아는 것들을 최대한 성실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그때 창밖에 익숙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잠깐! 잠깐만요!”
나는 다급하게 유리문을 열고 마부에게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카이엘드 은행 간판이 보였기 때문이다.
“영애, 저 은행 좀 들렀다 갈게요.”
“헉! 여기 은행도 있나요?”
안젤리카는 놀라 숨을 들이켰다.
“영애도 AI한테 한번 물어봐요. 혹시 계좌가 있는지.”
“엇, 여기 인터넷 거래도 되나요?”
“아뇨. 내 캐릭터가 은행에 예치한 금융 자산이 있는지 조회만 가능한 거 같아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저도 오늘 알게 된 정보라 정신이 없네요. 일단, 은행에 가서 확인해 보려고요.”
“아아.”
안젤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AI님, 저 계좌가 있나요?”
“영애, 입으로 말씀하셨는데…….”
“아아.”
안젤리카는 민망한지 어색하게 웃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몇 초 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있대요! 근데 제 주거래 은행은 ‘아우로라 은행’이라는데요?”
아우로라.
겨울국 황족의 성이었다.
아무래도 겨울국 황실 은행인 듯한데.
그 말은…….
“음. 영애 돈은 동결됐다고 봐야겠네요.”
“헉! 왜요?”
안젤리카는 도토리 묻어 둔 곳을 까먹은 다람쥐처럼 황망한 얼굴로 물었다.
“아우로라 은행은 겨울국 황실 은행 같거든요. 근데 지금 겨울국은 전부 얼어붙어서 거래가 불가능해요.”
“아아…….”
그녀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곧 아쉬움을 치워 내고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네. 알겠어요. 일단 은행부터 가요. 저희 얘기는 천천히 해요.”
“좋아요. 아 맞다!”
나는 마차 의자를 들어 그 안에 숨겨 둔 태블릿 피시를 꺼냈다.
“이거 제 아이디로 로그인 해 놨거든요. 영애는 우선 이걸로 커뮤니티 글 읽고 계세요.”
“감사합니다!”
***
은행 업무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은행에서 나온 우리는 카페로 갔다. 다행히 카이엘드 은행 바로 옆에 괜찮은 카페가 있었다.
나는 테이블에 은행에서 가져온 서류들을 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은행에 들어가자마자 웬 지점장이 귀빈실로 데려갈 때부터 수상하다 싶더니만.
귀빈실에서 일을 처리한 덕에 빠르게 내 금고를 둘러보고 거래명세서까지 뽑아 올 수 있었다.
그렇다.
데이지는 부자였다.
‘예치금 5천만 골드 실화냐.’
나는 거래 명세서를 읽었다.
1만, 20만, 10만, 4만, 5만.
액수는 들쑥날쑥하지만 돈은 꾸준히 입금됐다.
이건 데이지가 필사와 금서 번역으로 번 돈이었다.
어떻게 아냐고?
입금자명이 이따위였기 때문이다.
[100일 완성! 마족어 기초 회화.]
[마족의 번식 – 그들은 여성체 없이 어떻게 사회를 유지할까?]
카이엘드 은행이 개인 은행이라 다행이지, 황실 은행이었으면 바로 구금될 뻔했다.
대놓고 마족 금서 번역했다고 광고하고 있잖아.
입금자들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내게 원한이 있는 모양이다.
시간 역순으로 거래 내역을 읽던 나는 눈을 찌푸렸다.
가장 마지막 거래 내역이 이상했다.
입금액 4천만 골드.
자릿수가 다른 금액에 나는 몇 번이나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
입금일은 약 2달 반 전.
그즈음이면 내가 황도로 온 시기였다.
대체 뭘 판 거지?
이 입금자 ‘F’는 또 누구고.
겨울국 협회장인가?
“음…….”
본의 아니게 내가 4천만 골드를 먹튀 한 거라면, 녹스가 날 죽이겠다고 스토킹 한 것도 이해가 갔다.
다만 걸리는 건.
‘그러면 아까 만났을 때 이 돈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돈 때문에 속이 탔다면, 나를 만나자마자 돌려달라고 하든지, 4천만 골드 값을 하라고 윽박질렀을 거다.
하지만 녹스는 이 4천만 골드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장부 옆에 놓인 계약서를 보며 턱을 괬다.
녹스 놈이 들이민 건 고작 이 근로 계약서뿐.
나는 다시 장부 속 4천만 골드를 응시했다.
대체 이 4천만 골드는 뭘까?
F라는 이름이 적혀 있지만, 이 이름이 진짜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AI에게 물어보긴 했다.
‘담당자님, F가 누구예요?’
[조회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역시다.
대체 이렇게 큰 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그리고 난 이 사람에게 어떤 대가를 준 걸까.
아, 우리 이광필 씨 이런 거 전문인데.
날고기는 회계 전문가들이 꼭꼭 숨긴 돈을 악착같이 찾아내는 사람한테 이런 건 애들 구구단 놀음일 텐데.
아빠 빙의시키면 안 돼?
어차피 다 빙의하는 세상인데 이광필 씨도 빙의시켜 줘.
이제 아빠가 빙의하는 로판 트렌드가 올 때가 됐어.
[…….]
AI가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또 은근한 기계음을 흘렸다.
“하아.”
