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나는 남자들을 보다 말했다.
“곧 치안 담당자들이 오지 않을까요? 그대로 두어도 될 것 같아요.”
그러자 알렉스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저것들은 신경 쓰지 말고. 지금 뭘 하고 싶냐고 물은 거였어.”
“……뭘 해요?”
“궁으로 돌아갈 건지, 축제를 더 즐길 건지 묻는 거야.”
“아!”
난 그제야 아이시스가 생각나 워치를 확인했다. 역시나 아이시스에게 메시지가 잔뜩 와 있었다.
[아이시스: 영애! 어디로 갔어요?!]
[아이시스: 다리도 부서지고 사람들 다쳐있고, 대체 무슨 일이에요? 괜찮은 거예요?]
[아이시스: 얼른 답장해줘요!]
정신이 없어서 그녀에게 상황을 알리지 못했다.
나는 알렉스가 보건 말건 얼른 워치로 메시지를 썼다.
[저 괜찮아요. 협회 놈들이 따라왔는데, 알렉스가 도와줘서 살았어요. 영애는 어디예요?]
바로 답장이 왔다.
[아이시스: 다행이다!!!!]
[아이시스: 근데 지금 알렉스랑 같이 있는 거예요?]
[아이시스: (부끄)]
……이모티콘 뭐야?
뺨을 붉힌 이모티콘에 눈이 흐려졌다.
“아직도 손목이 아픈 건가?”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손목에서 따스한 열감이 퍼졌다.
나는 냉큼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안 아파요. 치료하지 마세요!”
“왜 그렇게 내 이능을 싫어해?”
“전 드릴 대가가 없으니까요.”
“대가?”
희한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알렉스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가 뭘 바란 적이 있나?”
표정이 떨떠름한 걸 보니 ‘네가 나한테 뭘 줄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경제적 박탈감을 느끼며 나는 소심하게 답했다.
“듣기로는 대가를 드려야 치료를 해 주신다고 했거든요. 가을국 공녀님을 치료해 주시면서 영지 절반을 받아 가셨다고 들었고요.”
“누가 그래?”
빙그레 휘어지는 입술을 보다 움찔했다.
저걸 말하면, 불쌍한 가을국 학자가 고문을 당할 것 같았다.
“제가 이래저래 아는 얘기가 많잖아요. 출처는 비밀입니다.”
나는 영업 기밀을 대하듯 시선을 피하고 다시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이시스: 그럼 숙소에서 보는 거로 하고, 오늘은 둘이 좋은 밤 보내요 (하트)]
무슨 좋은 밤이에요!
확 인상이 찌푸려졌다.
“많이 아픈 거 같은데.”
나도 모르게 손을 뒤로 숨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뇨! 정말 괜찮아요. 전하 혹시 스크롤 있으세요?”
“이동 스크롤?”
나는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들을 보다 다시 알렉스를 쳐다봤다.
“폐하께 여름국에 겨울국 재건 협회 인간들이 더 있다고 보고드려야 할 거 같아요.”
“아.”
그는 거리에서 버둥대는 남자들에게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행사 끝나고 궁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누가 듣기 전에 궁으로 가야겠어요.”
그때, 인파 속에서 짜증 어린 신음이 밀려왔다.
“아우, 비켜 봐요. 좀.”
“비킵시다. 비켜요.”
“순군이네, 얼른 비켜 드려.”
나는 소란이 이는 곳을 흘깃 보다 다시 알렉스를 쳐다봤다.
“순군이랑 엮이면 황태자님도 곤란하시잖아요. 같이 가요.”
알렉스는 동의하듯 군말 없이 주머니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나는 그가 건넨 스크롤 끝을 잡았다.
찌익.
그리고 알렉스가 종이를 찢는 순간 얼른 눈을 감았다.
***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꾹꾹 눌렀다.
“아니, 어디로 갈지 말해 주시고 찢으셔야죠.”
“디아나한테 가자며.”
“어디 계신지 아세요?”
눈을 뜨자 어둑한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또 어디야.
주변을 살피는데 시끄러운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뭇잎을 요란하게 흔든 밤바람에 풀과 꽃내음이 가득했다.
나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무 바닥, 굵은 기둥. 난간 너머로 보이는 연못과 정원.
환한 달빛에 만개한 수국이 하얗게 빛나고, 검은 연못 한가운데에는 달이 담겨 있다.
