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경연장은 고요했다.
격조 높은 관람 매너 덕분에 경연에 참석한 이들은 집중해 문장을 감상할 수 있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하얀 도화지 위로 그려지는 글자가 마치, 깨끗한 가을의 밤하늘에 하나하나 놓이는 별처럼 아름다웠다.
곧이어 별 옆으로 단어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가을, 밤하늘, 별, 추억, 사랑.
밤하늘을 보며 이어 가는 사색이 별과 묶이며 아름다운 시가 되었다.
예쁜 단어들이 종이를 가득 채우는데도 시에 담긴 공허한 마음이 밀려왔다.
그리고 시는 점차 끝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경연에 참가한 영애가 마지막 점을 찍는 순간 유리아는 떨리는 숨을 흘렸다.
왜인지 감명 깊은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카타르시스가 밀려온 탓이다.
먹먹함에 짓눌려 여운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겨울이 오기 전, 가을밤에 홀로 다가오는 불행을 기다리는 기분은 어땠을까.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자신의 무덤 위에 돋아난 풀이 자랑스러울 거라 말하는 그 마음을 희망이라 생각해도 되는 걸까.
없던 감수성을 멋대로 퍼 올리는 양수기 같은 버프였다.
유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들 같은 생각인지 커뮤니티와 단톡방이 조용했다.
명필 영애는 제가 적은 시를 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 글을 다 쓰지 못한 서예가가 허리를 숙이고 있고, 그 너머로 영애의 종이에 시선을 두고 있는 황태자가 있었다.
황태자는 시력이 좋은지 그녀가 적은 문장을 읽으며 생각에 빠진 얼굴을 했다.
한참 후, 그의 시선이 올라오려는 찰나 서예가가 글을 다 적었는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시선은 빗나가고 말았다.
알 수 없는 아쉬움에 유리아는 한숨을 쉬다 불현듯 깨달았다.
‘이러다 또 주식 사겠네!’
이놈의 망붕렌즈 빨리 버려야지.
유리아는 조용히 망붕렌즈를 가슴속 어딘가에 수납하며 다시 태블릿을 고쳐 잡았다.
치잉.
끝을 알리는 징이 울리고, 궁인들이 올라와 종이를 가져갔다.
궁인들은 돌아다니며 관람객들에게 지장을 요구했다.
사람들은 제가 마음에 드는 작품에 지장을 찍었다.
한참 뒤, 궁인이 두 종이를 가지고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제가 묘한 미소를 짓더니 발표를 허락했다.
“결과를 발표하라.”
“예.”
황제의 명에 두 여인이 다소곳이 답하였다.
궁인이 두 장의 종이를 모두에게 펼쳐 보였다.
“아우룸 마누스 선생은 53인의 지장을 받았습니다.”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 양은 57인의 지장을 받았습니다.”
결과를 발표하자 안타까움이 섞인 신음과 박수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오오.”
“아, 이런 결과가 나오는군요.”
탄성이 여러 겹으로 겹쳐지며 파도처럼 밀려왔다. 순식간에 좌중이 소란해졌다.
유리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됐다. 국서는 살았어.’
기뻐하는 찰나 커뮤니티 댓글도 터지기 시작했다.
┗ 헐 됐다! 3연승!!
┗ 우와아아아 ㅠㅠ 국서 살았다. 산 거 맞지? ㅠㅠㅠㅠ
┗ 1명도 아니고 경연 참석자 3명이 내리 소원 빌면 끝났지
┗ 만약에 소원 거부하면, 내가 소송 준비할게 ㅇㅇ 영애들 걱정 ㄴㄴ
┗ 변호사 영애! 나 영애 믿구 저 축배 들러 간다 >_<
이변은 없었다.
세 명의 우승자가 모두 국서의 무죄를 주장하며 석방을 청하자, 황제는 국서의 사면 및 복권을 허락했다.
이날의 경연은 50년 커뮤니티 역사에 기록된 역대급 전개 수정 업적이었다.
***
끝났다.
