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말을 할수록 씁쓸한지 아이시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나도 기분 우울해지네. 오늘은 술 안 마시려 했는데 먹어야겠어요.”
우리는 주막으로 들어갔다.
아이시스는 제가 한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술부터 주문하고 메뉴판을 받았다.
그런데 아이시스와 내가 받은 메뉴판의 두께가 달랐다.
“왜 제 메뉴판만 두꺼운 걸까요?”
아이시스가 받은 메뉴판은 내가 받은 메뉴판의 절반 정도 되는 두께였다.
“저는 7점 줘서 시킬 수 있는 음식 범위가 영애랑 다르니까요.”
“설마요. 메뉴판 바꿔 봐요.”
“그래 봐야 소용없더라고요. 글자 크기가 커지거나 작아질 뿐이지 보이는 메뉴는 그대로였어요.”
아이시스가 훌쩍이는 시늉을 하며 눈가를 닦았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이시스의 메뉴판을 펼쳐 보니 글자 수만 깨알 같아졌을 뿐, 보이는 메뉴는 똑같았다.
그건 메뉴를 시켜도 똑같았다.
아이시스가 젓가락으로 빨간 족발의 살점을 집어 올리고는 물었다.
“이게 정말 불족발이에요?”
“네, 아이시스 눈에는 어떻게 보여요?”
그녀는 눈물을 참듯 콱 입술을 깨물었다가 슬프게 말했다.
“김치전이요.”
“아!”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아이시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난 틀렸어요. 영애라도 맛있게 먹어요.”
아이시스는 씁쓸한 얼굴로 동동주를 한 번에 비우더니 전을 입에 넣었다.
“그래도 7점이라도 줘서 다행이지. 순대곱창은 지켰다.”
우리 앞에는 5개의 접시가 놓여 있었는데, 내게는 5가지의 메뉴가 그대로 보였지만 아이시스에게는 김치전 3접시와 순대곱창 2접시로 보인다고 했다.
“근데 현대 음식 이름 들을 때마다 몰입감이 깨지긴 하네요.”
아이시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동동주를 마셨다.
“몰입감 깨져도 좋으니 저는 영애의 설문 조사 결과를 가져오고 싶네요.”
“거부할게요.”
“아, 얄미워라.”
그러면서도 아이시스는 웃으며 잔을 부딪쳐 왔다.
우리는 현생의 진한 맛을 느끼며 위장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술 단지를 모두 비워 내자, 뺨에 열이 오르고 기분이 좋아졌다.
“저 취했나 봐요.”
아이시스가 눈을 빛냈다.
“오, 그렇다면 진실 게임이라도 해 볼까요?”
“우리끼리 진실할 일이 뭐 있어요.”
아이시스는 유저에게 버프를 사용하지 못한 게 내심 아쉬웠는지, 내게 진실을 듣고 싶어 했다.
눈을 저렇게 빛내는 걸 보니 말이다.
어떤 질문을 하고 싶길래 저러는 걸까?
나는 턱을 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세요. 하나 정도는 대답해 드릴게요.”
아이시스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알렉스랑 무슨 사이예요?”
“엥? 알렉스요?”
뜻밖의 이름에 술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표정이 흥미를 돋웠는지 아이시스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황성에 독초를 전달한 인간도 잡혔는데 알렉스가 직접 들어가서 그놈을 심문을 했나 봐요.”
협회 기지가 여름국과 가을국의 경계에서 발견된 탓에, 알렉스는 가을국에도 조사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디아나는 알렉스가 그동안 협회를 뒷조사해 왔으니 그의 권한을 인정했다. 그가 더 아는 게 많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황태자가 직접 겨울국 재건 협회 일원을 심문했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냥 가을국으로 데려가서 고문관에게 넘기거나, 조사를 꾸리는 게 낫지 않나?
조찬 분위기를 생각하면, 여름국 신하들이 가을국 황태자를 도와 대신 고문 같은 번거로운 일을 해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시스의 이어진 말 덕분에 그 의문은 곧 사라졌다.
“알렉스 잔인한 건 알았는데, 직접 고문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알렉스 선생님은 고문마저 직접 하신 모양이었다.
“죄수의 손톱 아래에 나무 조각을 넣고 그걸 제 이능으로 늘렸다가 줄였다가 반복했나 봐요.”
아이시스가 손가락을 손톱 밑부터 팔꿈치까지 쭉 그으며 설명했다.
“윽, 영애 말하지 말아요. 저 그런 거 못 들어요.”
나는 귀를 막았다.
“미안해요. 어쨌든 그건 약과였대요. 아주 사람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더라고요. 사용한 독이 뭔지, 어디서 구했는지, 납치한 뒤에 어디로 보낼 예정이었는지 다 자백했는데도 한참을 괴롭혔대요. 그 정도면 그냥 괴롭히려고 들어간 거죠.”
나는 빠르게 내가 알렉스에게 뱉었던 말들을 복기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른 적이 있었나?
“…….”
몇 번 있는 거 같다.
앞으로 주의하자.
알렉스한테는 절대 원한 사지 말아야지.
나는 팔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며 다짐했다.
그때, 주모가 와서 단지를 새로 놓아 주고 갔다.
“아이고, 외국에서 온 처자들이 술을 참 잘 마시네. 입에 맞나 봐요?”
맞고말고요. 조국의 술맛인데 어찌 잊겠습니까.