내 집 안방에 치트키가 있는데 쓰지를 못한다. 씁쓸한 마음을 삼키며 손가락으로 4천만 골드라는 숫자를 톡톡 건드렸다.
겨울국 협회가 아니라면, 누가 내게 돈을 준 걸까.
대체 왜?
결국, 제자리다.
나는 이 숫자 너머의 정보를 하나도 읽어 낼 수 없었다.
머리 좋은 유저들은 숫자와 이름만 듣고도 정보를 파악하고 미래까지 설계하던데, 나에게는 그런 전개란 있을 수 없었다.
차라리 빙의 전 데이지가 더 똑똑한 것 같다.
데이지는 치밀했다.
그녀는 남부 소녀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북부 가문에서 운영하는 은행에 계좌를 텄다. 금융 실명제를 적용하지 않는 중세 금융법을 이용해 가명까지 알차게 사용했다.
가명은 북부 스타일 이름이었다.
‘마나 데이 카이헬드’
“…….”
카이엘드가에서 고소해도 할 말 없지 않을까?
어쨌든 데이지는 열다섯 살부터 이렇게 차명계좌로 부업을 해 왔다.
빽빽한 거래 내역을 보던 나는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데이지 육아 난이도 무슨 일이냐.
괜히 데이지 부모님에게 감정이입이 된다.
착잡한 마음으로 거래 명세서를 다시 서류 봉투 안에 넣는데 마침 점원이 다가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네, 전 커피로 주시고요.”
안젤리카를 보니 그녀는 고르기 힘든지 끙끙거리며 계속 메뉴를 읽었다.
“고르기 어려우면 다 시켜요. 같이 먹으면 되죠.”
“아, 그러네요!”
안젤리카는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손가락으로 메뉴를 짚었다.
아이스크림부터 연어와 크림치즈가 올라간 와플까지 다양한 메뉴가 주문됐다.
그녀는 신난 얼굴로 테라스 밖 거리를 바라봤다.
봄국의 자랑, 따스한 봄 햇살에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는 청순한 얼굴로 해맑게 웃다가 속삭였다.
“저 원래 카페 갈 때는 무조건 콘센트 자리부터 사수했거든요. 근데 여긴 충전할 필요가 없으니까 뷰 좋은 자리부터 앉을 수가 있네요.”
헤헤 웃으며 그녀가 손바닥에 턱을 괬다.
“너무 좋아요.”
그녀는 부지런히 도로에 선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다들 참 예쁘고 잘생기고, 거리도 아름답네요.”
“그렇죠. 오죽하면 비주얼 쇼크사 방지 팁 글이 베스트 글이겠어요.”
나는 피식 웃으며 금고에서 꺼내 온 계약서를 펼쳤다.
안젤리카도 다시 태블릿에 시선을 두었다.
“맞다. 팁 좀 더 읽어 둬야지.”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혼자 계속 플레이를 했을 테니 불안할 만했다. 갑자기 로판 속에 고립된 거니까.
그런데 갑자기 안젤리카가 힐긋 시선을 들었다.
“근데 뭐 보시는 거예요?”
“아, 이거 예전에 녹스랑 쓴 계약서인데 변호사 영애한테 검토받아 보려고 가져왔어요.”
“헉! 여기 #변호사여주도 있어요?”
“네, 요즘 직업물 인기잖아요.”
말하고 보니 궁금했다.
“영애는 어느 소설에 들어온 거예요?”
“아, 저는 ‘진짜는 늦게 밝혀진다’라는 소설에 들어왔어요. 혹시 보셨어요?”
처음 들어 보는 소설이었다.
“아뇨. 저도 소설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웹소설이 많네요.”
괜히 미안해서 변명하자 안젤리카가 웃었다.
“사생아 황녀가 신분을 속이고 평민으로 살다가 힘을 각성하고 황제가 되는 내용이에요.”
나는 손끝으로 턱을 콕콕 건드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물었다.
“#여주원탑 #여주판 #가족복수물 #여주성장물?”
“허어어억!”
안젤리카가 숨을 격하게 들이켜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리액션이 과장된 편인데도 외모가 워낙 청순해서 그런지 그조차도 우아해 보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내리며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맞아요. 그거 다 제 키워드예요!”
“영애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웬만한 키워드는 다 예측될 거예요.”
“네! 저도 빨리 배워야겠어요.”
그녀는 의욕 넘치는 눈으로 다시 태블릿 피시를 쳐다봤다.
“근데 영애, 영애한테 ‘불의 이능’이 있나요?”
“네?”
“녹스는 영애한테 ‘불의 이능’이 있는데 영애가 힘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
이해했다는 듯 안젤리카가 쓰게 웃었다.
“상태창이 그러는데 ‘불의 이능’ 버프를 사용하려면 먼저 키워드 제한을 풀어야 한대요.”
“키워드 제한이요?”
“네, 키워드에 걸린 제한을 풀려면 서사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아니 버프 쓰는데 왜 서사가 필요해요?”
버프 사용에 그런 조건이 있었나?
처음 듣는 이야기라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안젤리카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버프를 쓰면 키워드에 위배 돼서 그렇대요. 키워드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힘을 드러내야만 하는 사건이 있어야 한대요.”
그녀가 씁쓸히 웃었다.
“저한테 #힘숨찐 키워드가 있거든요.”
나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
극한의 웹소설 컨셉충.
그들은 키워드에 진심인 게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