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하얗게 질린 머릿속으로 남자 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저희와 함께 가시죠.”
굳은 목에 힘을 주어 가까스로 고개를 드니 남자가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와 똑같은 검은 장포를 입은 사내들이 인파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풍채가 좋은 사내들은 왼쪽에 찬 검집을 손에 쥔 채 내게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난간에 등허리가 짓눌릴 뿐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남자는 차분한 말투로 다시 한번 말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아찔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벗어날 방법을 찾았다.
‘담당자님, 메시지 보내 주세요.’
[누구에게 보낼까요?]
‘아무나, 보낼 수 있는 사람에게 보내 주세요!’
나는 제발 이 구역에 유저가 있길 간절히 바랐다.
[환원강 풍등 다리 A 구역에는 메시지 전송 가능한 유저가 없습니다.]
손목으로 다급히 시선을 내렸다.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남자가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놔요!”
“부디 조용히 따라와 주세요. 저희도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정중하게 말하나 손아귀의 힘은 전혀 신사적이지 않았다. 손목이 끊어질 것 같다.
“내가 미쳤다고 그쪽을 따라가요? 놔요!”
버둥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주변 사람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주기 시작했다.
지금 따라가면 그 협회장인지 뭔지 하는 놈한테 보낼 거 아니야!
알렉스는 비교도 안 되는 사패인데 따라가면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격렬하게 팔을 내저으며 거부하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사장이 이상하다 느꼈는지 이쪽으로 걸어온 것이다.
사장뿐 아니라 다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들 뭡니까? 아가씨 괜찮아요?”
사장은 검은 장포 남자 뒤에서 내게 손을 뻗었다.
“아가씨, 이쪽으로 와요.”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촤악.
검은 장포 사내가 뒤를 보지도 않고 칼을 꺼내 사장을 베었다.
투욱.
사장은 비명조자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꺄아악!”
다리 위로 비명 소리가 가득 찼다.
“수, 순군! 누가 순군 좀 불러와!”
나는 내가 본 장면을 믿을 수 없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뚝뚝.
칼끝에 매달린 검붉은 핏방울이 뚝뚝 다리 위로 떨어졌다.
건조한 나무판자가 핏방울을 빨아들이며 제 몸에 흔적을 새겼다.
퍼져 가는 핏물 자국을 보며 나는 조금씩 현실감을 찾아갔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말한 남자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사내들은 내가 따라가지 않으면 정말로 사람들을 죽일 생각이다.
떨리는 고개를 들었다.
겁먹은 나와 달리 사내의 낯은 차분했다.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칼을 휘둘러 핏물을 털어 냈다.
어둠 속에 피어난 매화처럼 핏자국이 검은 나무 바닥으로 길게 퍼졌다.
흐려지는 시야로 남자의 거친 손이 들어왔다.
“가시죠.”
남자는 힐긋 쓰러진 사장을 쳐다봤다. 따라가지 않으면 모두를 베어 버리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나는 바로 걸음을 내디뎠다.
일단 여길 나가서 생각하자.
나 때문에 또 누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최대한 천천히 벗어나면서 도움을 청할 방법을 생각해 보자.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무력감이 밀려왔다.
‘왜 나는 누가 구해 주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나한테도 전투 버프가 있으면 좋을 텐데.
울컥한 마음에 입술을 짓씹는데 머릿속으로 섬광이 스쳤다.
‘전투 버프!’
흥분한 마음을 누르고 AI를 불렀다.
‘담당자님, 버프 복사 아이템 사용해 주세요!’
[아이템 ‘여주 버프 복사’를 사용합니다.]
[1개의 복사된 버프가 있습니다.]
[‘대륙 제2의 검’ 여주 특성 버프 ‘일도’ 가 시현됩니다.]
내게도 전투 버프가 하나 있었다. 겨울국에서 마왕 동면지를 탐색할 때 디아나에게 받은 아이템이었다.
[‘대륙 제2의 검’ 여주 특성 버프 ‘일도’ ON]
[무기를 들고 목표물을 향해 휘둘러 주세요.]
반투명한 검은 상태창이 반짝이며 내게 버프 사용을 권했다.
무기?
일전에 디아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막대기나 손을 휘두르면 된다고 했던 거 같은데.
