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88화 (89/208)

88화.

여름국 막내 후궁, 유리아 영애는 심각한 얼굴로 태블릿 피시를 움켜쥐었다.

사건은 여름국 연등축제 다음 날 올라온 글로부터 시작됐다.

황제 영애는 워낙 플레이 기간이 오래되기도 했고, 적극적으로 타 유저를 도와온지라 대부분의 유저들이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었다.

그렇다 보니 커뮤에는 황제 영애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아니, 이것을 단순히 모르지 않는다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영애들은 황제 영애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현생으로 비유하자면 셀럽에 가까웠다.

커뮤니티에 생성된 캐릭터 버즈량 대부분이 그녀의 이야기였으니.

특히 황제의 남주 후보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황성에 들어갔다 국서와 일검의 실물을 영접한 이들이 직접 후기를 올리기도 했고, 후궁 영애들의 싸움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마음으로 감상했기 때문이다.

워낙 자주 접하다 보니 다들 마음속으로 저도 모르게 하나쯤 남주 주식을 품고 있었다.

마치 인터넷에서 ‘바이오주가 뜬다’, ‘테크주가 뜬다’ 난리를 치니 나도 모르게 지갑을 열고 ‘오른다니까 조금만 매수해 볼까’라며 투자를 하는 소액 주주처럼 말이다.

즉, 유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국서와 일검의 주식을 매수해 봤다는 소리다.

그러니 이 글은 전 대륙에 퍼진 투자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다.

제목: ※재상장 공지※ 며칠 전에 여름국 국서 주식 상장 폐지됐다고 했던 거 기억남? 영애들 지금 시장 다시 들어와야함ㅜㅁㅜ [129]

내용은 더 충격적이었다.

상장 폐지 쓰레기 주식인 줄 알았던 국서가 사실은 내실 튼튼한 저평가 우량주였던 것이다!

#소꿉친구 #첫사랑 #원앤온리 #직진남 #순정남 #시한부 #쌍방구원

메이저 키워드를 다 때려 넣은 대메이저 남주.

그렇게 시장이, 아니 커뮤니티가 뒤집혔다.

황제 영애를 배신한 줄 알았던 국서가 사실은 황제 영애를 위해 홀로 탕평책을 펼쳐왔다는 사연에 댓글이 폭발했다.

┗ 국서가 시한부였다니 비상! 비상! ㅠㅠㅠ

┗ 지난 게시물에 달았던 댓글 다 삭제하고 옴. 미안해 국서야 ㅠㅠㅠㅠㅠㅠ 누나가 성급했어 ㅠㅠㅠㅠ

┗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청순미남+소꿉친구+시한부+순정남 다 때려 박으면 어쩌라는 거야

┗ 어쩌긴 빨리 영끌해서 주식 매입하라는 소리지 ㅇㅇ

‘살려야 해!’

글을 읽던 유리아는 눈물을 멈추고 비장한 마음을 먹었다.

그때, 한 영애가 의문을 제기했다.

┗ 영애들 잠깐만. 지금 생사도 중요하지만 국서... 범죄자잖아?

┗ 치료한다고 해도 황제랑 역적이 이어질 수 있는 거야?ㅠㅠ

잠시 댓글이 멈췄다.

그리고 다시 미친 듯이 댓글이 올라왔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국서야아아아

곧 정신을 차린 영애들은 다시 상황을 파악했다.

┗ 이 전개는 안 된다

┗ 222 우리 황제 영애 우는 꼴 나는 못 본다!!

┗ 황제와 역적이라니 이건 진짜 전개 수정이 절실함

┗ 아쒸.... 근데 맛있긴 하다 혐관 끝판왕이네. 완전 내 취향 전개인데

┗ 정신차려 영애, 그런 드립치지마 ㅠㅠ 우리 황제 영애 일이잖아 진지하게 몰입해줘

┗ 미안합니다(_ _)입맛 바꾸겠습니다

┗ 다들 뭉쳐! 전개 수정 가자!!

┗ 찬성!!!!!

영애들은 종종 품앗이하듯 서로의 전개를 도와 왔다.

원치 않는 남주와 정략결혼을 앞뒀을 때 파투를 내 주기도 했고, 흉년이 들거나 영지 재정이 안 좋아지면 십시일반으로 모금하여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황제 영애는 딱히 남주를 탐색하지 않고 2명의 남주와 어린 시절부터 시간을 함께해 왔다.

국서와 일검은 원작 남주일 확률이 높다는 뜻.

원작대로 가는 빙의여주라니. 과몰입을 부르는 포인트였다. 이미 여기서 각이 나왔는데, 메이저 키워드에 서사까지 과격하게 흘러가니 영애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커뮤니티는 영애들이 국서를 빼낼 방법을 고심하시는 글로 가득 찼다.