경연도, 여름국 여행도.
많은 일이 있어서 그런가 홀가분하면서도 아쉬운 기분이었다.
경연이 끝나고 시상을 할 때, 경연장이 뒤집혔다. 세 우승자가 짜기라도 한 듯 국서의 석방을 소원으로 빌었기 때문이다.
짠 거 맞지. 대놓고 짰잖아.
몇몇 대신들이 반대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대신들이 경연 정통성을 들먹이며 우리 편을 들어 준 덕에 소원은 쉽게 수리되었다.
우리 편을 들어 준 대신들 또한 후궁 영애의 가족이거나 입궁하지 못한 유저들의 남주거나 지인이었다.
모두가 다 함께 힘을 모은 ‘국서 구출 운동’.
대단하네. 이게 말로만 듣던 ‘전개 수정’이구나.
나는 뿌듯함을 느끼다 기지개를 켰다.
어쨌든, 이제 나는 봄국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방금 디아나를 만나고 왔다.
나는 오늘 드디어 그녀에게 선물을 건넸다.
‘메시지 아이템 사고 싶었는데 안 사고 참길 잘했어.’
열심히 캐시를 모은 보람이 있었다. 떠나기 전날 딱 20캐시를 모았다.
아무래도 마왕과 전투를 치르려면 마족어 해석이 필요한 순간이 있을 것 같아서 디아나에게 ‘마족어 해석’ 버프를 복사해 선물했다.
마지막에 그녀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순조롭게 토벌이 준비되는 것과 반대로 겨울국 재건 협회장 일은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겨울국 재건 협회장은 국서에게 접근한 일과 나를 납치하려 했던 일에 선을 그었다.
협회는 전 대륙에 퍼진 난민을 모두 제어할 수 없다며, 일부 협회원들이 개인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꼬리를 자른 것이다.
여름국에서는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며 강하게 항의했지만, 협회 본사는 봄국에 있기에 협회장 압송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디아나는 해결해 줄 테니 기다리라고 했지만, 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더 이상 누군가의 도움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자박.
어느새 황제궁을 빠져나온 나는 연못 다리에 올라섰다. 시야가 높아진 탓에 노을이 내려앉은 붉은 누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 붉은 빛이 연등 축제를 떠올리게 했다.
[가질 수 없다면 죽일 수밖에.]
그런 메시지를 보냈으면서, 협회장은 살수에게 날 죽이지 말고 다치지 않게 데려오라고 했다.
살아 있는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단 이야기다.
설득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뻐근한 목덜미를 주물렀다.
대체 뭘 가지고 있는 걸까.
며칠 내내 생각했다.
‘데이지는 무엇을 가지고 싶어 했을까?’
돈은 부족한 줄 모르고 자랐고 지금도 부유한 공작가의 후견을 받고 있으니 큰 매력이 없었다.
아마 고서나 정보겠지? 데이지는 고서 수집이 유일한 취미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도달했다.
피하지 말자.
직접 만나 들어 보는 게 빠르겠어.
뒤에서 끌려가는 것보다 차라리 앞에서 얘기를 들어 보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았다.
봄국으로 가면 공식적으로 겨울국 재건 협회장을 만나 볼 생각이다. 일단 안전하게 ‘이에테르가’ 이름을 달고 봉사활동을 가는 거다.
이에테르가의 이름을 팔면 저쪽도 성급하게 굴지는 않을 테니, 만나자마자 달려들어 감금을 하거나 나쁜 짓을 하지는 않을 거다.
일단 직접 얘기해 보고 각을 잡자.
나는 여러 안전장치를 구상하며 화월궁으로 들어섰다.
“……?”
그런데 내 방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장포 위로 수놓아진 금빛 호랑이가 익숙하다.
일검이 왜 여기 있지?
설마 내가 국서를 석방해 달라고 소원 빌어서 화난 건가?
나는 숨을 죽이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새 기척을 느낀 일검이 획 뒤를 돌았다.
“설마 날 보고 도망치는 건가?”
