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한식이 최고인 이유는 조화로움 때문이 아닐까?
한식은 술과 잘 어울리고 심지어 커피와도 잘 어울린다.
그러니 과식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아이시스와 나는 200년 전통이라는 팻말을 지나치지 못하고 순댓국까지 먹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 옆에 있던 카페를 발견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알차게 테이크아웃 했다.
카페 줄이 얼마나 긴지 무려 1시간이나 웨이팅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카페는 키스카 영애가 오픈한 카페였다.
“키스카 영애 대박 나셨네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뒤돌아 그녀의 카페를 쳐다봤다.
여름국 사람들은 자신도 몰랐던 입맛을 저격당하고, 감격에 겨운 얼굴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주변에 서양 로판 국가가 있는 탓에 다행히 커피는 몰입감 패널티를 받지 않았다.
여름국이 이렇게 이웃나라 덕을 보는군.
그때, 아이시스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댓국집 옆에 아메리카노 전문점을 오픈하다니. 영애 천재신가?”
빙의 여주가 바꾼 문화.
비록 로판 세상이 조금 망가지긴 하지만, 행복 총량은 오히려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역시 빙의 여주가 세상을 구한다.
나는 홀로 뿌듯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걷던 나는 강변의 다리에 시선을 빼앗겼다.
강을 가로지르는 넓은 다리 위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저 다리는 뭐예요?”
다리에는 가로수처럼 등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긴 가지가 서로 맞닿아 천막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복잡하게 얽힌 가지 사이로 길게 늘어진 꽃이 강바람에 살랑거렸다.
어떤 아이는 아버지의 어깨에 목말을 타고 그 꽃을 톡톡 따기도 했다.
그 아름다운 다리는 어둑한 강 한가운데서 홀로 붉은 초승달처럼 반짝였다.
난간에 선 수많은 사람이 풍등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신비로운 정경에 시선을 빼앗겨 나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아, 데이지는 풍등 날려 본 적 없죠?”
나는 시선을 다리에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번 가 봐요. 저 다리에서 풍등 이벤트가 열리는데, 1명을 뽑아서 소원을 들어주거든요.”
역시 세계관의 신 ‘시스템’.
이벤트 경품 클라스 한번 대단하다.
“제가 갑자기 황제가 되고 싶다고 하면 황제가 되나요?”
“음, 글쎄요. 시스템도 소원을 읽어 보고 들어주지 않을까요? 적당하게 들어줄 만한 거로 빌어 봐요.”
나는 소원에 의구심을 품고 물은 건데, 아이시스는 진심으로 시스템이 경품을 줄 거라 믿는 듯했다.
믿고 싶긴 한데 묘한 거리감이 든다.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줄 거라 말하는 부모님의 거짓말 같은 느낌.
아이시스의 말을 곱씹던 나는 다시 그 등나무 다리를 바라봤다.
“좋아요. 얼른 가 봐요.”
소원을 떠나서, 풍등을 올려 보고 싶어졌다.
이것도 추억이잖아.
우리는 인파를 따라 등나무 다리로 갔다. 다리는 안에서 보니 더 아름다웠다.
등나무 가지에 연등이 걸려 있는데, 포도송이처럼 매달린 등나무꽃이 그 빛에 붉게 물들었다.
따스한 빛으로 물든 세상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기분이 아늑해진다.
주변을 가득 채운 웃음소리도 포근하고.
나는 고개를 돌려 다리에 가득한 사람들을 구경했다.
한지 위에 글을 적는 이들도 있고, 풍등 안에 불을 붙이는 이도 있고, 그저 난간에 기대 강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이도 있었다.
다들 제 소원을 재잘거리며 들뜬 마음을 한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하늘에서 늘어진 꽃이 바람에 살랑이고, 연등을 태우는 기름 냄새가 은은히 흩어진다.
나는 덩달아 붕 뜬 마음을 안고 다리를 걷다 풍등을 파는 가판대로 다가갔다.
“어떤 거로 드릴까요?”
중앙 가판에는 여러 풍등이 걸려 있었다.
미리 문구를 써 둔 풍등도 있고,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풍등도 있었다.
“마음에 드는 문구가 없으시면 직접 적으세요. 붓도 빌려드립니다.”
상인은 난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간 위에 먹물이 담긴 벼루와 붓이 있었는데, 풍등을 구매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문구를 적고 있었다.
아이시스가 풍등을 고르다 내게 물었다.
“저희는 직접 적을까요?”
“좋아요.”
우리는 작은 풍등 2개를 고르고, 주인의 도움을 받아 초도 설치했다.
“초까지 포함해서 총 20실버입니다.”
가격이 생각보다 비쌌지만, 축제 특수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가격은 아니었다.
결제하기 위해 귀주머니를 꺼내던 아이시스가 굳어 버렸다.
“왜 그래요?”
“주머니가 없어졌어요.”
아이시스는 허리 주변을 뒤적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주머니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세상에, 부딪힌 줄도 몰랐는데 소매치기를 당했나 봐요.”
흐른 세월 동안 소매치기 남주의 스킬이 늘었는지, 우리는 그와 스친 줄도 모른 채 주머니를 뺏기고 말았다.
아이시스가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아아, 어떡하죠. 거기에 저희 스크롤도 있는데!”