며칠 전에 조찬을 먹었던 황제궁의 누각이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광활한 마루에 오직 나와 알렉스만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아직도 알렉스의 앞에 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벌떡 일어나기 무섭게 손목이 잡혔다.
그 바람에 몸이 뒤로 돌아간 채 알렉스에게 끌려갔다. 얼결에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나는 기겁했다.
“왜 이러세요!”
알렉스는 대답 대신 작은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제 입술 앞에 두었다.
“조용히 하라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알렉스는 제 금빛 눈동자를 난간 밖으로 굴렸다가 다시 나를 응시했다.
알렉스의 시선을 따라 기둥 옆으로 보이는 연못을 쳐다봤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어?”
아니다. 뭔가 있었다.
차츰 어둠이 눈에 익자 이상한 게 보였다.
보초를 서는 이가 있었는지, 꺼진 횃불이 돌다리 구석에 떨어져 있었다.
황성 건물이 대부분 단층인 탓에, 시야가 높은 2층 누각에서는 황궁 내부가 멀리까지 보였다.
황제궁 집무실 주변은 호위가 궁을 지키는지 담벼락 너머로 반짝거리는 횃불이 보였는데, 그 횃불은 딱 이 연못 주변에서 끊겼다.
나는 어둠이 끝나는 곳을 찾아 시선을 움직였다.
어둠은 화월궁의 인공 계곡인 환원산 아래까지 이어졌다.
쌔한 기분이 들었다.
황성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누군가 도주로를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기둥에 기댄 알렉스에게 속삭였다.
“전하, 지금 여기서부터 화월궁까지 보초를 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그런데 돌아오는 답이 없다.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다시 물었다.
“알고 계셨어요?”
끄덕.
“어떻게요?”
“소문 못 들었나 보네. 나 한동안 의금부에서 협회 사람들이랑 지냈는데.”
직접 겨울국 재건 협회 사람들을 고문했다는 얘길 듣긴 했다.
그의 정보력에 놀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겨울국 재건 협회 사람들이 국서를 빼돌리려는 거예요?”
그는 눈을 찌푸리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은 맞혔는데.”
이 와중에 나를 놀리는 저 여유가 기가 막혔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겨울국 재건 협회장이 아니라 여름국 황제가 빼돌리는 거야.”
“네?”
디아나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 무시하고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놔주세요. 국서가 탈출하기 전에 빨리 알려야죠.”
“누구한테 알리려고?”
알렉스는 기둥에 뒷머리를 기대고는 피식 웃었다.
“이 궁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빼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우리가 나서 봤자야. 힘 빼지 마.”
다시 일어나려 했으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다시 앉아야 했다.
“어차피 황제는 이쪽으로 올 테니까 기다리자고. 할 말 있다며.”
“폐하가 오실지 어떻게 아세요?”
“디아나는 연등축제 날에 이 연못에서 밤을 새우거든. 황궁 사람이라면 다 아는 얘기야.”
“……전하는 황궁 사람도 아니시잖아요.”
알렉스는 능청맞게 눈을 휘어 댈 뿐 대답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부지런한 이 황태자는 여름국에도 제 첩자를 심어 둔 모양이었다.
그러나 잘못된 정보를 받은 것 같다.
“전하, 이번에도 잘못 짚으셨어요. 폐하는 절대 겨울국 재건 협회 사람이 아니세요.”
신분이 확실한 여주를 오해하는 알렉스를 보고 있으니 답답했다.
내가 아는 커뮤 지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런데 알렉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디아나를 협회 사람이라고 했나?”
“의심하는 거 아니셨어요?”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근데 왜 폐하가 국서를 빼돌린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알렉스가 굉장히 부도덕한 사람을 보듯, 나를 보며 입을 벌렸다.
그 표정이 어찌나 진심 같은지 순간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매정하네. 반려가 사사될 수 있는데 당연히 탈주를 도와야 하는 거 아니야?”
“…….”
알렉스에게 인성을 지적받았다.
굉장히 기분이 찜찜했다.
“국서는 여름국 최고 권력자 가문 자제인데, 설마 사형까지 가겠어요? 그리고 폐하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죄인을 빼돌리지 않으시거든요!”
그러나 말하기 무섭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알렉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불안한 눈으로 알렉스를 보다 흘긋 난간 밖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정말로 디아나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침소에 들 준비를 했던 모양인지, 그녀는 하얀 야장의를 걸치고 있었다.
새하얀 비단 자락 위로 달빛이 은은히 내려앉았다.
다리의 가장 높은 곳, 중간에서 걸음을 멈춘 디아나는 난간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난간에 기댄 채 연못을 바라봤다.
