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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83화 (84/208)

83화.

“예?”

“아니야.”

술맛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또 잔을 채웠다.

알렉스는 조용히 술잔을 비우며 고독한 행인 행세를 했다.

인파 속에서 싸우면 자칫 누군가 다칠 수 있으니 조용히 나를 숨겨 주기로 한 모양이다.

하긴, 가을국 황족이 사고 치면 외교적 문제로 번질 수 있으니 싸우긴 부담스럽겠지.

알렉스 이 똑똑한 놈.

넌 정말 쓸모 있는 사패 남주야.

그는 내게 상황을 묻거나 말을 걸지 않고 혼자 술잔을 채우며 계속 고독한 손님을 연기했다.

술병을 집으려던 알렉스는 그제야 술병에 제 얼굴이 비치는 걸 깨달았는지, 나와 눈을 맞춰 왔다.

그가 내게 시선을 내리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들었다.

바로 눈이 마주쳤다.

반쯤 내리깐 금안이 몇 초간 미동 없이 나를 담았다. 건넬 말이 있는 듯했다.

이윽고 그가 입술을 천천히 벌렸다.

소리 없이 벌어진 입 모양이 뜻하는 말은 ‘마실래?’였다.

진심인지 그는 술잔을 내게 건넸다.

내가 술을 먹고 싶어서 저를 쳐다봤다 여긴 듯했다.

‘이 상황에 먹고 싶겠냐고.’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자 알렉스도 따라 눈을 찌푸렸다.

그는 갑자기 곶감 조각을 집어 들더니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아니! 안주부터 달라는 얘기가 아니잖아!’

어이가 없어 입이 벌어지는데 쑥, 곶감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뿌듯한 얼굴로 미소를 짓더니 다시 제 술잔을 채웠다.

입에 들어온 곶감을 씹지도 뱉지도 못한 채 그를 노려보는데 또 술병 위로 눈이 마주쳤다.

뭐가 웃긴지 알렉스가 또 실소를 흘렸다.

잔을 비운 그가 자유로워진 손으로 갑자기 내 양 볼을 움켜쥐었다.

꾸욱 꾸욱.

곶감 때문에 튀어나온 내 볼살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 그가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보며 내 볼살을 꾹꾹 눌러 봤다.

……이 자식이 취했나?

연거푸 술잔을 비울 때부터 심상치 않다 싶더니만 취한 듯했다.

그러니 지금 상황을 잊고 나를 가지고 노는 거지.

저쪽이 상황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으니 나도 겁을 상실했다.

숨어 있다는 걸 망각한 채 고개를 내저어 손을 털어 냈다.

어차피 알렉스 덩치면, 검은 장포 사내들이 시력이 2.0이어도 날 발견할 수 없을 거다.

그러나 나는 주변 반응을 간과했다.

주변 손님들이 이쪽을 힐긋힐긋 쳐다보고 있던 것이다.

장포 안에서 술 먹는 여자가 신기한지 그들은 시선을 떼지 못하고, 혀를 쯧쯧 차기도 했다.

“거 참. 남사스럽구먼.”

“멀쩡한 집 놔두고 밖에서 왜 저런대.”

“외국인들은 문화가 다른가 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에게 눈을 치우라고 사인을 보냈지만, 그들은 눈치가 느렸다.

주변에서 저리니 바보가 아닌 이상 이쪽에 뭔가 있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마침 도자기 위로 인파 속에서 불쑥 솟은 검은 장포 사내들이 비쳤다.

지나치려던 사내 셋이 걸음을 멈췄다.

알렉스의 뒤통수를 보며 눈빛을 교환하던 남자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으악!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나는 손으로 알렉스의 앞섶을 당겨 얼굴을 가렸다.

내가 부산스럽게 구는데도 알렉스는 당황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그러나 알렉스가 혼신을 다해 고독한 손님을 연기한 보람도 없이 한 사내가 알렉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잠시 나와 보시죠.”

도자기 표면 위로 비치는 긴장감 넘치는 장면에 나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알렉스는 제 몸에 손을 댄 게 아주 불쾌한지 표정 없는 얼굴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치워.”

그러나 사내들은 대화를 잇는 대신 바로 칼을 빼 들었다.

“으윽!”

그리고 그대로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나는 술병 표면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남자들이 바닥으로 꺼진 듯 사라진 것이다.

“세상에! 저게 뭐야!”

“바닥에서 괴물이 나타났어!”

뒤에서 비명이 밀려왔다.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알렉스의 장포를 살짝 거두어 뒤를 쳐다봤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진 인파 사이로 저잣거리 바닥이 드러난 것이다.

그 땅바닥 위에는 검은 불가사리 3마리가 붙어 있었다.

바닥에서 돋아난 나뭇가지가 남자들의 사지를 옭아맨 탓이다. 남자들은 거열형을 당하는 것처럼 대자를 그린 채 저잣거리 한복판에 박제됐다.

사람들은 그들을 밟고 지나가지도 못하고, 이 진귀한 구경을 놓치기 싫어 돌아가지도 못했다.

“세상에 이게 뭐야?”