나는 뒷걸음질하던 발을 자연스럽게 앞으로 내디디며 눈을 크게 떴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 방으로 가는 중이었는데요?”
잡아떼니 일검이 무표정하게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민망함을 치우려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묻자 일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단도였다. 끝에 장미꽃이 달린 신기한 칼이…… 칼이 아니네?
놀랍게도 일검은 장미 한 송이를 꺼냈다. 그리고 더 놀랍게도 그 장미를 내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오늘 돌아간다기에 선물을 가져왔다.”
왜?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이다.”
“…….”
검소 컨셉이 너무 과하시네.
설마 한 제국의 후궁이 장미 한 송이보다 비싼 패물 하나 없을까.
거짓말하지 말라는 눈으로 바라보자 일검이 피식 웃었다.
그는 푸른 비단으로 감싼 줄기를 돌리며 말했다.
“이게 뭔지 모르는 모양이군.”
“장미 아닌가요?”
“이능의 부산물이다.”
“예?”
놀라 바라보자 일검이 다시 장미를 내밀었다.
“봄국 사람들은 꽃을 좋아한다기에 나보다는 네게 더 어울릴 것 같아 가져왔다.”
“이 귀한 걸 제게 주셔도 됩니까?”
“내 목숨보다 귀할까?”
웃음기 가득한 반문.
“소용에게 들었다. 네가 내 누명을 벗기려고 힘을 썼다지.”
나는 그제야 일검이 큰 오해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키스카 영애가 어떻게 포장한 건지 모르겠는데, 일검은 내가 진범을 잡아 저를 구명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착각계 여주 키워드 어디 안 가네. 또 남주가 착각에 빠졌다.
솔직히 털어놓으려는데 일검이 장미를 다시 한번 내밀었다.
“그간 내가 무례했다. 말뿐인 사과보다는 보상이 더 좋을 것 같아 주는 것이니 받거라.”
나는 흠칫했다. 얘는 무슨 꽃을 검으로 찌르듯이 주냐.
꽃으로 심장을 찌를 기세길래 마지못해 이능의 부산물을 받았다.
일검이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봄국에서는 얼마에 거래되는지 잘 모르지만, 여름국에서는 마을의 집 한 채 가격에 거래된다.”
내 반응이 영 불만스러운지 일검이 스스로 선물의 가격을 밝히며 리액션을 유도했다.
집 한 채 가격이라는 말에 나는 그가 원하던 격한 반응을 했다.
“네?!”
이능의 부산물이 비싼 건 알았는데, 꽃 한 송이가 집 한 채 가격이라니.
“넙죽 받길래 모르는 듯하여 말해 주었는데, 역시 몰랐구나.”
내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일검이 미소를 지었다.
“별 볼 일 없는 성이지만, 시두스가의 가보니 내 사과가 가볍지 않다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
“아뇨!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가보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
일검은 가을국 혼혈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이건 그의 조상 중 하나가 가을국 황실에서 하사받은 꽃 같았다.
세상에, 일검 사과 스케일 무슨 일이야!
자본에 미친 나조차도 거부감이 들 정도로 과한 사과였다.
“받거라. 윗사람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예가 아니니.”
일검은 냉정히 내 옆을 지나쳤다.
“조심히 돌아가고, 다음엔 잘해 줄 테니 또 놀러 오너라.”
나는 사라지는 일검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뻐끔거리다 다물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장미꽃으로 떨어졌다.
정작 나를 겨울국으로 파견 보낸 봄국 황제는 입을 싹 닦았는데, 타국 후궁에게 고가의 선물을 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여름국에 이민 올까?’
아직 버리지 못한 자본주의의 때가 역마살을 자극한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걸음을 뗐다.
이민을 오더라도 프리마돈나 영애 콘서트는 참석하고 생각하자.
봄국의 어드밴티지를 떠올리며 애써 귀환 의지를 다독였다.
그나저나 다행히 프리마돈나 영애 공연은 보는구나.
타이밍 맞춘 귀환에 나는 긴장을 풀고 방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