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작은 반지가 연못으로 떨어졌다.
국서는 연못에 뛰어들 기세로 흠칫하다 디아나를 노려봤다. 디아나는 지지 않고 그 시선을 마주했다.
“넌 사사될 거야.”
“하세요.”
“허세 부리는 거 아니야. 네 아버지도 포기했어.”
“그분이 절 도울 거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근데 대체 왜!”
디아나가 울컥했는지 소리를 지르려다 말을 삼켰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한 거야? 이건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너도 제국법이 외세에 얼마나 민감한지 알잖아.”
국서는 잠시 입을 다문 채 디아나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들 사이로 여름밤의 끈적한 바람이 지나갔다.
모래가 쓸려 가자 조개껍데기가 드러나는 것처럼 잔뜩 얽힌 무언의 감정이 천천히 드러났다.
국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 각오도 없이 이런 일을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 말에 디아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왜 목숨을 걸고 날 배신해. 왜 목숨을 걸어!”
“배신한 적 없습니다.”
그녀가 소리를 치자 국서는 바로 답해 그 분노를 끊어 냈다.
“단 한 번도 폐하를 배신한 적 없습니다.”
그는 진심처럼 천천히 말했다.
“제 모든 행동은 폐하를 위한 일입니다.”
잠시 침묵하던 디아나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 이유나 들어 보자. 왜 그게 날 위한 일인지 설명해 봐.”
국서는 차분하게 답했다.
“폐하는 마왕을 없애는 일에만 몰두하고 계십니다. 마왕을 몰아낸 후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황녀가 복권하도록 돕고, 할 수 있는 선에서 겨울국의 재건을 지원할 거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국서가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제국들도 그렇게 할까요?”
“물론. 3국 모두 황녀를 즉위시키고 난민들을 겨울국으로 인도하기로 약조했어.”
국서는 제 두 손을 들어 얼굴을 파묻었다.
침음한 그가 손을 내리고는 다시 물었다.
“폐하, 가을국 황태자가 당신에게 상흔을 입혔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그때 그놈이 한 말도 기억하십니까.”
황태자에서 그놈으로 격하당한 알렉스가 눈썹을 까닥 움직였다.
워낙 연못가가 고요한지라 그들의 대화가 다 들렸다.
알렉스와 나는 얼결에 남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잘못 움직이면 눈치를 챌까 봐 우리는 어찌하지 못하고 기척을 죽였다.
“상처를 치료하지 말라 했던 걸 말하는 거야?”
“예. 폐하께서 치료를 위해 여름국으로 돌아오셨을 때, 1황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기억하십니까?”
“마물을 토벌한 일검을 황성으로 초대해 상을 주려 했었지.”
“일검은 상으로 폐하와 겨루게 해 달라 청했고요.”
국서는 그날을 떠올렸는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일검 그놈을 아직 살려 두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보다는 제가 더 평판 관리를 잘하니까요.”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듯 국서가 디아나의 조언을 밀어 냈다.
나는 디아나의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국서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저것 봐. 완전 청아하게 생겨서 거하게 뒤통수를 쳤잖아.
“가을국 황제는 폐하에게 생명의 이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폐하를 제거하고 1황자를 황제로 세우려 노력했죠.”
“알고 있어.”
“아뇨. 그게 끝이 아닙니다.”
국서는 고개를 저었다.
“당시 알렉스 황태자는 친가을국 정책을 펼치는 폐하께서 황제가 되길 바랐고, 그래서 폐하께 생명의 이능이 없다는 걸 제 아버지에게 보여 주려 했던 겁니다.”
그 말에 나는 알렉스를 쳐다봤다. 알렉스는 국서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맞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알 수 없다.
“황태자는 오래전부터 가을국 혼혈민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일검은 가을국 혼혈민으로 구성된 용병단의 단장이었고요. 황태자가 일찍이 매수한 자이지요.”
나는 다시 알렉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국서를 보고 있었다.
맞는 말인가 보다.
“일검에게 당신의 상처를 헤집으라 명한 이가 바로 알렉스입니다. 일검은 검호를 탐낸 것이 아니라 가을국 황제가 폐하에 대한 의심을 거두도록 만든 것이죠.”
“그래서?”
디아나가 알고 있었다는 걸 몰랐는지, 알렉스가 눈을 찌푸렸다.