그때 뒤에서 상인이 끼어들었다.
“초 설치한 풍등은 환불 안 됩니다.”
그는 우리가 등을 돌려줄까 걱정됐는지 저렇게 말하고는 다른 손님을 응대하려 등을 돌렸다.
“어떡하죠?”
나는 울상을 지었다.
“행사 끝날 때쯤 됐으니까, 디아나한테 메시지 보내 볼게요.”
몇 초 뒤, 아이시스가 안도한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행사 끝났대요. 디아나는 일이 많아서 궁으로 돌아갔다고, 후궁 영애들은 주막에 갔으니까 물어보라네요.”
무제한 메시지는 AI 연동으로도 원격 메시지 발송이 가능했다. 그 덕에 그녀는 워치를 사용하지 않고도 쉽게 다른 유저들과 대화를 했다.
나도 가입할까?
캐시가 넉넉해지면 가입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충동구매 욕구가 차오른다.
아이시스가 그새 후궁 영애들과 대화를 끝낸 모양인지 환하게 웃었다.
“후궁 영애들 주막촌이라는데, 제가 가서 스크롤이랑 돈 좀 빌려올게요.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는 이미 풍등에 초를 꽂은 뒤라, 한 명은 여기 남아야 했다.
주인이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갈까 봐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지는 아이시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는 난간으로 다가가 풍등을 올려 두고 등나무에 머리를 기댔다.
긴장이 쫙 풀리면서 진이 빠졌다.
“아, 지친다.”
풍등만 날리고 돌아갈까?
나는 손을 들어 시야를 간질이는 등나무꽃을 거두었다. 그러자 검은 강물 위로 떠다니는 조각배 몇 척이 보였다.
비단옷을 빼입은 여인과 사내가 눈에 들어온다.
여인의 손목에는 워치가 없었다.
집에 워치를 두고 온 여주일 수도 있지만, 그저 엑스트라일 가능성이 컸다. 워치를 두고 다니는 건 집에 핸드폰을 두고 다니는 것만큼이나 불편한 일이니.
원격 메시지 수신도 어렵고.
동기화 메시지권을 구매했다고 해도, 종일 켜고 다니면 시야가 어지러워 불편했다.
그건 내가 동기화 메시지권을 구매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가뜩이나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AI 조언도 신경 쓰이는데, 메시지가 계속 수신되면 연기를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플레이가 익숙해지고 남주나 엑스트라 앞에서 표정 관리가 편안해지면 구매할 생각이었다.
“하하하.”
그때, 다리 아래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커플이 제 무릎을 치며 즐겁게 떠들었다. 훈훈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내 입가로 옮아 왔다.
무슨 얘기를 나누기에 저렇게 즐거울까?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슬롯에 담기지 않은 남주가 스스로 여주를 선택할 수 있다면, 엑스트라 여자 캐릭터에게 빠지는 일은 없을까?
시나리오가 내장되지 않은 엑스트라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하고 결과를 받아들일까?
다리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사회적 관계를 이루고, 웃고 떠들며 감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니 유저와 캐릭터의 구분이 어려웠다.
‘진짜 사람 같아.’
술을 마신 탓인지, 아니면 연등이 주는 몽환적인 분위기 탓인지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나도 취했나 보네.”
손을 거둬 등나무꽃을 내리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저기요.”
돌아보니 검은 장포를 입은 남자가 풍등을 들고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난간에 닿는 걸 보니 벼루와 붓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나는 아차 싶어 얼른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 비켜 드릴게요.”
그러나 남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습니다.”
그 말에 흠칫했다.
이 분위기 설마 작업인가?
‘혹시 연락처를 받을 수 있을까요?’라는 대사가 나올 법한 타이밍.
여주는 함부로 혼자 공상할 시간도 없나 보군.
나는 세계관이 하사하신 아름다운 외관에 힘입어 자의식 넘치는 착각을 했다.
그런데 남자는 내게 이름이나 연락 방법을 묻지 않았다.
그저 머뭇거리다 풍등을 건넸다.
“제가 글을 잘 몰라서 그런데 제대로 썼는지 봐 주실 수 있을까 요?”
……뭐지.
나 번역가 버프 있다고 이름표라도 붙어 있나?
길에서 맞춤법 검사 문의를 받는 건 처음이라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뭐, 제대로 썼는지 봐 주는 것 정도야.’
“아, 네 보여 주세요.”
흔쾌히 풍등을 받아 그가 적은 글을 찾았다.
글자를 찾으려 풍등을 돌리던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풍등 위에는 점과 선으로 된 문자가 적혀 있었다.
문자를 인지하기 무섭게 알람음이 들렸다.
띠링.
[특성 버프 ‘마족어 해석’ ON]
세 줄짜리 문장 위로 반투명한 검은 창이 덧씌워졌다.
[그대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하여 답신을 드립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새겨지는 문장은 정중했으나, 목깃 단추를 하나씩 잠그는 것처럼 숨을 조여 왔다.
[그대를 가질 수 없는 게 나의 운명이라면.]
위험하다는 걸 느꼈지만, 풍등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지막 문장 위로 덮인 해석이 느릿하게 읽혔다.
[나는 그대를 죽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