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아니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잠시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잘못 들었을 거야!
나는 현실을 부정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나 눈앞에는 반투명한 상태창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다. 현실이었다.
[‘알렉스 로이드 필리스’의 정보를 열람합니다.]
알렉스가 내 슬롯에 들어와 버렸다.
이름: 알렉스 로이드 필리스
직업: 황위계승자
계급: 가을국 황태자
특성: 죽음에서 피어난 생명의 꽃
키워드: #계략남 #능력남 #사패남 #상처남 #후회남 #피폐물 #갑을관계 #신분차이 (더 보기)
등급: 남주 선택 후 확인 가능
나는 진정하려 노력하며 AI를 불렀다.
가장 두려운 것부터 확인해야 했다.
‘담당자님, 알렉스에게 적용된 키워드를 알려 주세요.’
[현재 ‘알렉스 로이드 필리스’에게 적용된 키워드는 #여공남수입니다.]
#여공남수라…….
와, 이건 아니지!
알렉스를 내가 어떻게 수로 깔아!
그게 가능한 전개야?
난 못 해! 못 한다고!
아직 내게 적용되지 않은 전연령 키워드는 #여공남수였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알렉스에게 그 키워드가 적용되고 말았다.
[변경 가능한 키워드는 #착각계 #역키잡입니다. 변경하시겠습니까?]
분노하는 나를 위해 AI가 키워드 변경을 제안했다.
착각물과 역키잡이라.
착각물은 엘런 덕분에 나와 안 맞는 키워드란 걸 깨달은지라 고민도 되지 않았다.
알렉스와 #착각계를 하라고?
로그아웃 하는 게 낫지.
그렇다고 육아 난이도가 상당해 보이는 황태자를 #역키잡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여공남수는…….
아니야.
어쩌면 #여공남수가 낫지 않을까?
앞으로 노동 착취나 고문 걱정은 없지 않을까?
기, 길들일 수 있을지도?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둠이 눈에 익자 비스듬히 누운 알렉스가 보였다.
그는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알렉스를 보다 쭈뼛쭈뼛 손을 뻗었다.
“전하, 저 손…… 좀 줘 보세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알렉스는 버퍼링에 걸린 사람처럼 잠시 가만히 있었다.
“……!”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알렉스가 순순히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은 거다.
키워드 효과일까? 아니면 뜬금없는 요구에 당황해서 말을 들은 걸까?
다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전하, 저쪽으로 가 보세요.”
사실 뭔가를 물어 오라고 던져 보고 싶었는데, 던질 물건이 없어 오른쪽으로 손짓하며 요청해 봤다.
몇 초 뒤 그가 붉은 입술을 천천히 벌렸다.
“나도 들어주고 싶지만, 지금 내가 깔려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어.”
“깔려 있다뇨!”
키워드 탓에 그 말이 음란하게 들려 팔짝 뛰었다.
그러다 엉덩이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에 고개를 내렸다. 정말 내가 알렉스를 깔고 있었다.
누각에서 기둥에 기대앉은 알렉스의 허벅지에 올라타 있던 터라,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누운 그를 깔고 있는 자세였다.
잠깐만, 침대?
왜 침대 위에 있는 거지?
얘 나 어디로 데려온 거야?!
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사각 등에 의지한 어둑한 방.
이곳은 내 숙소였다.
정갈하게 정리된 비단 침대 위. 나는 알렉스의 다리에 올라타 있었다.
“으악!”
나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다리에서 내려오기 무섭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니, 찧을 뻔했다. 다행히 침대 밖으로 굴러떨어지는 나를 알렉스가 손을 뻗어 잡아 주었다.
“가, 감사해요.”
이 와중에도 차분하신 황태자는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며 자세를 바로 세워 앉았다.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작은 사각 등에 의지한 미약한 조도. 희미한 등불이 알렉스의 금안에 담겼다. 어두운 서랍 속에서 반짝이는 구슬처럼 홀로 빛을 발하는 안광이 천천히 움직였다.
“우는 얼굴이 궁금했었는데, 막상 보니 별로네.”
갈라진 목소리에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눈빛은 싸늘했다.
알렉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불쌍하면 다 울어 줘?”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알렉스가 손을 뻗어 온 탓이다.
움찔하는데 그는 그저 손끝으로 내 뺨을 쓸었다.
젖어 있던 뺨이 건조한 손길에 물기를 빼앗겼다.
그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눈꼬리를 내리며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나만 동정해.”
“…….”
“다른 새끼 때문에 울지 말고. 피곤하잖아?”
슬롯의 힘은 이렇게 위대한 것인가?
알렉스가 내 감정 소모를 걱정하는 것도 놀라웠고, 다소곳이 눈물을 닦아 주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다른 말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가슴속에서 뒤엉킨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저기, 그, 전하 저 좋아하지 마세요.”
두서없는 말은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하고 본론으로 직행했다.
“왜?”
그 당황스러운 질문에, 그는 딱 잘라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을 긋는 대신 이유를 물었다.
나는 울먹이며 이불을 움켜쥐었다.
“저 좋아하지 마시라고요!”
누가 보면 알렉스가 내게 열렬한 고백을 한 줄 알 만큼, 나는 무작정 떼를 썼다.
빵 터져서 웃고 놀릴 만한데 놀랍게도 알렉스는 조용히 물었다.
“내가 그댈 좋아하는 게 그렇게 싫어할 일인가?”
