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드르륵.
문을 열자 아무도 없는 숙소 전경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아이시스는 여름국 신도들과 함께 예배하러 환원 신전으로 갔다.
캐릭터에는 저마다 벗어날 수 없는 본업이 있었다.
황제와 성녀, 디자이너, 기사, 요리사, 카페 경영자 등등.
나는 어쩌다 마왕 퀘스트에 끼는 바람에 과로하고 있지만, 사실 내 캐릭터 자체는 직업이 없었다.
평온한 집순이 그 자체.
이제 집에 가면 다시 그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거지.
눈가가 촉촉해진다.
얼른 본업(?) 하러 돌아가야지.
짐은 어제 다 쌌는데, 여름국 관리들이 가져가 검사 중이었다.
내가 황실 물건이라도 훔쳐 갈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여름국 관리는 짐 검사가 끝나면 알려 줄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아마 검사가 끝나면 바로 스크롤을 써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스크롤을 물 쓰듯 쓰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겠지. 앞으로는 씀씀이를 줄여야 할 텐데.
세계관 최강 부자들과 지낸 지 한 달 반.
그들에게 옮은 소비 습관을 없애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나는 침대에 앉아 손에 쥔 장미 꽃잎을 쓸었다.
방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햇살에 노란빛이 돌았다. 곧 노을이 질 모양이다.
나른한 조도처럼 차츰 손끝에 힘이 빠져 갔다.
알렉스한테도 인사를 해야 했나?
어쨌든, 동료였잖아.
도움도 많이 받았고.
머리는 계속 이유를 찾아 대는데 몸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바닥에 긴 그림자가 생겼다.
“…….”
여주의 방에 함부로 올 사람은 이 남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둥근 창틀에 팔을 기댄 알렉스가 보였다.
그는 서운함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기다리려고 했는데 결국 안 올 거 같아서.”
입꼬리를 들어 올린 알렉스의 시선이 내 손으로 떨어졌다.
“그건 뭐야?”
“이능의 부산물이에요.”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됐는데, 화제가 바뀌니 반가웠다.
나는 중얼거리며 침묵을 치우려 노력했다.
“일검이 주셨어요. 누명을 벗은 게 기쁘셨나 봐요.”
알렉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길어졌다.
빙그레 붉은 호선을 그린 그가 창틀에 기댔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사아아아.
손에 들려 있던 장미꽃이 사라졌다.
집 한 채가 몇 초 만에 날아간 것이다.
“전하!”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왔다.
그 어떤 집값 폭락도 이러한 충격을 줄 수는 없었다.
나는 푸른 비단을 탈탈 털며 현실을 부정해 봤지만, 손톱만 한 작은 나무 조각만 툭 떨어질 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지, 진짜 없애신 거예요?”
미안함과 불편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거센 분노가 메꿨다. 날 선 눈으로 노려보자 알렉스는 뻔뻔하게 웃었다.
“화내지 마. 돌아가는 길에 손이 무거울까 봐 대신 옮겨 준 거야.”
“예? 전하는 봄국에 가지도 않잖아요.”
“봄국까지 데려다줘?”
“제가 언제 데려다 달라고 했어요!”
귀에 무슨 필터를 단 건지 말을 곡해하던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사람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법이니까.”
“전하만 그러세요.”
“그래. 나만 그런 거로 해.”
“왜 이렇게…….”
“말을 잘 듣냐고?”
얼추 비슷한 뜻이어서 나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러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잘 듣고 싶으니까.”
그는 홀로 질문을 가로채고 홀로 답했다.
“…….”
입을 달싹이던 나는 일어난 김에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창문 앞에 있던 자개장을 열어 편지를 꺼냈다.
한참 머뭇거리다 손을 뻗어 알렉스에게 그 가죽 봉투를 건넸다.
“이게 뭐야?”
“작별 선물이에요.”
나는 여름국을 떠나며 작별 선물을 준비했다.
디아나에게는 ‘마족어 해석’ 여주 버프 복사를, 아이시스에게는 ‘불취단’을, 삼검과 사검에게는 시장에서 산 검 장식을, 환관에게는 갓을, 키스카 영애에게는 개업 기념 행운목을, 그리고 다른 영애들에게도 소소한 선물을 전했다.
이건 알렉스 몫으로 준비한 선물이었다.
알렉스는 가죽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붉은 비단에 붙인 한지가 있다. 내가 직접 만든 작은 족자였다.