국서는 답답한지 눈을 감았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데도 모르시겠습니까?”
“뭘? 말 건너뛰는 거 싫어하니까 정확하게 말해.”
“그놈은 제 입맛에 맞는 지도자를 선택하고 있는 겁니다.”
국서의 목소리가 매서웠다.
“감히 폐하를 제 입맛에 맞는 이라 여겨 여름국 황실 일에 끼어든 거라고요.”
그는 천천히 되물었다.
“이게 얼마나 당신에게 위협적인 일인지 모르겠습니까?”
반면, 디아나는 걱정이 과하다 여기는지 한숨을 쉬며 답했다.
“알렉스는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야.”
“그놈은 제 형제들을 죽였습니다.”
움찔.
순간 손목으로 짧은 진동이 전해 왔다.
그 바람에 연못가를 향하던 시선이 알렉스에게로 돌아왔다.
알렉스의 얼굴이 어두웠다.
기분 탓이 아니다.
그의 머리를 덮었던 나무 그림자가 어느새 턱 끝까지 내려왔다.
바람은 일지 않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숲에서 들려왔다.
사아아아.
나는 기둥 너머 숲을 바라봤다. 연못가에 심어진 나무의 잎사귀가 빽빽해지고 있었다.
알렉스는 제 얼굴을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었으나 효과는 없었다.
그는 연못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는데, 워낙 거리가 가까운 탓에 뺨 근육이 움찔거리는 윤곽이 제대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본인이 원하니 나는 모른 척해 주려 시선을 다시 연못가로 치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서는 계속 그 화제로 디아나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놈이 황태자로 즉위할 때의 나이가 열네 살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제 형제들을 모두 도륙한 놈이란 말입니다.”
고막을 난도질하듯 들이차는 가정사에 자꾸만 알렉스의 눈치를 보게 됐다.
“그놈은 천성이 다른 인간입니다.”
힐끔 돌아간 시선에 알렉스의 얼굴이 다시 보였다. 그는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내가 못 들을 리 없으니, 제게 어설프게 말을 걸까 봐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 같았다.
“그놈은 당신에게 위협이 된다고요.”
고집스레 밀어붙이는 말에 디아나도 입을 다물었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다른 인간을 황위로 올리려 또다시 간섭할 겁니다.”
“아포.”
“당신을 죽일 수도 있어요.”
국서의 말에 알렉스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는 바로 흘러나온 디아나의 말에 굳어 버렸다.
“과한 걱정이야. 알렉스는 내 친우이기도 해.”
하지만 디아나가 말을 막은 보람도 없이 국서는 그들의 유대를 한마디로 잘라 냈다.
“제 가족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놈이 폐하께는 안 그럴 것 같습니까?”
반박할 수 없는 말이라 그런 걸까. 동의하지 않아 그런 걸까.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꽤 오래 흐른 침묵에 숨이 막혀 왔다.
디아나가 먼저 입을 열어 주길 바랐는데 국서가 제 목소리를 먼저 흘렸다.
“그놈을 믿고 계시는 한…….”
나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알렉스의 귀를 눌렀다.
손바닥 안으로 움찔하는 알렉스의 얼굴이 느껴졌다.
알렉스가 눈을 떴다. 무슨 짓인지 가늠하듯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이, 내게 틀어지는 고개를 따라 정면으로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알렉스의 금안이 사자의 눈동자처럼 고요히 빛났다.
내 의도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졸아서 손을 내렸을 텐데, 나는 긴장했으면서도 오히려 손바닥을 더 꾹 눌렀다.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막는다고 소음을 완벽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손바닥은 귀와 잘 맞물리면 제법 큰 방음 효과를 냈다.
알렉스의 귓바퀴 뼈가 말랑한 손바닥 살점에 파묻히는 감각이 선명했다.
동정이라면 동정이었다.
그게 오히려 상대에게 불쾌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알렉스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제가 하지도 않은 일로 억울한 소리를 듣지 않기를 바랐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자존심보다는 마음을 지키길 바랐다.
알렉스는 가지치기의 피해자였으니까.
형제를 죽였다는 것보다는 악랄한 제도에서 살아남았다는 표현이 맞았다.
그리고 그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가을국 황실의 이념을 맹신했다.
