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리안의 버프는 대단했다.
그녀는 이틀 만에 완성한 옷을 보냈다.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었다.
“가격이 잘못된 거 같은데?”
현재 가장 잘나가는 양장사의 옷인데 모자, 드레스, 장갑, 구두까지 다 해서 1골드가 말이 되나?
현생으로 치면 20만 원 남짓.
디X에서 드레스에 구두, 모자까지 20만 원으로 살 수 있냐고.
리안이 지인 할인을 과하게 해 준 거 같았다. 한 99% 정도.
“아가씨, 얼른 입어 보세요!”
웬디가 눈을 반짝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맨날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던 주인에게 새 옷을 입혀 볼 수 있어 신이 난 모양이었다.
웬디는 집을 짓는 것처럼 내게 이너를 하나씩 입히고, 옷을 걸쳐준 뒤 리본까지 예쁘게 매 주었다.
“보세요, 아가씨! 너무 예뻐요.”
거울 앞에 선 나는 깜짝 놀랐다. 옷이 날개라는 말은 사실인지 이미지가 확 달라졌다.
소재가 고급스러워서 그런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엄청 세 보였다.
“이거 난민 후원하러 가는 차림이 아니라…….”
내가 죽인 정적의 장례식에 가는 차림 같은데.
흐린 눈으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다 화장대로 걸음을 옮겼다.
뭐, 어쨌든 세 보이고 싶었으니까.
게다가 기능도 충분하고.
리안은 내가 부탁한 대로 안주머니를 만들어 줬다.
나는 허리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안에는 고정된 작은 주머니가 하나 더 있었는데, 이동 스크롤을 고정할 수 있는 홀더였다.
홀더에는 작은 칼날이 붙어 있어서 손가락만 움직이면 아무도 모르게 스크롤을 찢을 수 있었다.
나는 화장대 서랍에서 스크롤을 꺼내 홀더에 끼웠다. 그리고 삐져나온 스크롤을 만지며 결연하게 다짐했다.
‘여차하면 도망가야지.’
겨울국 협회장이 공식 만남에서 무리수를 둘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니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면 주저 없이 찢자.
외출 준비를 마친 나는 바로 겨울국 협회 건물이 있는 에즈히나 거리로 나섰다.
***
나는 마차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건물을 응시했다.
건물 외벽에는 겨울국 4대 가문을 상징하는 휘장이 길게 걸려 있었다.
그리고 네 장의 천 사이, 벽 한가운데에 정사각형 모양의 금판이 박혀 있다.
금판에 음각된 문양은 겨울국 황실의 인장이었다.
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어깨를 폈다.
이곳은 겨울국 재건 협회.
드디어 나는 협회장을 만나러 왔다.
철컹.
철문이 열리자 마차가 협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정원이 아주 넓었다.
그게 좀 이상했다.
겨울국 4대 귀족이 운영하는 협회라 해도 그들이 피난길에 전 재산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게 아닐 텐데 말이다.
봄국에서 이렇게 좋은 부지를 내준 게 찜찜했다.
봄국 황제가 인자한 인간도 아니고.
그때, 문 앞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모자를 벗고 가볍게 묵례했다.
“안녕하십니까. 겨울국 재건 협회 사무관 스콧 제럴드입니다. 이에테르가의 레이디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이에테르가 영애가 아니지만, 지적하기 귀찮아서 관두었다.
협회 건물은 봄국의 건축 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물 크기에 비해 다소 좁은 복도를 걸을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감상은 홀에 들어서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홀은 대리석 광장으로 느껴질 만큼 넓었다.
네 개의 기둥이 돔형 천장을 받치고 있는 구조였는데, 기둥은 성인의 신장 네 배가 넘을 정도로 높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기둥은 사람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세 인간이 한 인간에게 고개를 숙인 모습.
겨울국 사람이 봄국, 여름국, 가을국 사람의 묵례를 받고 있었다.
봄국 남자는 제복에 봄국 국기를 패턴처럼 새겨 두었고, 여름국 남자는 이마에 두른 띠에 여름국의 국기를 수놓았고, 가을국 남자는 제 국기가 그려진 장갑을 끼고 있었다.
묵례를 받는 겨울국 남자는 오만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겨울국은 국가적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나라를 잃고 남의 나라에서 얹혀살면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AI 담당자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겨울국은 4계절을 모두 가진 대륙 제1 강대국이었다고.
그래 봤자 지금은 망국의 나라지만.
나는 시선을 거두고, 안내자를 따라 그 거대한 홀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무시하려 해도 화려한 조각과 벽화가 다시 시선을 끌었다.
천장의 그림을 보던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 저거 마족 지대에서 봤던 거 같은데?
마족성 도서관 문에 조각되어 있던 전쟁터 그림과 비슷했다.
천장에서 내리꽂히는 고드름과 바닥에서 올라오는 불길. 잔인한 살육의 현장을 실감 나게 묘사한 게 똑같았다.
‘실제로 있던 역사인가?’
두 지역에 똑같은 그림과 벽화가 있는 걸 보니 의심스러웠다.
뭘 고민해? 물어보면 되지.
지금은 AI와 연결되어 있잖아.