휘두를 만한 무기를 찾던 시선이 난간에서 멈췄다.
벼루 안에 든 붓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남자를 향해 걸으며 몰래 붓을 손에 쥐었다.
“따라갈 테니까 손대지 마.”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시선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릿하게 훑더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내가 붓을 손에 쥐는 걸 봤으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내가 붓을 들고 발악해도 제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여기는 듯했다.
희롱하듯 놈이 고개를 까닥 숙이며 옆으로 물러났다.
“뜻대로.”
나는 붓을 꽉 움켜쥐었다.
어느새 다가온 5명의 사내가 나를 에워싼 채 걸었다.
사람들은 차마 말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모른 척하지도 못하고 우리 주변에서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몇몇 사람들이 끼어들 태세를 취했으나,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말렸다.
다리 끝에 이를 때쯤, 일이 생겼음을 들었는지 올라오지 못한 사람들이 거리에 뭉친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덕에 다리 말미에는 사람이 없었다.
자박.
나는 바로 걸음을 멈췄다.
꾀를 쓴다 생각했는지 피로감 가득한 얼굴로 앞서가던 사내가 제 관자놀이를 긁었다.
“당신께 손대지 말라 하셨지만, 그대를 업고 가는 게 레이디에게도 안전할 것 같군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 있던 남자가 나를 들었다.
“놔!”
“뭘 하실지는 모르나 하지 마십시오. 다치실 겁니다.”
이렇게 제대로 납치를 당하는 건 처음이라 어떻게 간격을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체 간격을 어떻게 잡아야 하지?’
디아나의 일도 버프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검기는 거대한 칼날이 지나간 것처럼 모든 것을 깨끗하게 베어 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잘못 쓰면 축제를 구경 온 사람이 다칠 게 뻔했다.
그렇다고 인적 드문 곳으로 갈 때까지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혹시라도 이놈들이 스크롤을 써서 날 데려간다면, 놈들의 아지트에서 버프로 탈출해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거기가 어딘 줄도 모르는데.
게다가 도망쳐도 내 걸음으로는 금세 붙잡힐 거야.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나는 놈들을 전부 없애는 걸 포기하고, 난간 쪽으로 붓을 휘둘렀다.
일도는 무조건 사람이 없는 쪽으로 날아가야 했다.
휘오오오오.
붓이 그린 궤적을 따라 푸른빛이 피어나더니 반원 모양이 되어 날아갔다.
디아나가 장도로 발휘하던 버프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다행이었다.
검날은 바로 앞서가던 검은 장포 사내의 오른쪽 팔을 베었다.
“으윽!”
사내들은 빠르게 몸을 숙였지만, 빛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오른쪽에 서 있던 사내 둘의 어깨와 등에서 피가 솟구쳤다.
사내들을 베고도 일도는 수그러지지 않았다. 그 거센 파장은 다리 난간으로 직행했다.
콰광.
검기에 밀려 난간이 부서지고 등나무가 뽑혀 나갔다.
“으악!”
“도망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당황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친!”
등나무가 뽑혀 나가는 바람에 천창에 얽힌 나뭇가지가 팽팽히 당겨졌다.
우지끈.
그 반동에 다리가 흔들리더니 곧 나무 바닥이 뜯겨 나갔다.
콰과앙.
“젠장!”
나를 업은 남자도 휘청했다. 그 바람에 내 허리를 움켜쥔 손에 힘이 빠졌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붓끝으로 남자의 손등을 콱! 찍었다.
“윽!”
방심하다 날 놓친 남자가 재빨리 손을 다시 뻗었지만, 나는 바닥을 기어 인파 속으로 도망쳤다.
“으악!”
“비켜!”
뒤에서 사람들을 밀어내고, 밀쳐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미친 듯이 저잣거리로 뛰어 도망쳤다.
‘담당자님, 메시지 보내 주세요!’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시 메시지 전송을 시도했다.
[죄송합니다. 환원강 D 구역에는 메시지 전송 가능한 유저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주변에 영애들이 없는지 AI와 메시지가 연동되지 않았다.
아씨! 지금 어떻게 워치를 만져!
나는 주막촌으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이미 방향을 잘못 잡은 바람에 주막촌의 반대로 뛰고 있었다.
“하아, 돌겠네.”
