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커뮤니티는 이미 폭발 직전이었다. 영상 아래로 미친 듯이 댓글이 달렸다.
┗ 미쳤다 미쳤어
┗ 컨셉 장인이네 #수인영애
┗ 울 고영 영애 천재만재♥
┗ 무대에 진심인 고양이라니... 여기를 제 무덤으로 삼겠습니다
┗ 로판에 빙의하길 잘했다. 죽기 전에 고양이 여주의 춤사위를 보는구나ㅠ0ㅠ
┗ 힐링이 별거냐고 ㅠㅠ 이게 힐링이지 ㅠㅠㅠ
유리아는 정신을 사납게 하는 댓글을 꺼야 하나 고민했지만, 공감을 불러오는 댓글에 고개를 백번 천번 끄덕이느라 끌 수가 없었다.
둥두둥둥둥.
곧 심장을 울리는 장구와 꽹과리 소리가 연못가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장단에 맞추어 상모를 돌리는 아기 고양이를 본 적이 있는가?
3등신의 황금 비율을 뽐내는 고양이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학처럼 고고한 사대부들마저 심장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대감! 당장 화백을 불러 이 모습을 후세에 널리 알려야 합니다.”
주변의 광기에 보답하듯 장구의 박자가 빨라지고 키스카 영애도 더 분주히 몸을 놀렸다.
윤기가 흐르는 회색 털이 폴짝폴짝 뛰어 대는 그녀의 스텝을 따라 반짝거렸다.
┗ 나 앞으로 슬플 일은 없을 거 같아. 울적할 때 이 광경을 떠올리면 바로 마음이 정화될 테니까
┗ 라이브 하는 영애, 이거 꼭 ㅠㅠㅠ 최종본도 업로드해줘 ㅜㅜ 나 소장해야해 ㅠㅠㅠ
┗ 공유해주신 영애님께 감사드립니다 (눈물)
┗ ㅇㅈ 이게 공익이고 복지지
┗ 벤담이 여기 빙의해야 하는데, 공리주의 사례는 여기서 찾아야 한다
유리아는 화면이 흔들리지 않도록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이토록 완벽한 힐링 영상은 처음이라 그녀의 모든 근육이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렸기 때문이다.
“아, 이걸 어떻게 이깁니까.”
“종이 다르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다른 참가자들의 탄식이 새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입꼬리는 하늘 높이 올라간 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들도 경쟁자의 무대를 즐기고 있다. 역시 귀여움에 네 편 내 편은 없는 것이다.
가무의 역사를 새로 쓴 키스카가 내려오자 여기저기서 그녀를 찬양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광란의 춤사위가 지나간 자리.
극한의 단짠을 자랑하듯 바로 차분한 3차 서예 경연이 시작되었다.
자박자박.
올라온 궁인들이 경연장을 정리하고, 문방사우를 놓았다. 그리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비록 연못을 두고 떨어져 있지만, 먹을 곱게 가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먹물이 완성될 즈음 2명의 참가자가 올라섰다.
3차 경연에 참석한 후보는 봄국에서 온 #귀족영애를 제외하면 한 명이었다.
여름국의 유명한 명필이 참가한 탓에 다들 일찍이 포기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묘한 구도가 이뤄졌다.
“마누스 선생, 꼭 이겨야 하오!”
뭐랄까…… 올림픽 느낌?
여름국 사람들이 똘똘 뭉쳐 아우름 마누스라는 서예가를 응원했다.
외국인에게 우승을 넘겨줄 수 없다는 견제가 느껴진다.
눈에 불을 켠 남주들과 달리 딱 한 남주만이 입가에 미소를 걸고 경연을 여유롭게 관람하고 있었다.
가을국에서 온 황태자 남주였다.
붉은 머리는 취향이 아니라서 대충 보려 했으나, 바로 시선이 붙잡혔다.
묻지도 않고 함부로 취향을 파괴해 버리는 예의 없는 이목구비에 유리아는 움찔했다.
‘미X 대존잘……!’
황태자는 붉은 장미꽃 같았다.
화려한 이목구비와 결 좋은 붉은 머리칼. 황족 태생을 증명하는 고아한 자태가 도도한 장미를 연상하게 했다.