가을국은 교육을 명목으로 황족을 세뇌해 왔다.
내가 볼 땐 그랬다.
이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축복인데, 황실 교육원은 이능은 한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을 만큼 위험하니 황족은 나라를 위해 이능을 올바른 쪽으로 제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올바른 제어란 공리, 절대다수를 위한 행복.
제국을 위한 생의 희생이었다.
무성한 가지를 잘라, 나무가 위로 올곧게 자랄 수 있도록 황족들은 모두 죽어야 했다.
기괴하게도 그 탈락한 황족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제 나라에 도움이 될 뛰어난 형제에게 이능을 몰아주는 것이 숭고한 가치라 여겼기 때문이다.
생존 본능마저 짓누를 정도면 가을국의 교육자들이 얼마나 악독하게 황족을 세뇌해 왔을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얼마 전 누각에서 벌였던 조찬을 떠올렸다.
알렉스의 형제들이 사라진 걸 비꼬며 그를 자극하던 여름국 사람들의 대화.
그때도 알렉스는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아무리 얘라도 그런 얘기를 듣고 아무렇지 않을 리가…….’
그런데 어둠이 눈에 익은 지 이미 한참 지났는데, 갑자기 시야가 밝아졌다.
알렉스의 얼굴을 덮었던 그림자가 썰물처럼 위로 올라가며 그의 얼굴을 드러낸 탓이다.
사라진 잎사귀를 대신해 들이찬 달빛이 알렉스의 표정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차가운 얼굴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솜털 하나 움직이지 않는 얼굴에서 오직 샛노란 금안만이 신중히 움직였다.
나는 의심 가득한 눈빛을 받으면서도 알렉스의 생각을 내 쪽으로 끌어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트라우마는 잠시 내려 둔 것 같으니.
한참 표정을 살피던 금안이 내 눈동자 앞에서 바로 멈췄다.
강제로 얽힌 시선이 매우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안구 스캔을 하는 마음으로 침착하게 그의 판별을 기다렸다.
어쨌든 내 행동은 선의였다.
그리고 알렉스는 제법 사람의 본심을 잘 파악하는 인간이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제 시선을 피하지 않는 내가 못마땅한 건지, 혹은 흥미로운 건지 그는 표정 없이 한참 시선을 맞추다 뜬금없이 입매를 기울였다.
‘뭐야, 또 왜 웃어?’
그 반응에 집중한 탓에 나는 알렉스가 제 커다란 손으로 내 손등을 덮는 걸 늦게 알아차렸다.
그는 내 손등을 꽉 눌렀다.
막을 거면 제대로 막으라는 듯.
손등을 덮은 온기와 뺨에 닿은 숨결이 크게 감각되니 외려 내 청각이 무뎌졌다.
나는 생존 본능처럼 손을 떼려 했다.
“그 쓰레기 같은 자식이 감히 폐하를 이용하게 두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국서의 끝나지 않는 알렉스 뒷담에 놀라 다시 알렉스의 귀를 눌렀다.
내가 제일 문제다.
얘가 상처를 받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심지어 나는 이 상황에서도 알렉스가 상처받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이게 다 내 가정교육 탓이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인성에 몰빵한 그녀의 자식 교육이 먼 훗날 판타지 세계로 들어간 딸이 사패 황족의 멘탈을 보호하는 데 빛을 발할 줄 말이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처럼 자괴감과 뿌듯함을 동시에 느끼는데, 알렉스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눈치 빠른 황태자는 내 도덕적 혼란을 고스란히 읽은 듯했다. 웃음을 참고 있다. 또.
웃지 마, 이 자식아.
넌 나한테 진짜 잘해야 해.
이 험난한 세상에서 나 같은 친구 만난 게 얼마나 행운인데.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알렉스는 내 손을 더 힘주어 움켜쥐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내가 이러는 게 흥미로운지 알렉스는 시선을 떼지 않고 차분히 나를 제 눈에 담았다.
심지어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눈앞에서 반짝이는 호박색 눈동자가 숨통을 조였다.
어두운 밤에 마주한 포식자의 눈처럼 날카로운 안광이 가까이 다가오니 심리적 압박이 거세게 일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그러나 다행히 알렉스는 타협하듯 다가오던 거리를 다시 물려 머리를 기둥에 기댔다.
그때, 디아나의 격양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