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불의 이능은 타고난 크기가 사람마다 달랐다. 심지어 황족이어도 이능을 타고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녹스는 애써 찾은 자매의 이능이 제 생각보다 열등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언니에게 기대를 거는 것 같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가 외면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해 줬다.
“그 언니에게는 아예 이능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동생이 가진 이능으로는 마물이 있는 산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분명 언니에게 더 강한 이능이 있는 거죠.”
녹스는 미소를 지었다.
“심리적으로 불안해서 이능을 거부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기다려 보려고요.”
그리고 차분히 덧붙였다.
“협조할 마음이 없다는 게 확실해지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으니까.”
“…….”
알고는 있었지만, 순순히 나오는 사이코패스적 답변에 할 말을 잃었다.
알렉스와는 결이 다른 미친놈이었다.
알렉스는 황실 교육 탓인지 제 외관이나 태도나, 나름대로 광기를 통제하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녹스는 제 광기를 통제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빗질 한 적 없어 보이는 곱슬머리를 대충 묶은 것하며, 단추를 푼 채 가슴팍을 드러낸 저 경거망동한 옷차림도 그렇고.
다만 신기하게도 한없이 가볍게 굴고 있지만,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신체가 무거웠기 때문이다.
뼈가 굵은 건지 녹스의 어깨와 흉통은 거대한 호랑이처럼 두툼했다. 흐느적거리는 하얀 셔츠를 입었는데도 흉부와 삼두의 윤곽이 드러날 정도였다.
그러니 나사 풀린 놈처럼 싱긋거리고 흐트러진 태도를 보여도 사람이 우스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야생 짐승 한 마리와 대화를 하는 기분.
어느 순간 이놈의 눈이 돌아가면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 같았다.
이런 놈의 집에 겨울국 황제의 사생아가 둘이나 감금되어 있다니.
또 오지랖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아니, 누구라도 이렇지 않을까?
솔직히 이건 외면하면 안 되는 거잖아.
말 그대로 범죄의 현장.
‘아니야. 캐릭터일 뿐이야. 과몰입하지 말자.’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손바닥을 파고든 손톱의 감각에 도리어 정신이 날카로워졌다.
‘캐릭터여도……!’
빙의해서 성냥팔이 소녀를 만나면 그 애가 캐릭터인 걸 알아도 사람들은 성냥을 사 주고 따뜻한 숙소까지 잡아 줄걸?
그 새벽에 얼어 죽는 걸 아는데 ‘그래 봤자 동화 캐릭터임.’ 하면서 외면할 사람은 없다고.
나는 사패의 집에 감금된 두 소녀를 생각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흥미가 생기네요. 그 자매를 따로 보고 싶은데, 날을 잡아 주실 수 있나요?”
“조금만 기다려요. 여기로 오기로 했으니까.”
“……이쪽으로 온다고요?”
“네, 낮에 공연을 본다고 외출하셨는데 제가 3시에 협회에 들러 달라고 했거든요.”
뭐야, 감금이 아니었나?
오지랖을 부렸나 하는 생각에 다시 소녀들의 처우를 떠봤다.
“공연을 보러 다니시는 걸 보니 심리적으로 그렇게 많이 힘들지는 않은가 보네요.”
“네. 많이 회복되셨죠.”
또 ‘싱긋’ 웃으며 녹스가 답했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다.
“아직 황도 지리가 낯설어서 조금 늦으실 수 있어요. 부디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 주시길.”
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녹스를 올려다봤다.
퍽 배려심 넘치는 말이었다.
여기 #사패남주들 특징인가.
죽일 거라고 했다가, 배려하려고 했다가.
지들 맘대로네, 진짜.
눈이 절로 가늘어지는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봄국 황제도 겨울국 황실 사생아를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그러나 녹스가 내게도 이 사실을 공유해 줬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봄국 황제도 겨울국 황실 사생아를 찾고 있는 거 아시죠?”
녹스는 이 사실을 내게 공유해 준 적이 있는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자는 사생아가 죽기 전에 자매를 낳은 걸 모르니까.”
이상하게도 녹스는 웃고 있었다.
“황제가 멍청해서 다행이죠.”
라리사 아버님 왜 무시받고 다녀요.
여름국 국서, 가을국 황태자 그리고 사실상 황실 역할을 하는 겨울국 협회장까지. 모두 봄국 황제는 무시하고 가는 분위기다.
근데 무시받을 만하기도 했다. 죄 없는 사생아를 죽이려 했으니까.
나는 라리사 아버님을 동정하다, 다시 그 마음을 거두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각하, 레이디 안젤리카가 도착했습니다.”
녹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들어오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다.
내게 고정되어 있던 녹색 눈동자가 천천히 문가로 움직였다.
“레이디 베로니카는 안 왔나요?”
“예, 레이디 베로니카는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시기에 의원을 불러 함께 저택으로 보내 드렸습니다.”
녹스가 고개를 까닥였다.
“잘하셨네요.”
그는 나를 힐긋 보고는 다시 저쪽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레이디 안젤리카, 이분이 제가 말씀드렸던 레이디 데이지입니다. 레이디의 선생이 되어 주실 분이죠.”
사박.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가까워지기에 나도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려 고개를 돌렸다.
안젤리카의 첫인상은 청순하고 여리여리한 소녀였다.
그녀가 걸음을 뗄 때마다 하늘색 드레스 자락이 사락였다.
그 움직임을 따라 마치 밤하늘을 큼직하게 잘라 붙인 듯 결 좋은 머리카락이 한 몸처럼 움직였다.
그녀는 잔뜩 긴장했는지 어깨를 굽히고 입술을 쉴 새 없이 달싹이고 있었다.