족자 안에는 세필 붓으로 적은 시가 적혀 있다.
알렉스는 경연 날 내가 적은 시가 마음에 들었는지, 황제에게 그 서예 작품을 사고 싶다고 요구하다 여름국 대신들의 뒷담화 소재가 되었다.
거액을 제시해 재무부 대신들은 흔들렸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내가 확인한 건 아니니 진실은 알 길이 없다.
하긴, 우리 윤동주 시인의 명작에 내 명필 버프까지 들어갔는데 소장 욕구가 자극될 만하지.
알렉스는 소장욕이 강했다.
마족의 서적과 그림들을 관리하던 걸 보면 수집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덕후의 마음은 덕후가 가장 잘 아는 법.
나는 경연 날 적었던 시를 버프를 사용해 족자에 적었다.
직접 마주할 용기가 없어 이 선물은 궁인을 통해 전할 생각이었는데, 차라리 잘됐다.
“가지고 싶어 하셨잖아요.”
시를 읽던 알렉스가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했다.
나는 선심 쓰듯 말했다.
“여름국 대신들한테 괜히 욕먹지 마시고 저한테 말하세요. 세 장 정도는 더 써 드릴 수 있어요.”
그게 퍽 마음에 드는지 알렉스가 또 웃음을 흘렸다.
그는 잠시 그 족자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봉투 안에 넣었다.
“고마워.”
“뭘요. 전하가 주신 것들에 비하면 약소하죠.”
“나도 선물을 보냈는데, 이걸 받고 나니 미안해지네. 너무 약소하게 준비한 것 같아서.”
“선물을 보내셨다고요?”
“돌아가면 확인해 봐.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뭐야. 뭘 보낸 거야?
“아니 직접 주시지 왜 굳이 집으로 보내셨어요.”
“그대가 날 보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보기 싫은 건 아니에요.”
나는 망설이다 말했다.
“전하는 절 좋아한다고 하는데, 저는…….”
“데이지.”
알렉스가 말을 끊으며 창 안으로 몸을 숙여 들어왔다.
“내가 그대를 좋아하는 건 그대의 잘못도 아니고 책임도 아니잖아. 날 싫어하고 미워해도 괜찮아. 다만, 미안해하지는 마.”
알렉스는 제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가볍게 쥐었다.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태생이 이렇다 보니 사과를 받는 법은 배우지 못해서.”
무릎을 꿇듯 숙인 자세로 나를 올려다보는데도 그는 전혀 굴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을 낮추어도 낮춰지지 않는 걸 보면 태생을 들먹이는 저 농담이 틀린 말도 아니다.
“레이디, 안에 계십니까?”
그때, 문가에서 궁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출국 허가가 난 모양이다.
눈치 빠른 알렉스가 바로 손을 거두었다.
“조심히 가.”
그는 미련 없이 바로 자세를 세우고는 물러났다.
나는 돌아가는 알렉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나를 부르는 대신의 목소리에 창가에서 돌아섰다.
아이시스의 말이 떠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저에서 멀어져 여주처럼 굴게 된다는 그 말이.
소름 끼치게 오그라들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어느새 내가 아닌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고 있다.
“나도 과몰입인가…….”
손끝에 남은 간지러운 온기에 나는 괜히 손가락을 몇 번 말아 쥐었다.
나는 어느새 그들을 캐릭터가 아닌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
과몰입은 자제해야지.
깨달음을 얻은 나는 당분간 세계관을 즐기며 객관적 태도를 되찾기로 다짐하고 봄국으로 돌아왔다.
층고가 높고 화려한 복도를 걸으니 새삼 집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천장까지 닿은 아치형 유리창이 빽빽이 박혀 있어 복도로 맑은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역시 내 취향은 봄국인가 봐.
연둣빛 녹음과 화려한 색채의 꽃들이 가득한 정원. 그 사이 자리한 분수가 반짝이는 물방울을 뿌려 댄다.
날씨부터 따사로운 게 햇살 바이러스의 나라답다.
이런 날 BGM은 필수지.
‘담당자님, 신나는 BGM 깔아 주세요.’
나는 싱숭생숭한 기분을 털어 내려 얼마 전 구매한 로판 BGM 서비스를 켰다.
[언제 어디서나 로판 몰입감을 높여 주는 BGM을 재생합니다.]
[“이제 가문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본가로 귀환한 공작 영애의 선전포고┃자존감이 올라가는 당당한 사운드를 재생합니다.]