그때도 궁금했는데 잘됐다.
나는 바로 AI에게 물었다.
‘담당자님, 혹시 저 벽화는 실제 있던 일을 기록한 그림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역시.
‘저게 50년 전에 마왕이 겨울국을 멸망시킨 전쟁이에요?’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65년 전, 마왕이 동면하는 틈을 타 겨울국이 마족 지대를 습격한 전투입니다.]
자박.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레이디?”
앞서가던 안내자가 의아함을 느끼고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걸음을 뗐다.
‘먼저 습격을 했다고?’
처음 듣는 소리에 혼자 놀라는데 이 또한 질문으로 이해한 AI가 답했다.
[네.]
‘왜요? 아니, 애초에 왜 굳이 겨울국이 마족 지대를 탐내요? 영토도 크고 잘 살았다면서요.’
정복 본능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AI가 내 생각을 잘라 냈다.
[이 이상의 스토리는 시즌 2의 이야기로 스포일러 우려가 있습니다.]
‘……아니, 나는 시즌 2 못 보는데 뭔 스포일러예요. 빨리 알려 줘요!’
또 헛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AI는 순순히 답을 알려 줬다.
[겨울국과 마족 지대의 전쟁은 영역 싸움이 아닌, 출생의 비밀에서 시작됩니다.]
‘엥? 출생의 비밀이요?’
그런데 그게 AI가 가진 정보의 전부인지 그 이상 답을 주지 않았다.
뭐야, 뭔데.
둘이 종족도 다르잖아?
막장스러운 스토리가 머릿속을 채우자 흥분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들은 겨울국과 마족 지대의 전쟁 비하인드 스토리에 나는 온 신경을 빼앗겼다.
그 덕에 인지하지도 못한 새 협회장의 방 앞에 도착했다.
“협회장님, 이에테르가의 레이디가 도착했습니다.”
사무관의 목소리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네, 들어오세요.”
문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목소리가 내 생각보다 어렸기 때문이다.
벌컥.
심지어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다급히 나온 남자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를 하나로 느슨히 묶은 탓에 옆머리가 흘러나와 있었는데, 그게 거슬리는지 제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싱긋 웃었다.
‘……싱긋?’
나는 생각의 흐름이 고른 단어에 놀라 기겁했다.
남자는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기다렸습니다. 아, 잠시만요.”
남자는 제 손바닥을 바지에 한 번 닦고는 다시 내밀었다.
“겨울국 재건 협회장을 맡은 프레센치아가의 녹스입니다.”
천진한 목소리로 남자가 내 손을 바랐다.
‘왜 이래! 천진하다니 무슨 소리야!’
눈앞의 남자가 주는 인지 부조화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협회장은 내가 생각한 흑막과 너무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게다가 크라바트는 어디다 팽개친 건지, 협회장은 단추를 두 개나 푼 흐트러진 차림이었다.
분명, 프레센치아가는 겨울국의 명망 있는 공작가였다.
‘녹스 프레센치아, 너 공작이라며. 근데 너 왜…….’
내가 아는 공작 비에른과 엘런을 이 남자와 같은 선상에 세워 보니, 세계관이 달라졌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파격적인 비주얼이었다.
일단, 인사부터 받자.
나는 혼란을 꾹 누르며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녹스는 가볍게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문을 더 넓게 젖혀 열었다.
“들어오시죠. 아, 스콧. 차를 준비해 주세요.”
“예.”
녹스는 눈웃음을 한 번 짓고는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문은 열어 둘까요?”
그가 눈썹을 팔자로 휘며 어색하게 웃었다.
“저희 사이에 오해가 있다 보니 문을 닫으면 불편하실 거 같아서요.”
내가 먼저 내 설정집을 읽지 않았다면, ‘오해였나 봐. 저런 순박한 사람이 날 납치하려 했다니, 오해지, 당연히. 내가 예민했네.’라고 착각할 만한 태도였다.
하지만 나는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은 채 단답했다.
“편하신 대로.”
세게 나가자.
사실 설정에 따르면 녹스와 나는 구면이니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내 이미지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겠지만, 그래도 만만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녹스는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았다.
달칵.
녹스는 긴 다리를 휘적이며 소파로 걸어갔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가죽 소파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고 곧 침묵이 시작됐다.
녹스가 말을 고르는 동안 나는 잠시 집무실을 눈으로 훑었다.
얇은 커튼을 뚫고 들어온 오후 햇살이 집무실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따뜻한 빛이 가득한데, 나는 기묘하게도 추위를 느꼈다.
나를 꿰뚫을 것처럼 응시하는 서늘한 눈빛 때문이었다.
드디어 할 말을 골랐는지 녹스가 입매를 길게 늘이며 제 뺨에 깊은 보조개를 새겼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밝은 목소리에 미약한 호기심이 섞여 있다.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거든요.”
나라고 좋아서 찾아왔겠냐. 안 만나면 네가 죽일 거 같아서 온 거잖아.
순간 새어 나오려던 욕을 삼키고 다리를 꼬았다.
나는 세게 나가는 컨셉을 유지하며 물었다.
“그래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만날 거라 생각하신 건지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