“갑자기 바닥에서 나무가 돋아났어!”

“아니, 것보다 이놈들은 왜 여기 자빠진 겨?”

“모르지…… 저쪽 외국인이 그런 거 같은데?”

“마법사인가?”

“쉿, 조용히 해! 괜히 해코지당할라.”

시끌시끌한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알렉스를 올려다봤다.

길 한복판에 악당 전시회를 열어 놓은 알렉스는 충격을 받은 관람객 반응과 반대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곶감을 들더니 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떡 벌어진 내 입안으로 그 조각을 넣었다.

얼결에 곶감을 삼키자 뭐가 재밌는지 웃음을 흘리며 다시 곶감을 집었다.

나는 또 곶감을 건네는 알렉스를 쳐다봤다.

뭔가, 고마운데 형언할 수 없는 불쾌함이 울컥 차올랐다.

마치 반려동물에게 간식을 먹이는 태도 같잖, 이 자식 지금 나를 개 취급하는 거야?

불쾌감의 이유를 깨닫자마자 인상을 와락 썼다.

“하하하.”

알렉스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도포 앞섶을 헤치고 나오는데 알렉스가 다시 이마를 꾹 눌러 제 안으로 가뒀다.

“아직 위험해. 조금 더 숨어 있어.”

“사지를 결박해 두셨는데, 뭐가 위험해요?”

“나 지금 무서워서 떨고 있는 거 안 보여?”

“……취하셨어요?”

알렉스는 빙그레 입매를 길게 늘이다 술을 한 모금 머금었다.

잔을 내려 둔 그가 여전히 미소를 입에 건 채 말했다.

“데이지, 나는 무지는 죄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나 새나온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주제를 모르면 혼을 내지 말고 알려 줘야지.”

그는 제 잔을 채우며 웃음을 지웠다.

“조금만 기다려 주자고.”

이 분위기가 익숙하다.

알렉스는 또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를 오래 본 건 아니지만, 내가 본 대부분의 모습은 세상을 우습게 여기는 거만한 왕자였고, 인성을 무료 나눔 한 듯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반사회적 인간이었다.

그리고 늘 여유로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알렉스는 저런 묘한 표정을 자주 보여 줬다.

나 이 소심함 어떡하면 좋지.

저렇게 표정을 싹 지우고 있으니 무서웠다.

혼자 술병을 비울 생각인지 그는 안주도 먹지 않고 쉴 새 없이 잔을 비우지…… 않네, 안주 먹으려나 보네.

곶감을 든 알렉스가 그대로 입에 넣지…… 않고 또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

너 진짜 내가 반려동물인 줄 아는구나.

내가 수인이었어도 기분 나쁠 만한 선심에 눈을 뾰족하게 뜨고 노려보자 알렉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싫어?”

“좋겠어요?”

날카롭게 나온 반문에 알렉스는 상처받았다는 듯 또 눈꼬리를 내리며 곶감을 제 입에 넣었다.

“섭섭하네.”

“뭐가 그렇게 섭섭한 게 많으세요.”

“내 호의가 그대에게 늘 부담이 되는 것 같아서.”

알렉스가 내게 호의를 베푼 적이 또 있었나?

이능을 써서 나를 치료해 준 일이 떠올랐다.

그건 좀 부담되기는 했지.

지금 날 구해 준 것도 부담되나?

생존 본능과 불편함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슬쩍 장포 자락을 거두고 뒤를 돌아봤다.

나무를 풀라며 소리치던 남자들이 어느새 포기하고 바닥에 뺨을 묻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수치스러움이 가득한 얼굴.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인정했다.

공포에 질려 도망치던 게 불과 10분 전인데, 지금은 저 얼굴을 자세히 살피고 있다.

생각해 보면 알렉스에게 고마운 일이었다.

다시 앞으로 자세를 바로 한 나는 병에 비친 알렉스를 보며 혼란스러운 생각을 곱씹었다.

‘좋은 인간인지 나쁜 인간인지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는 알렉스는 제 잔을 비우고 다시 술병을 집어 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 술병을 빼앗았다. 뭐냐는 듯 알렉스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자작하면 3년 동안 재수 없대요.”

“자작?”

여기에 자작이라는 말은 없나?

나는 눈치를 보며 슬쩍 단어 풀이를 해 줬다.

“혼자 술잔 채우는 걸 자작이라고 해요.”

“그런 걸 믿어?”

알렉스가 비웃듯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참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도 내가 따라 준 술이 마지막 술이었다.

늦지 않아 다행인지, 더 따라 줄 술이 없어 아쉬운 건지 모르겠다.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그 말이 나오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그때, 알렉스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오오오오!”

사람들의 탄성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가 땅속으로 사라진 탓이다.

남자들은 벌떡 일어나지 않고 천천히 눈치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경계심 넘치는 눈으로 알렉스를 보던 남자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도망치기 무섭게 나무에 발목을 붙잡혀 넘어졌다.

“와하하하.”

“아이고, 또 묶였네.”

주변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알렉스는 새나오는 웃음을 그대로 흘리며 남자들을 보다 내게 시선을 내렸다.

그가 내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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