하얀 예복에 달린 금빛 견장과 골드체인이 사붓이 이는 바람에 살랑였다.
오묘한 금빛 눈동자와 함께 시선에 박히는 의상은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오래된 격언을 떠올리게 했다.
저 화려한 착장을 소화하다니. 그야말로 ‘왕자님’의 완벽한 시각적 구현이었다.
디자인팀의 실력에 충격을 받아 온 지 오래인데, 아직도 놀랄 마음의 여분이 남았다는 것 또한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 남주의 시선은 오직 한곳에 머물렀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둥글게 몸을 말고 있는 골든 햄스터가 있다.
저 영애 왜 몸을 숙이고 있지?
엉덩이까지 뒤덮은 금발 때문에 경연에 참가한 영애의 뒷모습은 잔뜩 겁에 질린 금빛 설치류 같았다.
곧은 자세로 앉아 대기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녀는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문진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고 있었다.
궁인이 다시 올라와 불편함이 있는지 묻고는 문진 배치를 도와주었다.
머쓱해진 그녀는 마지못해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자 바로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움찔하더니 고장난 로봇처럼 슬금슬금 연못가로 시선을 돌렸다.
누가 봐도 필사적으로 황태자의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멀리서 보는 이쪽 눈에 저 회피가 보일 정도니, 당사자인 황태자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황태자는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흉상에 새겨 둔 미소처럼 형식적으로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던 그가 방심한 듯 작게 웃음을 흘렸다.
분명 조막만 한 얼굴 근육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리고 이내 알 수 없는 씁쓸한 감정이 금안에 서리기 시작했다.
‘……오호라?’
유리아의 눈에 무언가가 감지됐다.
이를테면 보이지 않는 감정선 같은 것.
유리아는 매의 눈으로 두 남녀를 살피기 위해 렌즈를 장착했다.
망붕렌즈였다.
직사광선처럼 황태자의 금빛 시선이 영애에게 머물렀다.
한 화면에 담기는 금빛 색채를 보고 있으니 시각이 편안해진다. 비슷한 그림체의 남녀가 주는 안정적인 케미랄까.
근데 영애는 왜 황태자를 피하는 거지?
입덕부정기인가?
취향이 아닌가?
아니, 저 얼굴에 취향이 갈릴 수 있어?
고뇌에 빠진 유리아는 남주의 모자람을 찾아보려 애썼지만 일단 외관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인성이 잘못된 남주인가 싶었지만, 올곧게 한 여주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보면 인성 문제를 찾기도 어려웠다.
설사 문제가 있다 해도 오해가 아닐까 싶었다.
저 얼굴을 봐.
그럴 남주가 아닌걸?
설사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사연이 있었겠지.
아하, #후회남인가?
성능 좋은 망붕렌즈는 쉴 새 없이 떡밥을 캐내며 유리아의 머릿속에 서사를 만들어 냈다.
‘……이 주식 잡아 볼까?’
비주얼 케미부터 합격인 저 남주가 자꾸만 과몰입을 유도했다.
하지만 유리아는 그 마음을 곧 내려 두었다.
이 똥손으로 주식을 잡으면 서사가 폭망할 게 분명했다.
키스카와 일검을 영업하며 지내온 세월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주식은 하루아침에 휴짓조각이 되었다.
하긴, 현생에서도 내가 올림픽을 보면 꼭 우리나라가 지던데 여기라고 다르겠어.
한번은 참지 못하고 올림픽 경기를 봤다가 조국에 패배를 안겨 준 적도 있었다. 당시 획득한 무한한 죄책감을 떠올리며 유리아가 황태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상장 폐지의 트라우마가 유리아의 망상을 드디어 잘라 낸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경연이 시작됐다.
“폐하, 시제를 내려 주시지요.”
3차 경연은 서예를 겨루는 대회였다.
황제가 주제를 정해 주면 참가자는 제가 직접 시를 짓거나, 유명한 시를 적어 제 서체를 자랑했다.
경연 후 서예 작품은 황실 박물관에 기증되는 만큼 내용도 매우 중요했다.
자칫 잘못하면 후손에게 박제되어 망신을 살 수 있기 때문.
그 때문인지 여름국의 대표 명필가 마누스는 잔뜩 긴장한 듯했다.
“스승님, 물 한 잔 드릴까요?”