위축된 몸짓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자낮여주인가?
안젤리카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녀는 제 발끝과 이쪽을 번갈아 볼 뿐, 편히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제대로 모시고 있다는 녹스의 말은 사실인지 그녀는 굉장히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본인은 그게 매우 어색한 듯싶지만.
어떻게 구해 줘야 하나 생각하며 시선을 내리던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손목에 워치가 감겨 있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 또한 불안정하던 시선을 내 손목에 고정하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뜬 그녀가 갑자기 획 고개를 들었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나는 침착하게 AI 동기화 메시지를 켰다.
[안녕하세요 영애.]
겨울국 황제의 손녀라니.
그런 유저가 있었다면 유저들이 모를 리 없다.
누구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겨울국 황녀 영애도 유명인사인데.
커뮤에서 언급 안 되는 황족 유저는 없었다.
순간 든 생각은 ‘가족을 남주로 선택했나?’였다.
‘출생의 비밀’ 서사가 발현되면서, 뜬금없이 겨울국 황제 사생아로 노선이 변경된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들려온 답장에 이 생각 또한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안젤리카: 으아아아악! 담당자님! 귀신 목소리가 들려요! 이거 뭐, 뭐예요?]
그녀는 분주하게 허공을 돌아보며 제게 들려온 목소리의 출처를 찾아 헤맸다.
“…….”
뉴비신가 보다.
***
녹스는 턱을 쓸며 한참 동안 우리의 대화를 지켜봤다.
“감사합니다. 본 셰밍에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는데, 절 데려가 주신다니…… 영광이에요.”
“아니에요. 신년제 드레스를 선물할 수 있다니 제 영광이죠.”
메시지로 나는 그녀와 대충 입을 맞췄다.
내가 신년제 드레스를 맞춰 주겠다고 운 띄워 줄 테니 좋아하는 척하면서 따라와 달라고.
생각나는 핑계가 이것밖에 없었다.
여기 남캐들이 샤디올이라는 기성복 의류점에서 여주의 옷을 맞춰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녹스에게 신년제 드레스는 어떻게 제작되고 있는지 물었다.
녹스가 알아서 한다기에 설마 샤디올에서 맞출 생각이냐며, 봄국 영애들이 그랬듯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봐 줬더니 그가 움찔했다.
그리고 본 셰밍 얘기를 꺼내자 안젤리카가 오늘 연극을 보러 갔다가 지나가면서 그 가게를 봤다며 리액션을 해 줬다.
그 뒤로 이어진 대화는 예쁜 것에 끌리는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들의 대화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녹스는 그저 안젤리카가 ‘조용하고 소심하지만, 옷에는 진심이었던 스무 살 레이디’라고 생각했다.
나는 녹스에게 말해 안젤리카를 데리고 나왔다. 본 셰밍에 가는 길이었으니, 그녀의 옷을 맞춰 주겠다고. 안젤리카가 워낙 좋아해서 녹스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녹스는 직접 내 마차 문을 열어 주며 씁쓸하게 제 실책을 인정했다.
“레이디가 저렇게 쉽게 마음을 여는 분이 아니신데, 제가 많이 부족했군요.”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여 줬다.
“아무래도 협회장님은 인상이 편한 분이 아니시잖아요. 협회장님 옆에 있으니까 제가 상대적으로 편하게 느껴졌을 거예요. 어쨌든 다 협회장님 덕분이라는 뜻이에요. 자책하지 마세요.”
안젤리카를 보던 녹스가 말없이 고개를 틀어 나를 쳐다봤다.
“……제 인상이 불편합니까?”
나는 녹스가 그랬듯 눈을 둥글게 휘며 ‘싱긋’ 웃었다.
“거울을 보면 아시겠죠.”
녹스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는지 마차 창에 제 얼굴을 한 번 비춰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젤리카 양처럼 겁이 많은 분에게는 무서워 보일 수도 있겠네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기객관화가 잘 된 사람이네.
“네, 얘기 나눠 보고 집까지 잘 모셔다 드릴게요. 레이디 안젤리카?”
나는 안젤리카를 보며 눈짓했다.
빨리 이 #사패남주에게서 벗어나야 해요.
그런 급한 마음이었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재촉했다.
“너무 늦으면 본 셰밍이 문을 닫을지도 몰라요.”
“아아, 죄송해요!”
그녀는 얼른 녹스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바로 마차에 올라왔다.
탁.
그녀가 오르자마자 마차가 출발했다.
협회가 있는 거리를 벗어나는 순간 안젤리카가 내 손을 붙잡았다.
“정말 죄송한데요. 이런 질문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이거 대체 뭐예요? 이거 뭐죠? 이거 뭘까요?”
새파란 눈동자가 금세 물에 젖었다.
“저 빙의물 읽기만 했지 제가 빙의할 줄은 몰랐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훌쩍이던 그녀는 긴장이 풀렸는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영애,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빙의가 아니라 빙의 시뮬레이션 게임이에요.”
이딴 소리를 내 입으로 말하다니.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안젤리카는 두 손을 내리고는 다시 울먹였다.
“저도 그 안내를 받긴 했는데, 그게 그거잖아요. 이거 게임 빙의물 아닌가요?”
음, 이쪽도 안내서 대충 보는 타입인가 보다.
“이건 게임 빙의물이 아니라 웹소설 플랫폼에서 만든 로판 빙의 시뮬레이션 게임이에요.”
저 말을 하는데도 자꾸만 손가락이 구운 오징어처럼 말려들어 손가락에 힘을 주어야 했다.
나는 하는 김에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