혹시 뭘 빠뜨렸나? 그래서 찾으러 온 건가?
하지만 연못으로 기운 자세와 달리 그녀의 표정은 전혀 절박하지 않았다.
디아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지만, 선뜻 보낼 수 없었다.
이상하게 벽이 느껴졌다.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만 신경을 긁었다.
산책을 끝내면 모른 척 다가가 말을 걸어 볼까도 생각했는데 디아나는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까만 머리칼과 하얀 장포 자락만 사락사락 바람에 움직일 뿐, 그녀는 밀랍인형처럼 그대로 굳어 있었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디아나가 우울할 일이 뭐가 있지?
우리 황제 영애는 뭐든 할 수 있잖아?
아니, 근데 3국에 우울할 일이 있어? 이렇게 완벽한 세상에서 어떻게 우울할 수가 있지?
시간이 흐를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진짜 국서 때문에 그런가?
나는 한참 그녀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오늘은 타이밍이 좋지 않다. 내일 아침에 다시 말하자.
나는 알렉스에게 시선을 틀었다.
누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크롤을 더 빌려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알렉스 또한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디아나를 보고 있었다. 살짝 팔을 흔들자 그의 고개가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입을 열려는 찰나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무척 다급한 발소리였다. 그리고 찰그락거리는 기괴한 소리도 들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이 난간 밖으로 끌려갔다.
디아나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몸을 세운 채 다리 초입을 쳐다보고 있었다.
담벼락의 그늘진 곳에서 긴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이내 그 그림자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금부에서 나온 모양인지 그는 죄인처럼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도 남주는 남주였다.
탈옥한 와중에도 참 단정했다.
아니, 외관이 정갈하고 원체 풍채가 좋은 사내라 오히려 더 올곧아 보였다. 마치 대쪽같이 제 뜻을 지키다 간신들에게 모함을 당한 사대부 느낌.
외관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를 납치해 겨울국 재건 협회에 넘기려 했던 놈한테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아무리 여름국 최고 미남이라지만, 아무리 기골이 장대하고 여기까지 반듯한 태가 보일 정도로 완벽한 풍채를 갖췄지만, 인성이 글렀으니 절대 안 돼. 우리 디아나 영애의 짝으로 너는 안 된다.
나는 여차하면 디아나에게 메시지를 보낼 생각으로 눈을 부릅떴다.
디아나를 발견한 국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으나,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다.
차락 차락.
그의 발이 달빛의 영역에 들어선 뒤에야 나는 그 소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의 발목에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다.
두 발목의 구속구를 연결한 사슬은 끊어졌으나, 구속구를 풀지는 못한 듯했다.
범죄자들이 마력을 써서 탈출하지 못하도록, 3국은 구속구로 죄인을 포박했다.
나는 국서를 보다 시선을 틀어 디아나의 표정을 살폈다.
‘알렉스 말이 맞나 보네.’
디아나는 그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얼굴로 제게 다가오는 국서를 바라볼 뿐이었다.
“왜 돌아왔어.”
나는 흠칫했다.
디아나가 대외적으로 쓰는 위엄 있는 말투를 쓰지 않고, 친구에게 말하듯 편히 말했기 때문이다.
“미치셨습니까?”
헉, 소리를 낼 뻔했다.
국서는 완전히 인상을 구긴 채로 더 날카롭게 대들었다.
흑막인 건 눈치챘지만, 저렇게 대놓고 감정을 드러내니 다른 사람 같았다.
성큼성큼 다가온 국서가 디아나의 앞에서 딱 걸음을 멈췄다.
어깨를 잡고 흔들 줄 알았는데, 그는 가만히 선 채 제 분을 눌렀다. 흉부가 오르락내리락하며 그의 거친 숨을 드러냈다.
그러나 끝내 분을 누르지 못한 국서가 소리쳤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이런 짓을 벌이십니까!”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그 말에 국서가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아니면 대체 누가 신경을 씁니까.”
디아나는 저보다 머리 하나 큰 사내를 올려 보면서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내가 보아 온 얼굴 중 가장 편해 보이는 얼굴로 국서를 바라봤다.
“웃기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날 감시하고 내 나라의 정보까지 팔아넘기려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게 참 웃겨.”
디아나는 손을 들어 올리더니 국서의 손을 잡았다.
“아포스타시아.”
그리고 그의 약지에 있던 은반지를 빼냈다.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 있으면 얼른 도망이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