제자로 보이는 사내가 안절부절못하며 그에게 다가와 물잔을 건넸다.
“고맙구나.”
그는 거절하지 않고 물을 시원하게 한 잔 비웠다.
마누스가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탓에 영애들은 순간 이온 음료 광고를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키스카: 아, 나는 진짜 여름국이 너무 좋아요. 동로판 남주 최고야. 짜릿해.]
[하이디: 인정해요. 하이디의 각막에 청량함을 불어넣는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키스카: 아, 영애 3인칭 좀 제발 수납해둬요 ㅠ.ㅠ]
여름국 후궁 영애들(특: 직업만족도 최상)의 단톡방이 쉴 새 없이 울었다.
서예가의 예사롭지 않은 청순미에 감격한 모양인지, 그들은 끊임없이 찬사를 내뱉었다.
물잔을 내려둔 서예가 마누스가 심호흡을 하며 시선을 들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유리아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깊은 산속 옹달샘을 찾아 목을 축이러 온 사슴을 괴롭히는 사냥꾼이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주 버프의 희생양이 될 명필 선생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유리아는 눈꼬리를 내린 채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국서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국서는 살려야 한다.
마음을 다잡는데, 디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제를 내리겠다.”
두 참가자가 고개를 조아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올 단어를 기다렸다.
“올해 시제는 ‘별’이다.”
사실 저 시제는 귀족 여주가 황제 영애에게 부탁한 시제였다.
아직 뉴비인 그녀는 이 세계에서 아는 문학이 거의 없었다.
내용이 없으면 서체가 아무리 좋아도 작품이라 할 수 없으니 아주 큰 문제였다.
그야말로 향기 없는 꽃이 아닌가.
는 세계관에 공유되는 문학 작품을 창조하거나, 저작권을 사 오기 싫었는지(아마도 이 이유가 커 보인다) 저작권이 만료된 고전 작품을 따다가 배포했다.
셰익스피어와 그림 형제는 봄국과 가을국 작가로 유명했고, 여름국에는 이스트 필러와 화이트 문이 천재 시인으로 통용되었다.
두 천재 시인의 풀네임은 ‘이스트 필러 룰링’과 ‘화이트문 아이언’.
윤동주 시인과 김소월 시인이셨다.
현시대에 활동하는 극작가들은 한 번쯤 두 시인의 시를 대사로 인용할 정도로 대륙에 두 시인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천재의 뛰어난 문학성은 세계관이 달라져도 감춰지지 않는지라, 제국 최고의 아카데미인 봄국 황실 아카데미는 두 시인의 시집을 <봄국 황실 아카데미 선정 필독서 100> 리스트 최상단에 올렸다.
여름국 국민은 그 두 천재 시인을 사랑하고 존경했으며, ‘두유 노우 썸머 컬처’처럼 그들은 국가적 자부심을 책임지는 국위 선양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니 외국인 여주가 그분들의 시를 쓴다면, 국뽕에 취해 실려 갈 사대부가 한 트럭이었다.
귀족 여주는 가장 좋아하는 시를 쓰기 위해 디아나에게 시제를 ‘별’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영화 ‘동주’를 보고 필사를 몇 번이나 했던지, 윤동주 시인의 시는 눈을 감고도 쓸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럼. 한국인이라면 윤동주 시인은 못 참지.’
그때, 시작을 알리는 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와 서예가가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툭.
하얀 종이 위에서 붓이 첫 먹물을 찍었다.
귀족 여주는 선 끝을 부드럽게 꺾으며 한 자 한 자 시를 적어 갔다.
사붓이 드러나는 조국의 명작에, 경연을 지켜보는 영애들의 눈물샘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영애들뿐만이 아니었다.
“오호, 저 봄국 레이디는 여름국어로 시를 적네요.”
“허허, 여름국의 문화가 요즘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난리라고 하더니, 룰링 선생님 시도 아는군요.”
“문화강국 하면 우리 여름국 아니겠습니까.”
사대부들이 제 무릎을 ‘탁’ 치며 기뻐했다. 경계심 넘치던 분위기가 따뜻해졌다.
여름국 유저인 유리아조차 고개를 끄덕이며 뿌듯함을 느꼈다.
국뽕 콘텐츠가 흥하는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