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래서 나를 이용하게 둔 거야? 겨울국 재건 협회와 내 사람에게 손을 대고, 정보를 빼돌리려 했어?”
나는 다시 연못가로 시선을 틀었다.
국서는 잠시 침묵하다 차분히 답했다.
“저는 그들을 이용하는 겁니다.”
“두 번 이용했다가는 나라를 팔아먹겠어.”
비꼬는 말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외려 그녀에게 물었다.
“폐하, 봄국 황제가 왜 토벌에 참여하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침묵했다.
“봄국 황제에게 사라진 에크리반의 고서를 바친 이가 있다고 합니다.”
디아나를 향한 질문인데 내 귀가 쫑긋했다.
뭐?
에크리반 고서는 내 설정인데? 황제한테 고서 바친 사람이 에스텔라 남작이잖아.
“겨울국 황제가 마왕과의 전쟁에서 전사했다고 하나, 실은 제 여동생을 넘기는 대가로 목숨을 건져 봄국으로 망명했다는 소문이 있지요.”
“소문일 뿐이지.”
“소문이 아닙니다.”
국서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서책에 겨울국 마지막 황제의 기록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절로 입이 벌어졌다.
겨울국 마지막 황제 놈이 여동생을 팔아먹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 우리 조상님이 그 인성 나간 황제의 사생활을 XX패치마냥 기록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놀라웠는데 국서는 더 놀라운 말을 덧붙였다.
“그는 봄국 여인과 아이를 낳았다고 하죠.”
“아이?”
국서는 잠시 뜸을 들이다 결국 진실을 말했다.
“봄국 황제는 그 후손을 찾고 있습니다.”
“그 후손을 찾아서 무얼 하려고?”
“그 후손에게 ‘불의 이능’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불의 이능.
그 말에 디아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자 국서는 그녀를 안심시키듯 빠르게 말했다.
“봄국 황제는 불의 이능을 욕심내는 것이 아니라, 겨울국 황실의 사생아를 죽여 후환을 없애려 합니다.”
진실을 가늠하듯 디아나는 국서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불의 이능’을 타고난 아이가 있고, 또 봄국 황제가 그 아이를 죽이려 찾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쳐. 그래도 여전히 나는 왜 네가 겨울국 재건 협회와 내통한 건지 모르겠어.”
국서가 고소를 머금었다.
“이번 협회장은 전대 협회장과 다릅니다. 제 아버지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하죠.”
“…….”
“불의 이능은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이능입니다. 그들은 마왕을 몰아낸 후, 3국의 군사력이 약해진 틈을 타 불의 이능으로 대륙을 통일하려 합니다.”
국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울컥했는지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 말을 쏟아 냈다.
“폐하께서 사계국을 위해 마왕을 몰아내는 일에 몰두하실 때, 봄국과 가을국, 심지어 겨울국 재건 협회 놈들까지 모두 마왕이 사라진 이후의 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와.
나 정치캐는 못 할 것 같아.
봄국 놈은 뒤에 숨어서 제 안위에만 미쳐 있고, 가을국 놈들은 사방에 첩자를 파견해 제 입맛에 맞는 지도자를 세우고, 겨울국 재건 협회는 제일 막장으로 비밀 병기를 이용해 대륙 통일을 꿈꾸고 있다.
여름국은 왜 주변 나라가 하나같이 막장인지.
우리 디아나 영애 너무 고생이다.
“저는 겨울국 재건 협회가 그 후손을 찾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불의 이능을 가진 나라가 되도록 그들을 도왔습니다.”
“왜?”
“토벌이 성공한다면, 가을국 황실의 간섭은 더 심해질 겁니다. 그리고 폐하와 뜻이 맞지 않으면 놈들은 서슴없이 폐하를 위협할 거고요. 이미 황궁에는 황태자의 세작들이 퍼져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가 이런 짓을 한 이유였을 말을 덧붙였다.
“이능을 가진 국가가 둘이 되면, 마왕 토벌 후에는 그 둘의 싸움이 벌어지겠지요. 가을국과 겨울국의 경쟁을 야기하는 것이 가을국에서 벗어나 우리가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디아나는 바닥에 시선을 둔 채 고개를 틀고 있었다. 국서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당신에게 그 어떤 위협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디아나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남기다니?”