“아니, 이 처자는 왜 이렇게 아련한 눈으로 날 본데? 안주 하나라도 더 챙겨 달라는 거야, 뭐야?”
주모는 그렇게 말하면서 주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분도 되지 않아 과일 접시를 가져다주었다.
“처자들 너무 기름진 것만 먹었어. 과일도 좀 챙겨 먹고 그래요.”
내가 여름국 유저였다면 이 주막의 단골이 됐을 거다. 저렇게 스윗한 NPC는 처음이었다.
“여름국은 최고예요.”
“그쵸. 먹는 거엔 모든 캐릭터가 인심이 후하더라고요.”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은 아이시스가 다시 나를 능글맞게 쳐다봤다.
“어쨌든 내 생각에는 데이지한테 독향을 피운 게 화가 나서 알렉스가 오버한 거 같거든요. 디아나 생각도 그렇고.”
또다.
디아나도 그러더니 이제는 아이시스마저 알렉스가 날 좋아한다고 오해하는 모양이다.
나는 찜찜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저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에요. 알렉스는 겨울국 재건 협회를 오랫동안 의심해 왔거든요. 그동안 시간 낭비한 게 열 받아서 화풀이한 걸 거예요.”
그런데 아이시스는 혀를 차며 눈을 가늘게 떴다.
“데이지 영애 눈치 없는 여주군요.”
“예?”
“모두가 날 좋아하지만 나는 그걸 몰라. 이거 유구한 여주 클리셰잖아요.”
“아니, 정말이라니까요. 알렉스는 저 안 좋아해요.”
“확실해요?”
“네, 확실해요.”
“어떻게 확신해요?”
나는 바로 답하려다 5초간 고민한 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이런 대화 진짜 위험해요. 순간, ‘진짜 알렉스가 나 좋아하나?’ 의심했잖아요.”
“좋아하는 거 같다니까요?”
“아 제발 이러지 마세요. 가뜩이나 저 #착각계 키워드 있는데, 제가 착각하는 사람 될까 봐 겁난다고요.”
엘런의 착각을 실시간으로 관람해 온 나는 죽어도 그런 흑역사를 쌓고 싶지 않았다.
아이시스는 질색하는 나를 보며 푸스스 웃었다.
“이럴 때면 정말 우리가 빙의했다는 게 실감이 나요.”
“왜요?”
“처음에는 지나가는 남주만 봐도 신기해하고 재밌어했잖아요.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남주 입장에서 감정을 생각해 보게 되고 또 고민하고 부담스러워하는 게 꼭…….”
아이시스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여주 같죠?”
오그라드는 발언에 소름이 돋았다.
반박하려는데 아이시스가 계속 말을 이었다.
“봐 봐요. 데이지도 그렇잖아요. 내 취향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걔가 날 안 좋아할 거다’, 라고 알렉스 감정을 먼저 생각하잖아요.”
아니 뭐 그렇기는 한데.
입을 달싹이던 나는 꾹 다물었다. 그리고 아이시스의 얼굴을 살폈다.
‘……불안한데.’
아이시스의 눈이 풀려 있었다.
대사도 알코올에 적셔 둔 것처럼 술 냄새가 난다.
나는 아이시스가 더 이상 흑역사를 적립하지 않도록 곱아든 손가락을 펴 반상에 올려진 귀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환약을 꺼냈다.
“영애, 아 해요.”
그녀는 제 앞으로 다가온 둥근 환약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불취단 아니에요?”
“맞아요.”
“……이건 또 언제 준비했어요.”
“여름국 오자마자 준비했죠. 제가 이렇게 영애의 건강에 진심이랍니다. 먹어요.”
아이시스가 흐린 눈으로 환약을 보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으, 쓰다.”
“그래도 금방 술 깰 거예요.”
나는 그녀의 물잔도 가득 채워 건넸다.
“아이시스, 우린 지금 남주니 여주니 하면서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니까 정신 차려요!”
나는 탕탕 상을 치며 그녀를 개도했다.
“오늘 세 끼는 더 먹어야 해요. 나 진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요.”
부푼 기대를 안고 온 여름국 한식 투어.
악독한 흑막 때문에 무려 9일이나 현대 한식을 먹을 기회를 빼앗겼다. 그러니 아주 바쁘게 위장을 채워야 한다.
고로 감정은 치워야 할 때.
자칫 잘못하면 곱창과 삼겹살을 먹지 못하고 봄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아이시스는 내가 건넨 물을 마시며 키득키득 웃었다.
“데이지 영애도 진짜 한식에 진심이구나.”
“저도 제가 이렇게 한식에 진심인 줄 몰랐어요.”
그녀가 생각났다는 듯 불쑥 물었다.
“가면서 길거리 음식도 먹어 볼래요?”
“……길거리 음식도 있어요?”
아이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 반대편에 노점상 골목이 있거든요. 닭꼬치 포장마차도 있고, 해산물 바로 앞에서 썰어 주는 곳도 있어요.”
여름국은 천국인가요?
나는 주머니를 열어 바로 소화제를 한 알 먹었다.
생각보다 더 화려한 현대 한식 라인업에 위장을 단단히 준비시킬 필요가 있었다.
나는 다시 내 귀주머니를 점검했다.
4장의 이동 스크롤, 금화, 숙취해소제, 소화제.
여름국 음식을 제패할 준비가 된 자의 주머니다.
나는 돈을 반상 위에 올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납시다.”
“좋아요. 아, 주머니는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아이시스에게 주머니를 건네고 주막을 나왔다.