┗ 나 #무사여주인데 이번에 무과 급제해서 취업했거든! 동기들 모아서 몰래 국서만 빼돌릴까?ㅇㅅㅇ

┗ 제독도 아니고 신입무사가 반란이라니; 영애 목숨 애껴;

┗ 우리 아버지랑 오라버니 조정에서 한 자리 하시는데 상소 좀 올려달라고 해볼까?

┗ 그래 이거 가자! 정치 압박 ㄱㄱ 석고대죄하자

┗ 아니 저기요. 국서는 일단 역적이에요; 그리고 대신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뭘 냅다 석고대죄를 날려요;; 그러다 3대가 멸함요;; 사극 띄엄띄엄 보지맙시다

┗ 죄송합니다(_ _) 정치 싸움은 스킵하고 보는 타입이라

그때, 댓글 하나가 영애들의 아이디어를 꾹 누르며 등장했다.

┗ 내가 웬만하면 안 끼어들려고 했는데 영애들 너무 답이 없어서 댓글 남김. 무죄로 갈 건지 감형으로 갈 건지 정하고 판례로 조져야지 다들 뭐 하는 거야?

그녀는 누구냐고 묻는 영애들에게 제 정체를 밝혔다.

┗ 승소율 100%(*기간: 타임라인 시작부터 지금까지), 가을국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는 변호사입니다.

익명을 사수하기 위한 모호한 소개였다.

┗ 영애 할리나 에드윈이구나 ㅇ0ㅇ! 가을국에서 잘나가는 변호사면 그 여자밖에 없쥬~

그러나 바로 신상이 밝혀졌다.

┗ 망할.

짧은 대댓으로 그녀는 본인이 세계관 최강 변호사임을 인정했다.

대륙 수임료 1위.

할리나 에드윈.

그녀는 주로 무역과 세금(이라 쓰고 탈세 협조) 분야를 전문으로 다루다 보니 국제법에 능통했다.

#변호사여주는 여름국의 법전을 손에 넣고 온갖 특별법을 찾아 읽었다.

그 두꺼운 걸 어떻게 그리 빨리 읽나 싶었는데, 영애에게는 소송 버프가 있었다.

승소 판례를 검색해 주는 기능이란다.

잘 모르는데 이게 법률 업계에서는 엄청난 치트키라고 한다.

그녀가 여름국에서 찾은 법의 허점은 경연 특례 조항이었다.

경연 승자에게 황제가 소원이라는 거창한 상을 주는데, 이는 엄격한 특별 조항 아래 관리되었다.

재산을 요구하는 경우 영지는 국가 공유지로 인정된 구역만을 하사할 수 있고, 금화는 그 해 거둬 드린 세수의 1할 이하까지만 가능했으며, 관직을 요구하는 경우 정2품 이하의 관직으로 임명하며, 청혼을 할 경우 종4품 숙원으로 후궁 첩지를 내렸다.

그렇다. 조항은 일종의 경품 상한선이었다.

위 규칙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황제는 경연 우승자의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엄격한 기준이 법으로 공표되어 있으나 그뿐, 여기에는 ‘사면’에 관한 조항이 없었다.

즉, 사면 가능한 범죄에 대한 상한선이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아이스타스 왕조 시절, 효심 가득한 한 여인이 경연에 홀로 출전하여 3종목을 모두 우승하고 제 아비의 사면을 소원으로 청했다.

3종목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거니와 경연장을 습식 사우나로 만들어 버린 눈물겨운 효심에 황제는 바로 그녀의 아버지를 사면했다.

사형을 하루 앞둔 사형수는 그렇게 목숨을 구했다.

그렇다.

사형수를 석방한 선례까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바로 경연 어벤져스가 결정되었다.

┗ 이거 외국인 참가도 가능하니까 영애들 자신 있으면 손들어줘요!!!

┗ 저 1심 궁술 대회 참가할게요 #무사여주라 궁술 버프 있습니다

┗ 버프!!! 끌올해!! 무조건 이 영애로 나갑시다!!!

┗ 버프는 킹정이지

┗ 1심은 무조건 먹고 가네 ㅋㅋㅋㅋㅋ 무사 영애 개조앙♥

1심 후보 선발이 끝나기 무섭게 심플한 입후보자가 나왔다.

┗ 나 2심 나갈래

┗ 영애는 누구신데요?;

┗ 뭐야 자신감만 보면 #먼치킨인줄?

┗ 사람 목숨이 걸렸는데 장난은 자제하자 영애야ㅜㅜ

┗ (동영상)

영애는 말없이 제 영상을 올렸다.

마치 오디션 데모 영상처럼.

커뮤에 접속한 모든 영애는 대형 기획사의 수장이 된 것마냥 영상을 시청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 합격!!!!!!!!!!!!!!!!!!!!!!