상태창이 사라지자 웅장한 북소리가 시작됐다.
넓게 울려 퍼지는 진동 사이로 날카로운 바이올린 소리가 비장하게 파고들었다.
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붉은 카펫 위에 도장을 찍듯 힘주어 걷는데 묘하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신나게 걷고 있는데 갑자기 복도 끝에서 문이 열렸다.
내 방에서 나오던 사용인이 나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가씨, 벌써 돌아오셨어요?”
“웬디, 오랜만이야.”
나는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그런데 웬디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 공작님께서 많이 기다리셨는데 인사는 나누셨나요?”
“아니, 아까 입구에서 하레네를 만났는데 오라버니는 외출 중이라고 하시더라고.”
“아하하, 아! 아가씨 배 안 고프세요? 우선 식당에 가셔서 식사부터…….”
나는 내 앞을 막아선 웬디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나 방에 들어가면 안 돼?”
설마,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한 건가?
오늘 돌아올 거라고 언질은 주었지만, 정확한 시간은 알리지 못했다.
내가 너무 빨리 와서 준비를 못 끝낸 건가?
나는 혼자 감동한 채 입술을 말아 물었다.
“나 집에 온다고 선물이라도 준비한 거야?”
그러자 웬디가 눈에 띄게 흠칫했다.
“제, 제가 준비한 건 아니고…….”
“번거롭게 왜 그랬어! 괜찮은데.”
나는 적당히 놀란 척할 준비를 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내 신남을 느낀 웬디가 체념하고 미소를 지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순간 식물원에 온 줄 알았다.
온갖 화병에 가득 찬 여러 종류의 꽃이 침대와 소파 옆에 놓여 있었다.
아니. 이걸 놓여 있다고 해도 되는 걸까?
공간 낭비를 허용하지 않는 물류 창고처럼 빽빽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뻣뻣한 고개를 돌려 웬디에게 물었다.
“……이게 뭐야?”
“이능의 부산물이래요.”
웬디는 울상을 지으며 협탁을 흘깃 쳐다봤다.
“아가씨에게 직접 드려야 한다고 가을국 황실 사람들이 놓고 갔어요.”
아, 설마 이게 알렉스가 말한 선물이야?
나는 미로를 헤매듯 빽빽한 꽃 사이를 헤쳐 협탁으로 갔다.
그곳에는 가을국 황실 인장이 찍힌 편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하단에 박힌 알렉스의 풀네임을 보며 나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아는 대로 보내긴 했는데, 많이 놀랐을까 봐 걱정이네.』
이러면 누가 안 놀라!
내 방은 황태자의 선물로 폭발할 것 같았다.
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내 표정을 오해한 웬디가 사색이 되어 다가왔다.
“너, 너무 비싼 물건들이라 저희가 감히 치울 수가 없어서, 공작님이 오시면 허락받고 치워 두려고 했는데, 이, 이렇게 빨리 오실 줄 몰라서요…….”
“아, 아니야! 너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아니 화난 거 아니야. 아이 좋아! 꽃 너무 좋다아.”
울먹이는 웬디를 달래려 나는 억지로 웃으며 꽃 하나를 들어 향을 맡고 좋아하는 척했다.
“그래도 오라버니께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정확히 몇 시쯤 돌아오는지 하레네한테 물어봐 줄래?”
“네네!”
웬디는 재빠르게 방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자 나는 다시 시선을 틀어 내 방을 쳐다봤다.
다양한 꽃에 뒤덮인 방이 더 적나라하게 눈에 담겼다.
화병 하나에 담긴 것만 대충 세어도 백송이 남짓. 수십 개의 화병이 있으니 대충 세도 몇천 송이였다.
콰광쾅콰콰과광.
나를 희롱하듯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클라이맥스 연주가 들려왔다.
심장을 울리는 격한 선율 탓에 감정이 더 격해졌다.
급격한 피로감에 침대에 주저앉았다.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외면해 온 현실이 거센 파도처럼 덮쳐 왔다.
벌써 3칸이나 채워진 슬롯.
1달 바깥 생활을 했을 뿐인데, 나는 S급 후보들을 모두 담고 말았다.
“…….”
바닷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생각이 머릿속에서 축 늘어졌다.
나 [결] 잘 칠 수 있을까?
머릿속에 남아 있던 희망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CH7. 겨울국 재건 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