심지어 목소리도 깔았다.
정말 상처받은 것처럼.
아니야, 연기겠지.
연기일 거야.
연기여야 해!
나는 다급하게 알렉스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그가 다시 물었다.
“내가 나쁜 놈이라서?”
씁쓸한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형제를 죽이고 황위에 욕심내는 놈이라 무서워?”
나는 아까보다도 더 펄쩍 뛰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전하가 형제들을 죽였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 말에 잠시 알렉스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게 아니라 저한테 사정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슬롯 얘기를 하려다 얼른 입을 다물고, 화제를 돌렸다.
“전하, 그…… 생각해 보세요.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딱 스크롤을 쓰자마자 제가 예뻐 보인다든지, 막 사랑스러워 보인다든지, 갑자기 후광이 비친다든지.”
자의식 넘치는 표현에 알렉스가 떨떠름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급하게 정신을 차린 나는 냉큼 자기애 넘치는 묘사를 버렸다.
“어쨌든! 갑자기 제가 좋아진 게 이상하지 않으세요? 분위기에 취하신 걸지도 몰라요. 본인의 감정을 잘 헤아려 보세요.”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알렉스에게 네 감정을 고민해 보라고 권했다.
슬롯의 힘을 생각하면 갑자기 날 좋아하게 된 게 이상하다고 생각해도 그러려니 여길 텐데, 나는 알렉스의 표정을 살피며 희망을 부여잡았다.
“데이지.”
“네, 전하.”
알렉스가 그 특유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입에 걸었다.
그가 몸을 가까이 기울이길래 흠칫했는데, 그는 그저 내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다.
알렉스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미쳤다는 건 10년도 넘게 알아 온 사실인데, 최근엔 여기서 더 미칠 수 있다는 걸 새로 깨닫고 있어.”
손을 거둔 알렉스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대 때문에.”
타들어 가는 촛불 소리가 들릴 만큼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대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지. 아무리 노력해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니 돌아 버리는 줄 알았어.”
웃음기를 거둔 그가 내게 질문하듯 말을 이었다.
“그대가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더군. 아샤 양을 보내고 허가를 기다리는 그 일분일초가 얼마나 느리게 흐르던지 사람을 미치게 했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알렉스가 내게 한 말이 너무 충격적이라. 지금 그는 슬롯에 담기기 전부터 날 좋아해 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들이 팽창했다.
이유를 알 수 없던 호의가 이유를 찾아가며 몸집을 부풀린 탓이다.
어쩌면 나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 짧은 의심이 확신이 되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알렉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서 알렉스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었다.
이제 내게 남은 글자 수는 2만 자 남짓.
지금 남주를 선택하면 2만 자가 채워지는 순간 [전]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내 슬롯에 있는 남주는 셋.
나는 지금 슬롯의 남주를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더 많은 남주를 만나고 싶어서라든지, 더 좋은 시나리오를 찾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지금 슬롯에 있는 남주 중 누구를 선택해도 사실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지금 선택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엘런과 알렉스.
이 남주들에게는 분명 ‘마왕’과의 전쟁이 내장되어 있다.
남주를 선택하는 순간 그들의 시나리오에 묶여 자동 전개된다고 했다.
마왕 동면지 탐색을 마치고 이제 겨우 봄국으로 돌아가는데, 저 S급 남주 후보들에게 엮이는 게 두려웠다.
마왕.
‘엮이기 싫다고 진짜.’
게다가 내 예상대로 내가 판타지 모험물 파티 중 하나라면, 검사와 성녀 그리고 지식인 중 지식인 롤이라면 내 역할은 여기서 끝이다.
전투력도 마력도 없는 문서 덕후는 보통 안전한 곳에서 주인공들의 승리를 기원하다 평온하게 평민 엑스트라와 가정을 꾸린단 말이지.
그런데 여기서 S급 남주를 고르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전쟁터 끌려가는 거 아니냐고!’
마왕 토벌이 끝난 후면 생각해 보겠는데 지금은 아닌 거 같아.
그렇다고 이 둘을 제외한 요한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단 한 번의 선택인데 만약 그를 선택했다가 오류가 생기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평생 [결]을 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희박한 확률을 뚫고 [결]을 칠 수도 있겠지만 선뜻 선택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시기의 문제였다.
내 슬롯에 담긴 이들이 싫다기보다, 나는 지금 남주를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예상되는 모든 위험을 감수할 만큼 그들이 간절하지 않았다.
나는 이 생각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전하. 저는 전하를 좋아하지 않아요.”
어떤 미사여구도 붙지 않은 말이 나왔다.
알렉스가 내 답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날 좋아하지 않아도 돼.”
그는 왜인지 쓸쓸해 보이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냥 날 동정해 줘.”
“네?”
“그걸로 만족할 테니까.”
나는 의아한 부탁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왜 하필 동정이에요?”
“그게 그대가 내게 품고 있는 감정이잖아.”
알렉스는 주머니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테니 무서워하지 마.”
돌아가기 전 그는 눈웃음을 짓고는 아마도 진심일 말을 전했다.
“너마저 날 괴물로 생각하면, 그땐 정말 상처받을 것 같거든.”
정적을 찢는 소리를 남기고는 알렉스가 사라졌다.
빈 침상 위로 희미한 빛이 고였다. 등불은 여름 바람에 흔들리며 혼자 남은 내 그림자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