그래도 멈출 수 없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작정 뛰었다.
“꺄악!”
“이 사람들 뭐야!”
“어후, 밀치지 마!”
불만 가득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마음이 조급해져 워치를 보기는커녕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때, 왼쪽으로 꺾이는 골목이 보였다. 사람이 많은지 그 골목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밀려왔다.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강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빽빽한 인파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나는 안도하며 인파 속을 파고들고 거슬러 올라갔다.
“아우, 뭡니까!”
“거, 참! 천천히 갑시다!”
이 골목은 유독 보행길이 좁았다. 양쪽으로 길게 늘어진 노점상이 마주 보고 있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아이시스가 말한 노점상 거리였다.
나는 더 멀리 도망가고 싶었지만, 인파를 뚫을 수 없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노점상에 앉아 있는 덩치가 큰 남자를 발견하고 그 옆에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뛸 수도 없었다.
제발 남자에게 가려지길 바라며 나는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뭐 드릴까요?”
앞에서 주인이 내게 물었다.
“아, 아무거나요!”
나는 대충 주문하고, 옆에 앉은 남자의 골격에 맞추어 탁자 앞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아! 뭡니까! 눈 제대로 뜨고 다녀요!”
“아, 왜 이래요!”
남자들은 거대한 풍채 때문에 인파를 뚫기 힘든 모양인지,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래도 날카로운 소음은 계속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기도 했고, 어깨를 부딪친 남자가 항의하기도 했다.
손끝이 달달 떨렸다.
소란한 목소리가 내가 있는 쪽으로 점점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급하게 아이시스에게 메시지를 썼다.
겨울국 재건 협회 끄나풀이 나타났다고 쓰는데 갑자기 옆에 앉은 남자가 일어나며 탁자에 돈을 올렸다.
“잘 먹었소이다.”
아, 안 돼!
나도 모르게 남자를 붙잡으려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순간, 어두운 천에 시야가 막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짙은 보라색 천이 느리게 떨어지며 마치 발처럼 나를 가렸다.
소매가 어찌나 넓은지, 비단 자락은 커튼처럼 탁자 아래까지 늘어졌다.
어떤 사내가 나를 끌어안듯 제 품에 가둔 채 천연덕스럽게 내 뒤에 앉은 것이다.
탁자 위의 길쭉한 물병에 팔을 올린 그는 내 머리 위에 턱을 올린 채 메뉴판을 읽었다.
“봐도 모르겠군. 알아서 내주게.”
남자는 메뉴판과 금화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눈이 휘둥그레진 주인이 손을 내저었다.
“나으리,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에는 이 정도로 비싼 메뉴가 없습니다.”
“거스름돈은 안 줘도 돼. 자릿값이니.”
모든 걸 장난으로 여기는 웃음기 섞인 저음.
손가락을 움직이는지, 간이 테이블 위로 긴 그림자가 까닥였다.
“두 사람이니 그 정도는 받아야지.”
남자는 손가락으로 본인과 나를 콕콕 찍었다.
“아우, 밀치지 말아요!”
“아씨! 눈을 얻다 팔고 다니는 거야!”
어떻게 온 거냐고 묻고 싶었는데, 바로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다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냥 가만히 있어.”
탁.
테이블 위로 검은 도자기 호리병과 기다란 사기그릇이 놓였다.
“이게 저희 노점에서 가장 비싼 술과 안주입니다. 다 드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계속 채워 드리겠습니다.”
사기 위에는 견과류가 든 곶감이 예쁘게 썰려 있었고, 호리병에서는 독한 술 냄새가 났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있던 잔을 집었다.
잔을 채운 그는 내 앞에 술병을 내려 두었다. 술병의 검은 표면이 거울처럼 혼란한 거리를 비추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남자의 얼굴이었다.
노란 등불에 물든 얼굴이 무료한 눈으로 술잔을 응시한다. 잔에서 입술을 떼어 낸 그가 주인장을 보며 물었다.
“이건 무슨 술이지?”
“남부 지방에서 재배한 포도를 증류해 만든 술입니다. 술이 독해 금방 취하니 조심해서 드셔야 합니다.”
알렉스는 기가 찬지 헛숨을 흘렸다.
“이 나라 사람들은 참 포도를 좋아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