미친 거 아닌가?

탈 인간의 무브였다.

┗ 그럼 3심은 누가해?

┗ 글씨 버프 있는 영애도 있을까?

┗ 에이 설마 그런 버프가 어딨어 ㅋㅋㅋㅋ 글씨 잘 쓰는게 무슨 버프냐고 ㅋㅋㅋㅋ

┗ 그래 이건 내가 좀 글씨를 잘 쓴다 하는 영애가 나가자!

┗ 필기 잘하는 영애 모집합니다. 여러분의 노트를 보여주세요~

┗ 나 글씨 좀 쓰는데 내가 나갈까? (사진)

┗ 영애, 자의식 무슨일이야; 솔직히 내가 더 잘씀

┗ (사진)

갑작스레 글씨체 자랑이 이어지는데 댓글 하나가 조심스럽게 등장했다.

┗ 저기, 저 명필 버프 있는데 제가 해볼까요?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 영애 지금 진지한데 장난은 넣어두자; 그런 버프가 어딨어;;

┗ 내 말이 글씨체를 버프라고 하면 이 게임 망해야지 ㅋㅋㅋㅋ

┗ 이런 말 미안한데 영애 좀 눈새였다ㅠ

그러나 곧 올라온 영상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 (동영상)

한석봉 선생님이 환생이라도 한 것인가. 하얀 한지 위로 미끄러지는 세필 붓이 글씨를 아니, 예술을 적어 내려갔다.

20분 남짓한 영상 시간. 그 시간만큼 커뮤니티에 정적이 찾아왔다. 영상에서 눈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이게 버프가 되네...?

┗ 눈 깜빡했는데 20분 지났어 ㄷ ㄷ

┗ 뭐야; 내 시간 돌려줘요;

잠시 주접 댓글이 일고 감탄 어린 댓글 하나가 상황을 정리했다.

┗ 이거 어벤져스다... 국서 구출이 지구 구하는 것보다 쉬울 듯

┗ 선생님, 지구를 구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쉽지요;;

그렇게 국서 구출 전담반이 조직됐다.

그리고 오늘.

경연이 열린 것이다.

인공 연못 위에 대련장처럼 직사각형으로 띄운 경연장.

이곳에서 세 번의 경연이 열린다.

첫 경연은 궁술, 두 번째 경연은 가무, 세 번째는 서예였다.

유리아는 손에 든 태블릿 피시를 살짝 기울였다.

유저와 캐릭터가 다 함께 몰입한 열광적인 분위기가 유리아의 태블릿 화면에 담겼다.

커뮤니티는 영상 업로드뿐만 아니라, 라이브 방송을 송출하는 기능도 제공했다.

지금 경연장에 자리한 영애들은 어림잡아 스무 명 남짓.

워낙 대륙적 관심을 받는지라 참석하지 못한 영애들은 라이브 방송을 원했다.

유리아는 참석하지 못한 영애들을 위해 비장한 각오로 역사에 기록될 경연 현장을 공유했다.

1차 경연은 #무사여주인 신입 무관 영애가 담당하고, 2차 경연은 엄청난 유연성을 자랑하는 우리 #수인여주 키스카 영애가 담당하고, 3차 경연은 봄국에서 온 #귀족여주 영애가 담당했다.

경연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애초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든 게임. 과금이 가능한 유저를 위해 설계된 세계관이다.

현금인출기이자 고객인 여주의 버프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10점!”

“10점!”

“10점입니다!”

모든 회차에서 텐텐텐을 쏘아 댄 #무사여주가 손쉽게 1차 경연에서 우승했다.

2차 경연은 여름국 후궁, 키스카 영애가 참여했는데. 그녀는 2차 경연의 역사를 새로 썼다.

트렌디 하면서도 개성 있는 고양이상의 동양미녀가 단상 위로 올랐다.

잠시 침묵이 일었다.

세련된 이목구비와 사연 있어 보이는 깊은 눈매.

그야말로 여덕몰이상.

기획사 프리패스상이란 저런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모든 영애들의 합격을 받은 건 저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퐁!

갑자기 그녀가 사라졌다.

버프를 쓴 것이다.

궁인이 올라가 다급히 옷더미 속에 파묻힌 #수인영애를 꺼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의상을 입혔다.

그랬다. 키스카 영애는 고양이로 참가한 거다.

그만큼 그녀는 이 무대에 진심이었다.

하얀 바지와 저고리 위로 검은 조끼를 걸치고, 검은 옷깃 한쪽으로 노란 비단을 덧대었다.

게다가 화룡점정으로 그녀는 상모까지 썼다.

완벽한 사물놀이 착장.

아장아장 걸어 나온 회색 고양이는 무대 한가운데서 차분히 음악을 기다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