국서는 시선을 회피하고 제 말을 이었다.
“지금 가을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이능을 쓸 수 있습니다. 겨울국 황제의 사생아는 불의 이능이 있다 한들 그 힘이 희석되어 있을 테니 협회장의 꿈과 반대로 사계국을 통일할 정도의 힘은 없을 겁니다.”
“남긴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어.”
디아나가 다시 물었으나 국서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디아나의 물음을 무시하고 제 말만 늘어놓았다.
“가을국과 겨울국이 싸우도록 시선을 돌려 두면 폐하의 힘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일 테니, 폐하께는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아포스타시아.”
결국 디아나가 화를 내듯 그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말을 쏟아 내던 국서가 입술을 다물었다.
디아나는 차가운 눈으로 국서를 보며 물었다.
“남기지 않으려 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말해.”
“…….”
“너 지금 어디 떠나려는 사람처럼 말했잖아.”
하지만 국서는 어디로 떠날 것 같지 않았다.
출궁을 생각해 왔다면 디아나가 풀어 주었을 때 도망쳤을 테니까.
그러나 국서는 그녀를 홀로 궁에 남기는 게 걱정된다는 듯 말하면서도, 제 발로 궁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이해했으니, 디아나가 추측하지 못할 리 없다.
‘설마…….’
나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디아나는 말 없는 국서의 뺨을 끌어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
“내가 걱정되면 네가 옆에서 날 도와주면 되는 거잖아.”
“…….”
“왜 꼭 죽을 날 받아 둔 사람처럼 말하는데?”
국서는 제게 사형이 내려질 거란 말을 들었을 때도 덤덤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빼낸 디아나에게 화를 냈다.
그런데 지금 그의 검은 눈동자는 노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축적된 세월이 헛것은 아닌지, 디아나는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듯했다.
디아나의 눈에 금세 물이 차올랐다. 달빛을 담던 눈물이 소리 없이 뚝뚝 떨어졌다.
조용히 디아나를 바라보기만 하던 국서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손에 쥐었다.
눈가에 닿은 엄지가 눈물을 닦았지만, 다시 흐른 눈물이 금세 디아나의 얼굴을 적셨다.
짐작 가는 일이 있는지 디아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눈꼬리 끝으로 눈물이 흘렀다.
그걸 닦아 주는 국서의 눈도 붉게 충혈되었다.
디아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다고 했었잖아.”
“그리 말하도록 시켰습니다. 궁의는 죄가 없습니다. 제가 시킨 일입니다.”
그는 그녀를 달래듯 디아나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폐하, 토벌 이후의 일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디아나는 그를 밀쳐 내고 눈을 부릅떴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나를 속여 놓고…….”
디아나는 새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연못가로 돌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지금 내가 본 것을 믿을 수 없어 입을 벙긋거리다 나도 입술을 콱 깨물었다.
국서가 #시한부 남주였다니!
심지어 국서는 진심으로 디아나를 사랑했다.
너무 잔인하잖아!
#순애보 남주를 붙여 주고 #시한부 키워드를 넣다니.
미쳤나 봐.
디아나 멘탈 어떡하라고.
보는 나도 마음이 아픈데, 오랫동안 그와 지내 온 디아나의 마음은 어떨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폐하.”
국서는 디아나를 불렀다.
철컥.
바닥에 끌리는 사슬 소리가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가을국 황태자를 믿지 마십시오. 전쟁이 끝나면 황궁에 있는 세작들을 반드시 찾아내셔야 합니다.”
“싫어.”
“폐하.”
“네가 해. 네 일이야.”
“…….”
“너는 내 허락 없이 못 죽어.”
디아나는 위협적으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는 그 말에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국서는 괴로운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폐하께 또 이런 고통을…… 안겨 드려 송구합니다.”
그는 목이 멘 듯 막힌 숨을 토했다.
“사과하지 마.”
디아나는 소매로 제 눈가를 닦아 냈다.
그녀는 침착해진 말투로 차분하게 말했다.
“가을국에 명의가 있어. 그녀를 불러 치료를 시작해. 그럼 돼.”
“폐하…….”
“너는, 적어도 너는…… 내가 살릴 수 있어.”
그녀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러자 국서가 화를 냈다.
“쓸데없는 일 하지 마십시오. 사사를 앞둔 죄인에게 궁의를 붙이는 황제는 없습니다.”
“입 다물어.”
아, 너무 슬프잖아.
눈앞이 흐려졌다.
과몰입한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흐릿한 시야로 국서가 디아나의 뺨을 닦는 윤곽이 보였다.
디아나가 그 손길을 잡아챘다. 그녀는 국서의 목덜미를 움켜쥐더니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국서는 순순히 그녀를 따라 몸을 숙였다.
애초에 그녀가 무얼 하든 거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막상 그를 끌어당겼으면서 디아나는 주저했다.
곧 두 사람의 얼굴이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국서를 깊게 껴안은 디아나가 다시 몸을 떼어 냈다.
아, 슬롯에 넣었나 봐!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디아나가 슬롯을 담는 현장을 처음으로 지켜본 영광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에 존재하는 남주 법칙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남주 네버 다이’ 법칙.
남주로 선택되면, 새드 엔딩 방지를 위해 남주는 죽지 않았다. 칼에 맞아도, 독약을 먹어도 남주는 살아났다.
눈물 젖은 숨을 들이마신 나는 달빛 아래 선 커플을 아련하게 바라봤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국서가 디아나의 뺨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그는 그녀의 젖은 뺨을 천천히 쓸다, 그만큼이나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어?
이건 진짜 보면 안 될 거 같은데?
나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입을 맞춘 것도 아닌데 뺨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그때, 손목에 악력이 느껴졌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눈을 찌푸린 알렉스가 내 손목을 꽉 움켜쥔 것이다.
지레 놀란 나는 알렉스가 입맞춤 소리를 들을까 더 꽉 귀를 눌렀다. 그러자 노란 금안이 옆으로 굴러 내 손을 쳐다봤다.
답답했는지 알렉스가 내 손을 떼어 내려 했다.
나는 기함해서 알렉스의 귀를 더 세게 눌렀다.
불만 가득하던 금빛 눈동자에 묘한 호기심이 스쳤다.
그는 나를 응시한 채 미소를 짓더니,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오른손을 제 장포 주머니로 넣었다.
나는 초조한 눈으로 알렉스의 행동을 바라봤다.
주머니 밖으로 나온 하얀 손가락에 스크롤이 집혀 있었다.
“……!”
역시 황태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는 눈치가 아주 빠른 사람이었다.
일단 여길 나가서 얘기하자는 듯 알렉스가 스크롤을 한 번 보고 다시 나를 쳐다봤다.
눈치로 내가 원하는 걸 알아챈 알렉스가 기특해서 나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반응이 재밌는지 알렉스가 웃음을 흘리더니 제 귀에 붙은 내 손을 보다 다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뭐지?
왜 쳐다보나 싶은데, 그가 내 입술 앞으로 스크롤을 붙였다.
내 손이 자유롭지 않으니 입에 물라는 소리 같았다.
나는 바로 스크롤 끝을 덥석 물었다.
간간이 들리는 입맞춤 소리 때문에 손을 내릴 수 없었다.
디아나 사생활 지켜야 해.
그런데 바로 스크롤을 찢을 줄 알았는데 알렉스가 그대로 손을 떼어 냈다.
뭐야, 왜 이래?
멀어져 가는 손을 보다 나는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당황하는데 내게 얼굴을 맞대 온 알렉스가 키득거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 자식이, 이 와중에 또 장난질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그가 스크롤 끝을 물었다.
누가 보면 내가 알렉스의 머리를 안고 입을 맞추는 줄 알았을 거다.
질색하며 고개를 물리는데, 알렉스가 내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울고 귓가로 거친 소음이 들렸다.
찌이익.
그리고 소음 속으로 맑은 알람이 파고들었다.
띠링.
[‘알렉스 로이드 필리스’가 슬롯에 추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